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9: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호 6:1-1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6-17 00:00
조회
1354
호세아 강해 9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호 6:1-11)2018. 6. 17. 프롤로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치실 때, 얼마나 아픈지 느끼지 못했다.
영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지만, 아직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고 있으니까, 회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고, 심령은 찢어질 대로 찢어져 있는데도, 아직 밥 먹을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으니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경우보다 더 답답한 노릇은 없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파멸되지는 않았다.
좀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은 먹고 살만 하고 견딜만하다.
철저한 회개가 있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방치해 놓으신다.
아무리 고통소리와 신음소리가 커도,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참된 회개를 기다리신다.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마음이 현재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세아는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절망적이긴 해도,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는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력하게 초청하고 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한마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희망이 있다.
여기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은, 지역적인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 따로 나 따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주님 때문에 손해 볼 필요야 없지” 하는 생각에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돌이킴이 언제부터인가?
망하고 나서다.
망해도 쫄딱 망하고 나서다.
찢어져도 완전히 찢어지고 나서다.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나서다.
제 힘으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 희망의 불빛이 희미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자기 내면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걸....”

-그때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니 그때라도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사실 염치없는 일이다.
부끄럽고 뻔뻔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나님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찢으실 수 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다고 찢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도로 낫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편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픈 마음으로 때로는 우리를 치시기도 한다.
그러나 싸매어 주시기 전에는 주님의 가슴에 든 멍이 가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망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물며 그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겠는가?
매 맞고 꾸중 들으며 살지 않고, 하나님께 기쁨을 주는 자녀로 살기를 원하신다.

-내가 처해 있는 형편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다.
보면 예수를 너무 고상하게 믿으려 하는 것 같다.
주님이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순수하게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 붙들고 우는 신앙,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매달리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는가?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살리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언제...? 이틀 후에 살리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죄로 인해 파괴된 이 땅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것도 며칠 만에...? 삼일 만에...
하나님은 단 삼일 만에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다.

-자고로 하나님은 살리시는 데는 성격이 급하시다.
살리시는 일이라면 불같다.

-이틀 사흘이 우리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틀 후 사흘”을 “얼마 있지 않아서”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켜 주실 줄 믿는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란 회개를 말한다.
사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회개하는 과정은 더 없이 고통스럽다.
회개하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죄를 쉽게 지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틀 후에 살리신다고 하니까,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망 없는 상태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다.

-누가 찢고.... 누가 치셨는가?
하나님이 찢으시고, 하나님이 치셨다.
누구라도 보고는 살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 동안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과거를 무시할 수는 없다.
과거 따로 현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좋은 과거가 좋은 현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

-그럼 형편없었던 우리의 과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진정 과거에 대해 자유하는가?
여러분의 지난날들은 지금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삶이었는가?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과거 때문에 현재의 삶을 그르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더러운 과거를 묻어둔 채, 현재를 아름답게 수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게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를 청산해야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지는 모르지만, 결코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과거는 청산되어야 한다.

-개인의 과거 청산을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는가?
“회개”라고 한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당장은 편해 보이고, 당장은 무엇인가를 아끼는 것 같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처음에는 세상 편한 것 같다.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나,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죽음이다.

-그런 사람이 꼭 교회 밖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얼마든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돼지 우리에 살면서도,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참 답답할 노릇이다.
말씀을 통해서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수 도리가 없다.
당신이 암이라고 가르쳐줘도, 지금이라도 수술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해줘도, 기어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회개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있다.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구원이다.
설령 사람에게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인 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사람 앞에서는 왕따를 당해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진짜 축복이다.
이 땅에서 사람 앞에서 죽어지내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곧 끝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목적이 있다.
그분 앞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다른 목적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그분 앞에서 사는 것이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렇다.
집안일을 해도 그렇다.
돈버는 일을 해도 그렇다.
길을 걸을 때도 운전을 할 때도 그렇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숨가쁜 초청에 임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안다”는 단어 속에, “인정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을 알고 보니, 그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임하심이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오심을 새벽빛에 비유했다.
밤이 깊어질 때면, 다시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고 영원히 밤만 계속될 것만 같다.
실제로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깜깜하다.
그러나 흑암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고난의 형틀이 우리를 계속하여 묶어 둘 수 없다.
고통의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
새벽 빛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비췰 때, 우리의 고통의 밤은 물러가게 되어 있다.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벽빛같이 임하시기를 원하는가?
우리의 삶에서 고난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싶은가?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고, 그분을 인정하기 바란다.

-둘째는 하나님의 임하심을 늦은 비에 비유했다.
밭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비가 오지 않음에 농부가 절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이른 비에 비해 늦은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다.
농부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적셔주는 시원한 비다.

-하나님은 늦은 비같이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며 부끄럽지 않게 하신다.
타는 목마름으로 고생하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늦은 비같이 임하시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고, 그분을 인정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새벽 빛같이 예고없이 오신다.
그러나 그냥 오지는 않다.
하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의 애태움이 있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애태움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은 늦은 비같이 갑자기 오신다.
그러나 늦은 비가 오기 전의 농부와 땅의 애태움이 있었다.
쩍쩍 갈라지는 땅을 보며, 농부가 얼마나 비를 애타게 기다리겠는가?
땅이 타들어간다는 말보다 농부의 마음이 타들어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되, 이렇게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을 찾되 이렇게 찾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예수를 가벼운 마음으로 믿는 것 같다.
“내가 기어이 하나님을 만나고 말겠다”는, 절박함을 찾아 볼 수 없다.
신앙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광신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겁부터 낸다.
군대 용어로 몸을 사린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손해라도 좀 볼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믿으면, 백날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당시에도 많았다.
노아 시대에도 많았고, 모세 시대에도 많았고, 엘리야 시대에도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시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했다.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도 구원받지 못했다.

