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3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호 2:14-2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4-15 00:00
조회
1105
호세아 강해 3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호 2:14-23)2018. 4. 15. 프롤로그

-우리가 확신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무조건 확신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확신의 내용이다.
확신해야 할 것에는 미심쩍어 하고,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은 것은 확신하는, 다소 엉뚱한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확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여러 번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기 전까지는, 실제로 하나님의 경고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미련했던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빼앗기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 안에서도 발견된다.

-호세아가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부정한 아내 고멜을, 아무도 없는 거친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타이르고 있다.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다른 것의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만나 타이르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돌아오면 가만 두지 않겠어!” 하며 공갈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찢긴 가슴을 보구려. 당신을 생각하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단 말이요” 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누리고 있던 가나안의 모든 혜택을 다 잃어버리고, 다른 나라의 포로 상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들은 갈 때까지 갔다.
자기들 나름대로 마음속에 확신이 있고 믿는 바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어버리고 갈 때까지 다 간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며,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친 들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이다.
우리는 거친 들이 아니면, 신앙 훈련이 잘 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방법이 있으면, 바로 바알의 종교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친 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에서 바알의 정욕적인 거짓 신앙이 씻기는 데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자랑하거나 의지할 것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까지, 그들은 들판에 버려진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이 들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던 바벨론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까지 찾아 오셔서 위로하신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뒤에야,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했다.
사실 회당이 그때 처음 만들어졌다.
회당이 뭐하는 곳인가?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다.
그들은 그 때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준다”는 것은, 더
鵑?장소적인 이동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가나안 땅이 되게 해주실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는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자 가나안 땅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리고, 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가나안 땅이란 걸 믿으라.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거기서’ 가나안의 모든 풍성한 삶을 주시고. ‘거기서’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러 더 좋은 포도원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포도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포도원이다.

-포도나무는 가나안 땅에서 가장 귀한 나무이다.
옛부터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며, 포도원을 주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 기쁨이 넘치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꿈교회라는 포도원을 주셨다.
우리는 한꿈교회라는 포도원을, 기쁨이 있는 교회로, 즐거움이 넘치는 교회로 가꾸어 가야 한다.
교회에는 웃음이 있어야 한다.
거룩한 웃음이 있어야 한다.
행복한 웃음이 있어야 한다.

-거룩한 웃음은 주어지지 않는다.
가꾸어야 한다.

-행복한 웃음도 마찬가지다.
부단히 가꾸어야 한다.

-스바냐는 자기 백성을 보시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자기 백성을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으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줄 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포도원을 주셨는데 그게 무엇인가? 시128: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우리의 가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포도원인 가정을, 정성을 다해 가꾸기 바란다.
성심을 다해 일구기 바란다.
기쁨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란다.
축복의 열매가 탐스럽게 맺히기를 소망한다.
행복의 열매가 소담스럽게 맺히기를 축원한다.

-15절 앞부분.호2:15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이 생기게 하겠다고 하신다.
“아골”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아골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좌절했던 곳이다.
아골 골짜기는 본래 범죄의 골짜기요 타락의 골짜기요 심판의 골짜기였다.

-아골 골짜기의 주인공 아간을 알지 않는가?수 7: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그런데 이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이 열리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절망의 골짜기에 희망의 꽃 한송이를 피우시겠다는 것이다.
저주의 골짜기에 축복의 꽃 내음이 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정죄와 심판의 골짜기에, 하늘 문이 열리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제 아골 골짜기는 더 이상 절망의 골짜기가 아닌 희망의 골짜기가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을 광야라고 할 수 있다.
어려움이 끊어질 날이 없다.
어떤 때는 일상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홀로 아골 골짜기에 버려진 듯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주여” 소리가 절로 나오는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주저앉아 “나는 ‘아골 팔자’ 인가 보다” 하며, 팔자타령이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들이 닥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샘물이 흘러넘칠 것을 말씀하신다.
아골 팔자에서 희망의 팔자로 바꿔주시겠다고 하신다.

