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4: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빌 2:12-1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9-27 00:00
조회
867
빌립보서 강해 04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빌 2:12-18)2018. 9. 23. 프롤로그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필요한 것 몇 가지로 말했다.
권면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야 한다.
목회자의 권면이 있어야 한다.
셀리더나 사역 리더의 권면이 있어야 한다.

-위로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모임이다.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목회자도 리더도 위로를 받아야 한다.

-교제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교제가 아니다.
친한 사람끼리 가까지 지내는 교제가 아니다.
성령의 교제요 영적인 교제다.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한다.
긍휼과 자비는 약자에게 필요하다.
사회에 약자가 있듯이 교회에도 있을 수 있다.
긍휼사역은 교회를 넘어 사회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에 보다 결정적인 것이 필요함을 말했다.
일치다.
바울은 일치를 다양하게 표현했다.
일치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으로 다툼과 허영을, 가져야 할 것으로 겸손을 들고 있다.
다툼과 허영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에 반해 겸손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
그리고 겸손의 롤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었다.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다.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회였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내용을 보면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다.
그렇다. 지상에 있는 교회치고 완벽한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행복한 교회는 있을 수 있어도 완벽한 교회는 없다.
빌립보교회에 필요하다고 한 것이, 현대 교회에도 필요하고, 우리교회에도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오늘 주신 말씀도 같은 차원이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친근하게 호칭한다.“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이 호칭에서 그들을 사모하는 바울의 심정이 느껴진다.
감옥에 갇힌 채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바울에게, 그들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감옥에 있는 바울을 생각해 준 것은 아니다.
대단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기억해 준 게 감사하고, 마음을 써준 게 감사하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있을 때도 잘했다.

-12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는다.2: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목회자에게 잘하는 게 별건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목회할 때도 언제나 순종했다.
교회의 출발이 은혜로워서 그런지, 교우들이 순종을 잘했다.
순종을 잘하는 교우들을 만나는 것은 목회자의 복이다.
아무리 목회자가 뛰어나도 교우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가 영적 전쟁터가 된다.
서로가 불행하다고 느낀다.
목회자는 나는 성도 복이 없다고 생각하고, 교우들은 우리는 목회자 복이 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 때 언제나 순종했던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을 부탁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하는 표현이다.
언뜻 구원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번에 구원 받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럼 12절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원을 지나치게 좁혀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원이란 단어가, 실제로는 다양한 뜻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칭의이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셨다.
내가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다.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이 단계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출발이지 완성이 될 수는 없다.

-구원의 완성은 영화이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구원에 있어 칭의가 출발 단계이고, 영화가 완성 단계라면 ,그 중간 단계가 있다.
바로 성화이다.
이 단계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계속해서 걷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평생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칭의라면,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영화이다.
그럼 성화는?
광야를 걷는 것이다.
칭의나 영화는 일회성이다.
성화는 반복 반복 반복 반복... 될 때까지 반복이다.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닮아가는 과정으로.... 반복 반복 또 반복하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은 성화를 가리킨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도하시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이게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걸 말해준다.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곧 성령님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신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후 그대로 두시는 게 아니다.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

-물론 거룩한 소원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닮고자하는 거룩한 소원을 말한다.
말씀을 따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을 말한다.
타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거룩한 소원을 말한다.
그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하나님은 행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
그렇다고 아무 소원이나 가지면 안 된다.
내 욕심으로 충만한 소원을 가지면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불타는 소원을 가지기 바란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애타는 염원을 가지기 바란다.
그러면 그 소원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실 줄 믿는다.

