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4 :하나님 사랑이 본질입니다(호 3:1-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4-22 00:00
조회
1231
호세아 강해 4 하나님 사랑이 본질입니다(호 3:1-5)2018. 4. 22. 프롤로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지금 가나안 생활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입시를 앞둔 젊은이가 이성간의 사랑에 빠져 책을 손에서 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 찬밥 신세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긴 결말이 어떻게 될 줄,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건포도 과자에 있었다.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리는 풍요한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건포도 과자다.
건포도 과자는 가난할 때는 엄두도 못내는 것이다.
건포도 과자는 특별한 축복을 상징한다.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처음에는 맛있었지만 자꾸 먹으니까 질렸다.
맛이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 곡식도 있고 포도가 있는 거였다.
건포도를 넣어 만든 건포도 과자는 그 맛이 일품이었고, 누구나 그것을 한 번 먹으면, 그 맛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에게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굳게굳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까, 완전히 딴 세상인 거였다.
자기네들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단 말이다.
즐길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신앙이 무너지고 말았다.

-신앙을 세우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신앙이 허물어지는 건 금방이다.
신앙이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신앙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신앙을 채우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신앙이 바닥나는 건 한순간이다.

-신앙관리 잘해야 한다.
은혜 관리를 잘해야 한다.
과거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
어제 은혜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늘 은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해했다.
그러나 그곳에 계속 살다보니, 하나님을 서서히 잊어갔다.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부였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다른 민족의 침입 문제 등등 ...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하나님이 계시든지 안계시든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씨 뿌리면 싹이 났다.
때 되면 비가 왔다.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맺혔다.
그것들이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신앙이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나님은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절박하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끔씩 우리 생존 터전을 흔드실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줄 안다.
자기가 뭘 잘해서 잘 되는 줄 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공로 내세운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 생존의 터전을 살짝 흔드시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찾는다.
깨어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정상적으로 노력하고 활동해서 얻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가나안 땅이 주는 것이라고 봤다.
가나안 신이 베푸는 것이라고 여겼다.
가나안 신을 잘 섬기면, 내일도 어김없이 건포도 과자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만나로 사는 세상이 아니다.
만나로 사는 세상 같으면, 매일 성경이나 읽고 기도나 하면 된다.
그렇게 살면 굶어죽는다.
열심을 다해 땀 흘려야 살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 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셔서 가나안 땅 같은 곳에는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그들과 함께 계셨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이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을 향하여 길을 가다가,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그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날 밤 꿈을 꾸고 나서, 그가 고백한 말을 기억하는가? 창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자기와 가족들이 살던 그곳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광야에도 계시더란 것이다.
그때부터 야곱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혼자 황량한 광야 길을 걸어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셨던 것이다.
혼자 빈 들판을 지나온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셨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야곱의 발걸음이 예전과 같을 수가 없다.
광야 길은 예전과 똑같다.
환경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야곱은 달라졌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렇다.
광야와 같은 환경이다.
거친 빈들과 같은 환경의 연속이다.
예수를 믿어도 그 환경이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눈에 띄는 변화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자신이 달라졌다.
변한 게 있다면 우리 자신이 변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환경을 보게 된 것이다.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것만 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것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곤 하신다.
씨를 심어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눈물을 심어 기쁨을 거두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이라고 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손한 태도다.
우리 소득의 모든 것은 임마누엘의 결과다.
우리 수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 세상의 어떤 풍요로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가난할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요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잘 풀릴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안 풀릴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원리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게임법칙에 따라서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이 주신 만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으로 많이 가지려고 하면, 결국 고멜처럼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만다.

-주님이 뭐라 하셨는가? 막4: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욕심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결실이다.
말씀의 결실이 없이는, 풍성한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결실에 따른 풍성한 삶을 이루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할지라도”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오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든 말든, 건포도 과자를 즐기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덮어놓고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따라가거나, 이 세상의 것들을 다른 신이 준 것으로 여기면서 좋아하는 자들을, 절대로 그냥두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도 좋고, 건포도 과자를 즐겨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며 따라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사정없이 징계하셨다.
그들은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대적들에게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현장에 하나님이 계셨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다.
포로 생활하는 내내 그들 곁에서 그들과 동행하셨다.
단지 그들이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불러들일 때는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불러들인 후에는 조건적이다.
불러냄을 받았으면, 그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출애굽을 한 것도, 홍해를 건넌 것도, 조건 없이 이뤄졌다.
그러나 시내산에서의 계약은 분명히 조건적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제 2계명을 보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분명히 조건적이다.

-제 5계명을 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명백하게 조건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가도, 할아버지가 손자 대하듯이 “허허 오냐, 내 새끼” 하거나, 건포도 과자를 입에 물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도, 할머니가 손녀를 대하듯 “그래, 많이 먹고 건강하게 자라만 다오”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성품을 이용하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가 약속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갈 때, 채찍질하시는 분이다.

-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실 때 무조건적이었다.
그러나 불러내신 후에는 조건적이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성령님을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계속하여, 자기 안에 있는 황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할 때, 우리가 어렵게 모은 것이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다.

