구약인물(모세) 강해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출 05:1-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2-10-16 12:10
조회
296


구약인물(모세) 강해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출 05:1-3)
2022. 10. 16.


프롤로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변명으로 일관하던 모세를 포기치 않으시고, 결국은 순종하게 하신 집념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한 번 세우신 계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시는 분이다.
↳한두 번 불순종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한두 번 권해보고 돌아서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오늘날의 모세는 없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모세도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모세는 아론과 함께 드디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단순히 민족 해방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느 정도 기대했던 바이다.
↳이미 3장 10절에서, 모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바가 있다.

-3장 10절을 확인하고 넘어가겠다.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런데 실제로 바로에게 요구할 때는 것은, 조금 달라졌다.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하여 절기를 지킬 것이다는 말씀이, 그 이후에도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다.
↳설교자는 자기 취향에 따라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는 것 못지않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회중은 강단을 맡은 말씀 사역자가,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지 않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회중이 자신을 위해서는, 선포되는 말씀을 받을 때, 취사선택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를 받아드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계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말씀대로 믿는 신앙이 바른 신앙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1.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말은, 신앙의 기준이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삶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처럼 오직 말씀뿐이다.
↳신앙의 근간이 말씀 위에 세워져 있는지 점검하기 바란다.
↳그래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인 말씀 위에,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기를 바란다.

-바로 앞에서 모세의 요구는, 단순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예배의 자유를 말한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난다는 것은, 노예상태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 자유를 얻어서 무얼 하겠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건강 주세요”도 좋지만,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재물을 주세요”도 좋지만,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의 기도가 바뀔 필요가 있다.
↳“건강을 주세요.”에서 끝나면 안 된다.
↳“건강을 주시면 그 건강을 이렇게 사용하겠습니다.”
↳“재물을 주세요.”도 마찬가지이다.
↳“재물을 주시면 그 재물을 이렇게 사용하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빠뜨리지 않는 제목이, “자녀에게 지혜를 주세요”일 텐데, 그것 역시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이렇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세요”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목적은, 구원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녀가 되게 하는 데 있다.

-교단 헌법에 실린 요리문답 1번 문제는 이렇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예배자로 사는 데 두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창조 목적 역시 예배에 있다고 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예배,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예배이다.

-또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분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예배하기 위해서이다 고백하며 살기 바란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바로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어쩌면 바로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그는 여호와라는 말조차 처음 들어봤을지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한 두 명도 아닌 몇 십만명을 보내달라고 하니, 그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인가?
↳바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무리한 요구이다.

-바로가 이렇게 나올 것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출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모세는 바로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바로는 하나님이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닥칠지 모르고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호기롭게 말했다.
↳바로가 만약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그 정도로 교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는 무지로 인해 멸망한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도 무지의 결과가 초래하게 될 결과를 말했다.
호4:6a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선민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난 축복이다.
↳일생일대의 축복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축복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높인다.
↳“하나님이 누구이기에”하고 교만을 떤다.
↳하지만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그들의 최후는 지옥으로 정해져 있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듣든지 말든지의 태도’나 ‘알아서 들어라는 식’의 자세로 던져서는 안 된다.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
↳그들을 가르치겠다는 자세로 하면 안 된다.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겸손한 태도로 알아듣기 쉽게 전해도 복음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복음과 전도자를 배척하는 이들이 있다.
↳복음을 알고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바른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영적인 예배만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셨다.
↳진리란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대한 앎’을 말한다.
↳아무리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신비한 역사가 있다고 해도, 말씀이 부재한 예배, 말씀이 부실한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영과 진리가 조화된 예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가 균형 잡힌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교회 예배가, 그렇게 드려지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더러 바로에게 이런 예배를 요청하게 하셨다.

-첫째, 광야에 가서 드리는 예배이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다.
↳예배의 장소보다 예배의 대상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배의 공간이나 시설보다, 예배의 대상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배자가 어떻게 예배해야 할 지 말씀하셨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럼 예배의 장소는 무시되어도 된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으로 고집해서도 안 되고, 예루살렘으로 고집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하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면, 장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본 입장이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곳을 말씀해 주셨다.
↳그곳이 광야라는 곳이다.
↳당시 애굽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 적막한 광야로 가라고 하셨다.
↳사흘 길쯤 가서,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 예배하라고 하셨다.

-왜 한사코 광야로 가라고 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광야로 가서 예배하라고 했을까?
↳광야에 가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가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가야,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이 존재할 수 없다.
↳광야에서는 옆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다.

-둘째 절기를 지키는 예배이다.
1b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절기란 문자적으로 명절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명절은, 그냥 명절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명절의 핵심은, 잔치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절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감사와 기대이다.

-하나는 감사의 의미이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대의 의미이다.
↳과거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걸 기대하는 것이다.

-이 감사와 기대는 두 가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바로 기쁨과 노래이다.
↳그들은 잔치를 벌여놓고 기뻐했다.
↳그들은 축제를 벌여놓고 노래했다.

-물론 기쁨의 원인은 하나님 때문이었다.
↳노래하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노래하는 예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배이다.