-크라비아의 선교사 조지 스미스의 이야기다.
그는 평생의 목표를 아프리카의 선교에 두었다.
그는 결국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그는 몇 개월의 선교 활동으로 여자 1명을 전도한 이후에, 추방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거듭나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었다.
그로부터 1백년 후에, 아프리카에서 1만 3천명의 크리스천이 탄생했다.
조지 스미스에 소원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한 우려를 전한다.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과 시비”
3절의 다툼과 허영에 이어 또 등장한 부정적인 단어이다.
“원망”의 사전적인 정의는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이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이다.
원망, 불평은 자기를 불행하게 한다.
시비, 말다툼은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린다.
물론 자기 안의 평안도 깨진다.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라.
작은 일을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애써 일하고도 시비하고 말다툼하면 그걸로 끝이다.
불평과 원망의 반대말이 감사라면, 시비와 말다툼의 반대말은 침묵이다.
보면 입으로 공치사하는 게 문제다.
괜히 침묵을 금이라고 한 게 아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에 이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겸손하고 교회가 일치된 상태였다면 다툼과 허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일에 감사와 침묵이 잘 지켜졌다면 굳이 원망과 시비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 다툼과 허영이 있어도 되고, 원망과 시비가 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그런 걸 가만히 두고 보라는 말도 아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불평한다.
그게 고질병이다.
웬만해선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다.

-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늘 불만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물으셨다.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하였고, 또 자식들도 다 속을 썩이고, 남편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군요!” 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불평 많은 사람은 똑같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럽니까?” 하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계속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마인드가 문제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평을 찾아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불평가와는 무슨 일이라도 동역하기 힘들다.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시비를 가리려고 하면,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시비를 가릴 때 판단 기준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똑똑하여 원망하고 시비할 바에는, 차라리 미련하여 감사하고 침묵하는 자가 낫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한 이유가 나온다.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은, 타인에게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없는 걸 의미한다.
순전하다는 말은,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원망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원망하기를 좋아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면 싫어한다.
그게 자기 정신 건강에도 나쁠뿐더러, 공동체 생활에도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원망을 잘하는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비 가리는 것을 잘 하는 사람도, 자기에게 시비 걸어오면 싫어한다.
무엇보다 세상에 빛이 안 된다.

-기독교에 뭐가 많이 섞여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기독교가 불교 같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독교가 유교를 닮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본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우리가 순전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인으로서 순전함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세상이 왜 교회를 욕하는가?
교회가 불교 사찰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교회가 가톨릭 성당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교회가 이슬람 사원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 같지 않아서다.

-우리 역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수 없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찍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게 우리의 정체성이다.
다시 말씀 드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이자 세상의 빛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입니다.”“당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문제는 이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코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말은 잘한다.
교회에 대한 비판은 예리하다.
하나같이 맞는 말만 한다.

-세상이 틀린 말을 하면 무시하면 된다.
그들이 뭐라 하든지, 우리는 우리 길을 가면 된다.
그런데 그들이 맞는 말만 골라가면서 한다.
그러니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는 그들의 비위를 다 맞출 수 없다.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그들은 비판의 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너무 다르다.

-그런데 때론 교회가 교회법을 지키지 않아서, 여론의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땐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 탓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어쩌고 하면 안 된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는 못할망정, 걱정거리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면,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비춰야 하는가?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이건 교회만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교회가 세상에 해야 할 것들도 상당하다.
그러나 교회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게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그건 교회가 깊은 산속이 아닌 세상의 한 복판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한 달음질은 헛되지 않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한 수고 역시 헛되지 않다.
그리스도의 날에 그게 교회의 자랑이 된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게 우리들의 자랑거리가 된다.

-교회가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려면, 교회에 생명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교우들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받은 생명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생명의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한다.
먼저 자신이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이 돼야 한다.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환하게 밝힐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의 말씀을 귀히 여기기 바란다.
기록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자.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자.
우리가 다 생명의 말씀의 사람이 되자.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되자.

-빛은 그냥 비춰지지 않는다.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보면 희생을 뜻하는 말들이다.

-자기를 태움 없이는 빛을 비출 수 없다.
자기희생 없이는 생명의 말씀을 밝힐 수 없다.
그런데 이 희생이 억지가 아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억지 희생이 아니다.
자발적인 희생이요 자원하는 희생이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교회가 이런 희생의 토대가 될 때,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힐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남은 삶을,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에 환히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