-우리가 고멜같이 비참한 모습으로,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지 않겠는가?
탕자같이 허름한 모습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올 수는 정말 없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출해서 음녀가 된 고멜을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너는 또 가서” 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뉘앙스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고멜은 원래 그런 여자였다.
호세아는 고멜이 그런 여자인줄 알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그런데 고멜은 결혼하고도, 과거의 더러운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한 남자의 가슴만으로는, 그녀의 텅빈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사람에게 구속당하는 것이, 너무나 숨이 막혔던 모양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살다보니 궁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남자에게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
음행하는 대가로 다른 남자로부터 선물을 한 움큼씩 받았다.
그 선물이 좋았다.
가끔씩 방문하던 남자가, 어느 날 자기를 따라오면 더 큰 선물을 주겠다고 꼬드겼다.
그 말에 고멜은 아예 짐을 싸들고 따라 나섰다.
가출을 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남자는 고멜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놀이개감으로 적당히 이용해 먹고, 술만 먹으면 두들겨 패고 하더니, 급기야는 노예 시장에 내놓았다.

-호세아는 아내를 찾아 나섰다.
그동안 많은 곳을 찾아 다녔다.
갖은 고생을 하고, 온갖 수소문을 해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맘으로 노예시장에까지 들렀다.
그런데 노예를 사려고 몰려든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듣자니, 오늘 나오는 여자 노예 중에 꽤 쓸만한 물건이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들은 호세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경매되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고 한다.
노동력 외에 부가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노예부터 흥정이 끝나고, 노예상은 여자 노예를 경매에 붙였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특히 물건이 좋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 노예들이 입장을 하는데, 그 사이에 고멜이 보인다.

-호세아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노예상은 호세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신나게 흥정을 벌였다.

-드디어 고멜 차례가 되었다.
은 10세겔에서부터 20세겔, 23세겔, 25세겔, 27세겔까지 올라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27세겔은 굉장한 액수이다.
노예상은 더 큰 소리로 “27세겔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그럼 27세겔에 낙찰...”
그때 저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손을 들며 외쳤다.
“30세겔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호세아였다.

-보리 한 호멜 반이면 은 15세겔이니까 도합 은 30세겔이다.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이미 남에게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용서하고 다시 부부로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는데, 돈까지 지불해야 했다.

-몰라볼 정도로 몰골은 망가졌고 얼굴은 형편없었다.
가난과 비참한 생활에 찌들대로 찌들은 모습이었다.
밉기도 했지만 차라리 연민의 정이 갔다.
얼른 그 자리에게 벗어나기 위해, 호세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되 자기를 위하여 샀다.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고멜을 사서 다른 데에 팔아서 이문을 남기려고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샀다.
고멜은 다시 호세아의 사람이 되었다.
고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 호세아의 일방적인 호의를 받은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이 바로 그런 뜻이다.
구속은 원래 경제 용어이다.
노예된 사람의 몸값을 주고 사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 때 쓰는 말이다.

-죄에 팔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셨다.
경매에 넘어가는 물건을 잡듯 헐값에 산 것이 아니고, 아주 비싼 값을 치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 값이다.
죄인의 목숨도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어떻게 값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그 값을 “예수님 짜리”라고 했다.
원래 우리는 싸구려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짜리로 값비싼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짜리로 살아야 한다.

-호세아는 고개를 떨구며 걷고 있는 고멜에게, 이렇게 말한다. 3: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가 지금 고멜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는가?
호세아의 말이 고멜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나도 당신에게 좋은 남편되도록 노력할테니, 당신도 이젠 나와만 지내고, 음행을 끊고 다른 남자 따르지 말아라.’
호세아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다.
이 요구를 고멜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부부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 통치는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일치해야 한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 사실 여부가 가려진다.
복음을 믿는다면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은 구세주로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믿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로도 믿어야 하지만, 더 나아가 내 삶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삶을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종교적인 영역에 제한된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다스리는 분이다.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 분이 내 삶을 간섭하시는 것은 싫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다. 3: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지내게 하셨다.
왕도 장관도 제사도 없었다.
모두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나안 신의 영향을 받은 주상과 에봇과 드라빔같은 점치는 기구들도 없다.
그런데 노예가 되어 낯선 땅에 끌려와 살아 보니, 이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좋은 왕만 만나면 잘 살줄 알았다.
하나님보다 바알을 더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가끔씩 제사상만 잘 차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아무리 풍족해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우리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바쁠 때가 있다.
자칫 본질을 잃기 쉽다.
너무 정신없이 뛰다보면 목적을 잃기 쉽다.
교회의 이러저러한 사역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앙의 전부인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번이다.
하나님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3: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 후에”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후에’라는 말이다.
“마지막 날”이란 ‘하나님의 정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에 가나안에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때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가가게 된다는 소망의 말씀이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이지만 회복될 그날을 꿈꾸시는 하나님이시다.

-혹시 사는 게 복잡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수선하지는 않는가?
혹시 사는 게 분주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후순위에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하라.
밥은 건너뛰어도 말씀과 기도는 건너뛰지 말라.
건포도 과자와 하나님의 은총을 바꿔먹는 실수를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