-이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을 보시면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하나님의 탄식이다.
“도대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이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배여 있다.
만약 하나님이 보통 사람 같으면, 화병이 나서 죽어도 진즉 죽었을 것이다.
속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 몇 번째인가?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들의 다짐은 아침의 구름 같았고, 쉬 없어지는 이슬 같았다.
가뭄이 심할 때, 아침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으면, 사람들은 소망을 가진다.
그러나 해가 뜨자 구름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
기대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셨는데, 그냥 그 말로 끝이다.
통성으로 막 소리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오, 이번에는 틀림 없구나” 했는데, 그것으로 끝이다.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그대로이다.

-보시다 못한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가? 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먼저는 선지자를 보내어 친다.
하나님의 대변자인 종들을 보내어 말로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런데도 미적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심판이 빛처럼 나온다고 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갑자기 임한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날 급작스럽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하나님의 심판이 멀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홀연히 임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경쟁사회에서 양보하면 늘 손해 볼뿐더러 살아남기도 어렵다는 것도 잘 아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서 “아하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구나” 하면, 성경을 잘못 본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일 제사가 정상적으로 드려졌다면, 6절 말씀은 굳이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이용해 먹었다.
설사 죄를 짓는다 해도, 제사 드리면 그만이니까, 맘 놓고 죄를 지었다.
제사 따로 생활 따로였던 것이다.

-예배와 생활이 분리된 이중적인 삶이었다.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교회에 와서는 “주여! 주여!” 하는 것이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없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이건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드리는 종교놀음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애가 동반되어야 한다.
예배자의 생활 속에서, 인애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애와 예배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분명히 다르다.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인애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이것의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 이전에 하나님을 알아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것이다.
일순간이 아닌 지속적으로 말이다.

-어떤 일을 한 두 번 하는 것은 쉽다.
한 두 번은 용서할 수 있다.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다.
한 두 번은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한 두 번은 몰라도 꾸준하기는 어렵다.
이 일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데, 저 일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작은 돈에서는 십일조를 떼는데, 큰돈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어떤 자리에서든지 지속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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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되는가?

-먼저 개인이 하나님의 언약의 소중함을 모른다.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이 어디 보통 언약인가?
영원한 생명이 걸린 언약이다.
영생을 약속한 말씀을 그는 너무 가볍게 여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언약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불평등 조약이 아니다.
누가 봐도 아담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했다.
파기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명백히 알았음에도 언약을 어기고 말았다.

-여기서 “어기다”는 말은 ‘경계를 함부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경계”를 지정해 놓으셨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답답해 보임으로 경계를 맘대로 넘나든다.
말씀에 전적으로 불순종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만 지킨다.
자기 기호에 따라 말씀을 골라잡는다.

-더 나아가 경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혼동을 초래케 한다.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망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그러면 금방 표가 난다.
쉽게 눈에 띄게 된다.
확연히 죄인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만연된 죄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만연되어서 죄를 죄로 느끼지 못했다.
요즘 우리 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음은 신앙 공동체의 오염이다. 6: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길르앗은 도피성이 있는 곳이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도피성 세 개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살인한 자의 생명을 지켜주시기 위해 피할 성을 주셨다.
하나님의 큰 배려이다.

-그런데 이 마을이 지금 어떻게 불리는가?
피 발자취가 편만한 행악자의 고을이라고 불린다.
더 이상 은혜의 성이 아닌 악인의 성이 되었다.
자기들은 암만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이 악인의 성이라고 평가한다.
“그 정도 죄를 가지고 그러느냐? 다른 성은 더 그렇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길르앗은 도피성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성보다 도피성은 달라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바된 교회인 우리에게 특별한 삶을 요구하신다.
세상을 이기는 탁월한 삶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이 모인 신앙공동체 안에, 거룩함과 자비로움이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그 다음은 지도자의 타락이다. 6: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지도자를 특별히 눈 여겨 보신다.
지도자가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당시 백성의 죄가 만연하여 느끼지 못했다면, 지도자의 죄는 워낙 교활하여 발견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기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다.
정치적 싸움에서 밀린 사람들은 보복을 피해 도피성으로 피했다.

-그런데 거기에 피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하나 둘 죽었다.
알고 보니 제사장들이 살인을 한 것이다.
백성들은 왜 죽는지 알턱이 없다.
설마 제사장이 살인할 것이라고는 꿈엔들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교활한 죄상을 주목하고 계셨다.

-제사장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며 중보기도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편은 못들망정, 힘께나 쓴다는 자들과 짜고 살인을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종교 지도자가 타락하면 여간 문제가 아니다.
교회 지도자가 사람 차별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게 된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 더 나아가 노회 총회 지도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전에서의 죄다.6: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집이 어딘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이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는 음란한 의식을 그대로 배워와, 이제는 성전에서도 그 못된 짓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서, 특별히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죄라고까지 여기지 않았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합리화했다.

-이런 꼴을 지켜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히셨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 시간 찬찬히 헤아려 보기 바란다.

-11절 말씀으로 설교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6: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부터 먼저 추수하겠지만, 유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부터 심판하겠지만, 유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크게 나을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조아려야 한다.

-또한 유다는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때, 함께 아파하기는커녕 입방아를 찧었다.
“그따위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 역시 남이 잘못된 것을 보고 박수치면 안 된다.
말이라도 위로는 못해줄망정, 욥의 세 친구처럼 행하지 않아야 한다.
다친 상처에 약은 발라 주지 못할 바에,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남의 고통과 아픔을 마치 내가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흐느끼는 중보기도자가 돼야 한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