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5:하나님은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26-4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6-30 00:00
조회
903
고린도전서 강해 25
하나님은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26-40)
2019. 6. 30.

프롤로그

-고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더 싸우다가는 두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다.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중간에 나타나서, 이쪽 나라에 가서 왕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비유하건대 이 나라는 만월 같고 저 나라는 초승달 같습니다. 큰 나라가 되어서 굳이 조그마한 나라와 싸우려고 하십니까?”

-듣자하니 왕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 그래! 그러면 그만두지 뭐...”
그리고는 싸움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 사람이 이번에는 저쪽 나라에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고는 따져 물었다.
“뭐라고? 그 나라는 만월이고 우리는 초승달이라고...? 이 사람, 우리를 무시하는 거요?”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에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만월은 이제부터 기울 거고, 초승달은 이제부터 커질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가 당신네들을 무시했다는 겁니까?”

-그제야 그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오해를 했소이다!”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이 그쳤다고 한다.

-말 한마디가 화해를 하게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분쟁이 큰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시작한다.
분란도 그렇다.
뭐 엄청난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한 말 한 마디에서 시작한다.

-기독교 모든 교파에서 인정하는 신조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이다.
그 신조에서 교회를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이다.
하나인 교회를 고백하지만 실제로 교회가 하나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기도, 일명 대제사장적 기도에 보면 하나됨을 위한 내용이 있다.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마치 장차 교회가 분열될 것을 예상이라도 하신 것처럼 하나 되기를 간구하셨다.
신앙고백 상 하나인 교회와 실제의 교회는 충돌되는 게 사실이다.
보이는 현상을 놓고 보면 그렇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힘들지도 모른다.

-개신교의 약점이 분열이라면, 개신교의 강점은 다양성이다.
그게 그거다.
약점과 강점은 관점의 차이다.
다양성으로 존재하면 다툼이 일어날 소지를 안고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교파의 다름, 교단의 다름, 교회의 다름...다 다름인 것이다.

-같은 교회 다닌다고 다 같은가? 다르다.
어쩌면 다른 게 정상이다.
하나님이 각자를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다르면 안 되는 게 있다.
신앙 색깔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절대로 같아야 하는 것이 있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면 안 된다.
신앙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형식은 조금 다를 수 있다.
예수를 정교회식으로 믿을 수 있고, 가톨릭식으로 믿을 수 있고, 개신교식으로 믿을 수 있다.
복음을 장로교 그릇에 담을 수도 있고, 감리교 그릇에 담을 수도 있고, 순복음 그릇에 담을 수도 있다.

-개교회 안에서도 신앙색깔이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꼭 같아야 하는 것이 있다.
교회 비전이다.
교회 비전을 중심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어야 한다.
교회 비전을 중심으로 목회자와 교우들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 다른 마음, 다른 뜻이면 파열음이 날 수 있다.
처음에 작은 파열음이지만, 점차 교회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파열음이 밖으로 새 나오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교회가 된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목회자도 허물이 있고, 교우들도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옛말처럼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화평을 추구하고자 할 때, 교회의 화평이 유지된다.
한 사람이라도 싸우고자 나선다면, 교회의 화평은 깨질 수 있다.

-고린도교회가 다양한 이유로 분쟁했다.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교회가 예배가 없어서 분쟁했는가? 아니다.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방언’, ‘통역함’...
그들은 멀쩡하게 예배 잘 드렸다.
시간 시간 잘 모였다.
분쟁하면서도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고린도교회는 담임목회자가 비어 있다.
얼마나 힘들게 했든지 2대 담임이었던 아볼로가 사임하고 에베소로 떠나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여서 예배했다.

-그나마 그게 다행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최우선순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하고서도 예배 자리는 지켜야 한다.
교회 오다가 차에서 부부 싸움이 일어났어도, 잠시 휴전하고 예배 참석해야 한다.
물론 같이 나란히 앉아서 예배 드리기는 힘들 거 같다.

-찬송시, 말씀, 방언, 통역은 당시 초대교회 예배의 중요 요소였다.
찬송시와 말씀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무분별한 방언이었다.
절제하지 못하는 방언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예배가 무질서해졌고, 예배가 언제 끝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교회에 덕이 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면 절제가 필요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직분자는,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이게 교회에 덕이 될까’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교회에 덕이 될까?
교회에 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를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교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교회의 덕을 깨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을 강조했다.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여러 은사 중에서도 방언이 최고로 인정받았다.
방언을 받아야 비로소 은사받은 축에 넣어줬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같은 예배 순서가 아니었다.
찬송시와 말씀 외에 방언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도 예배에 있어 찬양과 말씀은 핵심이다.
우리교회는 아예 주일예배의 두 축이 찬양과 말씀이다.
본문의 방언은 기도의 성격보다 계시의 성격이 짙다.
당시는 신약 성경이 나오기 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방언한다.
그럼 통역자가 그 방언을 통역한다.
또 다른 사람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방언한다.
그럼 통역자가 그 방언을 통역한다.
그렇게 몇 사람이 일치하면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마치 방언 경연장 같았다.
예배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두 세 사람 정도 하면 되는데, 서로 자기도 계시 받았으니 하겠다고 한다.
차례를 따라서 하지를 않았다.
심지어 통역하는 자가 없는데도 방언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무질서해졌다.

-오늘날은 예배 순서에 방언이 들어가지 못한다.
통성기도 시간에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할 수는 있어도, 예배의 공식 순서가 되지는 않는다.
예배의식이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방언의 은사만 문제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도, 비슷한 권면을 들려주고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예언의 은사도 사용법은 비슷하다.
두 세 사람이 예언을 한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분별을 해야 한다.
방언은 통역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
문제는 통역자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라고 했다.