-전통적인 한국교회 예배는 거룩과 경건은 중시했다.
↳사실 예배에서 거룩함과 경건함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거룩함과 경건함이 없는 예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함과 경건함을 중시하는 예배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로교에서 아무리 거룩함과 경건함을 강조한들, 가톨릭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가톨릭 미사에 참석해 보면, 거룩함과 경건함 그 자체이다.

-예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건 잔치성, 축제성이다.
↳잔치에는 항상 기쁨이 있다.
↳축제에는 반드시 노래가 있다.
↳축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특징은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기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교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거기에 노래와 춤이 있다.

-한 수도회의 총장이, 그 수도회 소속 수도원 중, 어느 한 곳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수사들이 심각하고 어딘지 울적해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찰이 끝난 후, 수도원장이 총장에게 와서 말했다.
↳“총장님, 틀림없이 이 수도원이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총장은 수도원장에게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수도원장은 자신감을 보이며 대답했다.
↳“보신대로, 저희는 시간에 맞게 기도하고 일하며 수사들은 규칙을 잘 지킵니다.”

-총장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정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 같군요?”

-수도원장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총장은 수도원장을 향해 일침을 날렸다.
↳“기쁨이요. 기쁨이 없이는 기도와 노동은 고역이 되고 맙니다.”

-수도회 총장의 말에 동의한다.
↳예배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쁨이 없는 예배는 고역에 가깝다.
↳노래가 없는 예배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건조하다.
↳예배 한 시간도 길게만 느껴진다.
↳“예배 드림”이 아니라 “예배 견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예배에서 영적인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예배에 대한 목마름, 예배에 대한 갈급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마른 예배자’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목마른 예배자라는 찬양을 알 것이다.
모든 짐 내려놓고 가는
주 앞에 목마른 예배자
주 음성 듣기를 원하네
주 얼굴 보기를 원하네
성령 하나님 이곳에 가득한
주님을 높이며 경배합니다
성령 하나님 이곳에 가득한
주님을 높이며 예배합니다

-예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한 주간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 주일예배가 하늘잔치가 되게 해주세요. 제가 그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해 주세요”.
↳한 주간 내내 이렇게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에 참여한 것과 하나님을 까먹고 살다가 벌써 주일이야 하고 헐레벌떡 예배에 참여한 것이 같을 수 없다.

-셋째로 희생을 드리는 예배이다.
3b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희생이란 제물을 말한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은, 중요한 정도가 아니고 절대적인 요소이다.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희생제사를 드리면 안 된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제물이자 마지막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이 마지막 제단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잘 말해준다.
히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원래 제사의 목적이, 죄사함과 관계회복에 있는데, 히10:14 말씀대로 이미 예수님이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방식을, 구약의 성도들과 달리하고 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드릴 예배는, 바울의 안내대로 영적 예배이다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다.
↳다시 말하면 죽은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내 몸을 드리는 예배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 장소에 몸이 와 있어야 한다.
↳TV나 컴퓨터를 켜놓고, 예배 볼 수는 있어도,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드렸지만, 그건 비상상황에서 드리는 예배로 봐야 한다.

-어떤 이민교회 교인들이, 하도 주일날 예배를 빼먹고 골프장을 가서, 목사님이 제발 주일날은 골프장에 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 몇 주 후 집사님 한 분이 주일날 골프장에 간 것이었다.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하면서, 그래도 믿었던 집사님이었기에, 목사님은 화가 나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괴상한 논리를 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몸은 교회에 와있는데 마음은 골프장에 가있습니다. 골프장에 가면 몸은 골프장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에 가있습니다. 몸과 마음 중 어느 쪽이 교회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몸보다는 마음이 교회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서...”

-그건 궤변이다.
↳말장난을 치는 것에 불과하다.
↳예배 때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몸까지 와야 완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드리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여,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주여, 내 시간을 드립니다.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주여, 내 물질을 드립니다.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주여, 내 재능을 드립니다.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주여, 내 생명을 드립니다.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이런 결단이 없는 예배자는, 예배에 참석한 것일지 몰라도, 예배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참석’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자리나 모임에 참여함’이다.
↳‘참여’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그러니까 참석은 출석의 의미가 강하고, 참여는 관계의 의미가 강하다.
↳희생이나 제물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배의 참석자가 아닌, 예배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제사 구경 온 제물이란 있을 수 없다.

-예배의 십계명이란 글이 있어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겠다.
↳1. 예배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임을 알고 예배에 참여하라.
↳2. 예배자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응답’하라.
↳3. 예배자는 단순히 ‘복을 받으려는 마음’을 앞세우지 말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마음’ 을 먼저 가지라.
↳4. 예배 출석 시에는 ‘몸’을 정결히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라.
↳5. 공중예배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임이므로 어린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다 함께 참여하라.
↳6.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경축’의 태도로 마음을 바쳐 예배하라.
↳7. 예배순서의 각 요소는 다 똑같이 중요하므로 찬송, 기도, 고백, 찬양, 말씀선포, 응답, 봉헌을 ‘자발적’으로 ‘열심’을 다해 참여하라.
↳8. 미신적이요 운명론적인 예배 심성을 버리고 창조주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승리’를 경축하라.
↳9. 공중예배는 산만하게 모인 ‘군중(crowd)의 예배’가 아니라 ‘회중(congregation)의 예배’가 되어야 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다 하나가 되라.
↳10. 예배자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후 세상의 구원과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과감하게 동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