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7:예배와 삶은 직결됩니다(호 5:1-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6-04 00:00
조회
984
호세아 강해 7예배와 삶은 직결됩니다(호 5:1-7)2018. 6. 3. 프롤로그

-개인이 우발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 사실을 시인하고 죄에서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집단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 집단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뻔히 죄인줄 알면서도, 그 범죄 조직이 무너질 때까지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세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삶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돌이킬 수 없었다.
죄가 이미 구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옆에 있는 애의 돈을 뺏는 것과, 몇 명이 함께 뺏는 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나 혼자 한 짓은 물어주면 되지만, 몇 명이 함께 한 짓은 그 집단이 깨져야 해결된다.
혼자 한 행동은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다.
“한 번쯤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동정을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악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조직 폭력, 집단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개인이 잘못에 빠졌을 때는 돌아오기 쉽다.
그러나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나 집단이 죄를 짓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일어나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조직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몸담은 집단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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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호출을 하셨다.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누가 먼저 호출을 받았는가?
제사장들이다.
다음은 이스라엘 족속들이고, 그 다음은 왕족들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족속들은 백성 전체라기보다 백성을 대표하는 족장들로 보인다.
이 세 부류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다.
하나님의 느닷없는 호출에, 그들은 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바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일까’
조금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놓고 심판을 선고하신다.
“백성들을 위해 참 수고한다”는 말이 아닌, 다짜고짜 “너희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신다.
그들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이으셨다.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미스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다볼 위에서 무슨 그물을 친다는 말인가?
아마 일반 백성들은 알지 못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실마리가 나온다. 5:2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그들은 거기서 무서운 살육죄를 저질렀다.
어쩌다 한 번 그런 게 아니고 살육죄에 깊이 빠졌다.

-미스바가 어떤 곳인가?
신앙부흥이 일어난 장소 아닌가?
그런데 그곳에서 처참한 살육이 일어났다.
한 때는 사무엘을 통해,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각성하고 주께로 돌아왔던 바로 그 곳에서,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다볼은 어떤 장소인가?
여사사인 드보라가 일어나서,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철병거를 부수고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을 흔든 곳이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은 장소이다.
다볼 역시 신앙 부흥이 일어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살육이 자행되었다.

-악의 세력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늘 깨어 있으라고 한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죄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정의다” “우리가 진리다” 라고 외친다.
기독교 비슷한 사교도 많고, 이단 사이비도 많다.
하나같이 예수를 앞세우지만, 하나같이 자기 잇속 챙기는 집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결국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후손들이, 지금은 관광이란 이름으로 예수를 팔아 관광수입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란 미국의 소설가가 생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10달러란 당시 돈으로는 어마어마한 돈을 뱃삯으로 요구했다.
그렇게 높은 값을 부르는 것을 보고, 마크 트웨인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이제야 알겠다. 예수님이 왜 갈릴리 바다를 걸어가려고 하셨는지.”

-사탄의 주특기는 속임수이다.
어떻게든 택한 백성이라도 속여서, 자기의 수하에 넣으려고 한다.
초청한다고 해서, 아무 곳이나 따라 가서는 안 된다.
동행하자고 해도, 무조건 가서는 안 된다.
사탄의 집요함은, 누구도 말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이유 없이 막으실 때가 있다.
미스바라고 무작정 믿고, 다볼이라고 의심없이 따라가면 큰 일 난다.

-목회자한테 비밀로 하자고 하면서, 은혜 받으러 가자고 하면 일단 경계해야 한다.
그가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 같아도, 공동체에서 누구하면 인정해 주는 사람일지라도 그렇다.
악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철저히 위장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려든 자를, 절대로 곱게 내보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가?
“오른쪽 눈이 범죄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두 눈을 뜨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쪽 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
이게 보통 결심인가?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도가 무엇인가?
네가 속해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것 아닌가?
자기 재산이나 가족이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 아닌가?

-우리 시대는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재산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고, 직장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공무원 시험보는 데 무슨 제약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교사 임용에 결격사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쯤은 영생을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하다.

-구원 얻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욕심이 많다.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이 땅에서 다 누리면서, 영원한 천국까지 가려고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수가 있겠는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사람이, 그냥 쉽게 갈 수 있을 만큼 하나님 나라가 만만하지 않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결코 넓지 않다.
좁은길 좁은문이다.