-오늘날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도 마찬가지다.
분별을 해야 한다.
분별하라는 말을,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취사선택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이다.
설교가 설교자의 사견인지 성경의 가르침인지, 설교자의 이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소개된 베뢰아 교인들처럼 말이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베뢰아교인들은 말씀을 듣는 회중의 바른 태도를 잘 보여주고 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 바란다.
들은 말씀을 잘 분별하여 말씀에 순종하기 바란다.

-예언을 질서있게 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는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거듭나게 된다.
즉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배움이 필요하다.
성삼위 하나님을 배워야 하고, 교회에 대해 배워야 한다.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배워야 한다.
세례 받기 전 배움이 필요하고 양육과 훈련을 위한 배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평생 학습자로 살아야 한다.
목회자도 평생 학습자여야 하고 장로도 평생 학습자여야 한다.
리더십들이 배움의 본을 보여야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예언을 분별하는 대상으로 29절에서는 다른 이들이라고 했는데 32절에서는 다른 예언하는 자로 나온다.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그런데 공동번역성서는 좀 다르게 번역했다.32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설교자 입장에서 공동번역이 와닿는다.
설교자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철저히 설교 원고를 작성한다.
약식이 아닌 완전한 설교 원고를 만든다.
그렇게 작성한 설교문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다.
나는 설교를 할 때 작성한 원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큰 실수를 하지는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데, 시선이 설교 원고에 매이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원고 설교를 해도 설교자는 자기 심령을 자제해야 한다.
하물며 원고 설교를 하지 않는 설교자는 더더욱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회중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되,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말씀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 관리를 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도 회중과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마음 관리를 잘 못하면 설교에 독초가 섞일 수 있다.

-오늘날은 예배 인도자가 정해져 있다.
헌신예배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회자가 인도를 하고 설교를 한다.
하지만 그 외 행정이나 사역에서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아직 있다.
지체로서 자기 역할만 잘 감당하면 되는데, 역할이 겹치거나, 다른 사람의 역할을 침범함으로,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질서가 깨지고 불화가 생기곤 한다.

-그 점에 대해 바울이 답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하나님 자신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며, 질서 있는 교회, 화평한 교회가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라고 고백하지 않나?
교회가 질서를 잃으면 사회 클럽만도 못하다.
교회가 화평을 잃으면 이익 집단만도 못하다.

-우리가 섬기는 그분이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교회가 화평을 잃으면 다를 잃는 것이다.
무질서한 교회, 불화한 교회를 누가 찾고 싶겠는가?

-어느 부부가 오랫동안 서로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을 결정하고 물건을 나누게 되었다.
살림을 다 나누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몇 년 전 불행하게 죽은 아들의 유품이었다.
다 없앤 줄 알았는데, 이것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그 아들의 일기장이었다.
부부는 그 일기장을 서로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그 일기장을 열어 보게 되었다.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써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엄마 싸우지 마세요.’
부부는 목이 메어 한 동안 마주 보다가, 무심결에 서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아이의 소원을 이루어 줍시다" 하며, 다시 화해를 했다고 한다.

-죽은 아들의 일기장을 보고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다.
완벽하게 갈라설 준비를 했지만 죽은 아들이 남긴 일기장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었다.
성경은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일기장이다.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눈물의 일기장이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나님은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를 만드시고 질서를 부여하셨다.
그게 자연 법칙이다.
우주는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유일하게 인간이 거스른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창조주의 법칙을 거스른다.
그러다가 심판을 받곤 한다.

-우리 교단 총회에서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독교가 성 소수자의 인권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창조주의 법칙 곧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롬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창조주가 세운 질서가 순리이고, 그에 반하는 것이 역리다.
기독교는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어떤 교묘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이용하여 반정부 투쟁을 하는데, 그들에게 속으면 안 된다.
교회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지,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당시 교회의 무질서와 불화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해법을 내리고 있다.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오늘날의 시각으로야 여성들이 발끈할 수 있다.
당시 이렇게 말할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여인들은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교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호기심을 발휘하여 온갖 사소한 문제에 대해 질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 전체 교회의 상황이 여인의 교회 활동을 금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으므로 바울은 매우 강력하게 여인들의 교회 활동을 제한하였다.’

-그래서 어떤 교단은 이 말씀을 근거로 여성 리더쉽을 반대한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여자 목사도, 여자 장로도 세우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교회 여인들의 수준과, 오늘날 교회 여인들의 수준을 같이 볼 수는 없다.
문자 그대로 하면,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했는데, 그럼 남편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남편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이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성경 기자의 의도와 말씀의 정신을 제쳐두고, 문자에 갇히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소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남자든 여자든 교회에서는 가능하면 잠잠한 게 좋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 크게 울려야 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크게 울려야 한다.
그리고 교회 밖에 나가서 큰소리칠 수 있어야 한다.
집밖에 나가면 쥐죽은 듯 하고, 집안에 들어오면 사자가 되면 안 된다.
교회에서 열심히 배우고 단련하고 연마하여, 세상이라는 필드에 나가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란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지금까지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특별히 잘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본인들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다.

-바울은 점잖게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바울의 글을 주의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우월성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남의 조언이나 충고에 귀를 막는다.
다른 사람은 그걸 안다.
그걸 자기만 모른다.
그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한다.
당시 고린도교회를 이끄는 리더십들이 그랬다.
그런데 바울이 보낸 편지가 자기들의 생각과 달랐다.
그래서 바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바울이 쐐기를 박고 있다.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38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권면이 무시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바울은 은사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예언을 사모하되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다.
방언은 좋은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은사가 다 그렇긴 하다.

-은사활용의 기본 원칙이 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은사 활용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 삶 전체에 해당된다.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직 화평의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