-집착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더 가지려고 하면 평화가 없다.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면, 악의 세력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다. 5: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은 알되 낱낱이 알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은밀한 죄를 감찰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련할 정도로 자기 죄에 대해 무디다.
죄를 지어놓고도, 그걸 죄로 여기기보다 문제 정도로 가볍게 여기려고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것은 종교의 책임이 크다.
특히 개인의 죄에만 관심 있고, 집단의 구조적인 죄에 무관심했던, 기독교에 그 책임이 크다.
어떻게든 전도 많이 해서 교회 성장시키려고 했지,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했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교회는 성장했으나,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 못했다.
교회 건물은 웅장해졌지만, 주님의 모습은 더 초라해지고 말았다.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예배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삶과 예배가 분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4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행위가 더러우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
체면 때문에, 직분 때문에 교회에는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돌아온 척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위선만 쌓여갈 뿐이다.
매만 벌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하나님이 자리할 곳이 없다.
음란이 죄가 되지 않는 사회였던 것이다.
음란이 합리화되어 버린 사회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에 대해 얼마나 관대했던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식이었다.

-“음란한 마음”은 가나안의 사상이다.
음란한 마음이 종교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풍년을 위해서 음행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되었다.
그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누가 좋아서 이 짓을 하는 줄 알아요? 다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예요.”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다.

-사실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직장에서 쫓겨나면 누가 먹여 주는가?
또 처자식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는 그럴 듯한 논리이다.
문제는 그걸 성경이 동의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걸 용납해 주지 않는 데 어떻게 하는가?
이것을 인정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우리는 말할 자격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만도 못 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욕구가 성욕이다.
그러나 인간이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때는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진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가장 먼저 허물어지는 부분이 바로 성문제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문명을 가장 싫어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음란한 문화 때문이었다.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은, 음란한 생각이 아예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음란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음란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음란한 생각이 나를 다스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음란한 생각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음란한 문화는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온갖 매체를 통하여,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우리 곁에 와있다.
그리고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심각하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목욕만 자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옷을 자주 갈아입어야 한다.
옷만 자주 빤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방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청소를 부지런히 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창문을 닫고 먼지발생량을 줄여야 한다.

-문화가 이렇게 중요하다.
외부 환경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서, 이것 저것 핑계를 댔다. 5:5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네가 감추려고 해도 네 얼굴에 다 써 있다”는 뜻이다.
남의 말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회개할 마음도 없으면서,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한다.
그럼 주님이 뭐라 하겠는가?
“야 야, 네 얼굴에 다 써 있다.”

-하나님은 유다만이라도 바로 서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유다도 이스라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유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했다.
유다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겨,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이 복을 받는 것을, 열방에 보여줘야만 했다.

-심판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해야 하는 하나님의 속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을 선고하고, 유다에게 멸망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 후련할 수 있겠는가?
자녀의 잘못을 책망하고 혹 매를 때리고 나서, 속 후련해 하는 부모가 있는가?
‘아이고 그 때 몇 대 더 때렸어야 하는데 아쉽네...’ 하고 후회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이 미워서 징계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 사랑의 채찍은 들 수 있지만, 아주 버리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 5:6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갔다는 말이다.
문제는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용서이다.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리 좋은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선언이다.

-그들이 왜 용서를 받지 못하는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고의적인 죄 때문이었다.
실수나 우연이 아닌,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분명히 죄인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주님이 탄식하신다.
성령님이 근심하며 아파하신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짓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죄를 합리화하면서 그 죄를 즐기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게 힘들어진다.

-여기 한 예가 있다. 5: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하나님은 시한을 정하셨다.
“새 달”이다.
새 달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새 달이란 매월 초하루를 가리킨다.
또는 월삭이다.
그들은 초하루 또는 월삭에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드렸다.
그런데 그 새 달이 심판을 가져온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배를 뺀다고 생각해 보라.
“너는 예수를 믿되 예배는 드리지 말아라” 하면 가능하겠는가?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가?
아무나 올 수 없는 예배의 자리가 아닌가?
또한 나 혼자가 덩그러니 예배하지 않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보통 은혜인가?

-그런데 이 주일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
주일 예배를 경홀히 여기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정말 우리는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배 못지않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예배자의 삶이다.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않고, 사생자를 낳으면 예배가 안 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켜야 할 순수함이 있다.
이걸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했다.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라고 하는 은총의 방편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회개의 눈물은 축복의 눈물이다.

-한 번 넘어진 것으로 인해 절망하면 안 된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와 타협했던 순간이 떠오를 때, 낙망하면 안 된다.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
주님이 내미신 피 묻은 손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 걸으라.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께 돌아오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