-아골 골짜기는 십자가의 그림자다.
십자가 위에서는 일체의 희망을 버려야 한다.
십자가는 절망 그 자체다.
아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십자가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바로 이 십자가가 희망의 문을 열었다.
참된 희망의 열매는 십자가에서 열린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열린다.

-그 무언가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해, 허무와 고독에 시달리고 있는가?
내 손에 있던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나를 떠나가고 있는가?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희망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가?
여러분의 상황이 어둡고 힘들기만 해서, 가슴은 답답하고 입에선 넋두리와 푸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는가?
아예 자신의 팔자를 아골 팔자로, 자신의 운명을 아골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힘들고 고달픈 상황에서 조용기 목사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탄식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그렇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결코 절망은 없다.
우리에게 혹 침체는 있을 수 있지만, 절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져야 할 아골 팔자를 희망 팔자로 바꿔주신 주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우리가 당해야 할 율법의 저주를 영생의 축복으로 바꿔주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15절 뒷부분.호2:15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기서 “어렸을 때”란 젊었을 때를 가리킨다.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이란, 출애굽 당시 즉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던 첫사랑의 순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 주시던, 그 격렬한 사랑의 순간을 말한다.

-15절 뒷부분 말씀을 달리 표현해 보면, “우리 다시 한 번 예전의 그 사랑에 빠지자. 사랑의 열기에 흥분되어 잠을 못 이루던 그 사랑의 첫 순간으로 돌아가자. 우리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

-16절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바알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실제로 그들은 바알과 여호와를 구별하지 못했다.
만약 어떤 여자가 잠꼬대를 하면서, 다른 남자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면, 남편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다가 급하면 바알을 불렀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든 것이 바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스라엘 입에서 바알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는 분명히 여호와 신앙을 믿는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바알이라는 정부(情夫)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란 남편보다 바알이란 정부를 더 생각했다.
정부(情夫)와 남편의 차이가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정부가 더 잘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정부는 여자를 이용하는 자다.
여자도 정부에게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는 책임이 없는 사이요, 진실한 사이가 아니다.
단지 욕망에 따라 결합한 사이일 뿐이다.
욕망이 식으면 헤어질 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실한 부부관계처럼 헌신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신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하는 관계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결혼 관계처럼 신실해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자기의 정욕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상을 바꿀 수 있으며, 자기 필요에 따라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해도 당장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는 그런 자기들의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내 신앙이 단지 나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이용해 먹는 관계는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한 신앙 역사를, 굳이 우리 앞에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자신의 신앙이 분명히 잘못되었으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망하기 전에는 결코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 주고자 함이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만 받아내려는 거짓되고 이기적인 신앙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한 역사를 통해 헌신하지 않는 이기적인 신앙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17절의 말씀처럼 되기를 소원한다. 2: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이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다.
이게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향한 간절한 기대다.
입에서 다른 남자 이름이 제하여 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깨끗이 잊어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인 부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원하신다.
마찬가지다.
세상과의 이중 살림을 청산하고, 그분과의 첫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이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2: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옛날부터 들짐승이나 새들에게 가장 심한 피해를 주는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만 일어나면 숲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들짐승이나 새들과 언약하여, 다시는 그들의 거처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전쟁 대신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안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평안을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급기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2: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전부터 부부였으나 깨진 관계였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다.
19,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가 들겠다’는 말을 세 번씩이나 하신다.
이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가든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결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실패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버림받았던 아픈 과거를 깨끗이 없애주시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맞이하여 재결합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19절 상반부 “영원히 살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다.
우리가 한번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면,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변덕부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언약은 “영원히” 이다.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히 여김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성품들을 결혼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원래 우리의 성품은 악하고 고약하다.
남이 나보다 잘되면 배 아파하는 못된 근성들을 가지고 있다.
내 것보다는 남의 것을 탐내는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이 있다.
그런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히 여김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성품이 우리 안에서 나올 때, 우리더러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아는 척, 말씀을 가까이 하는 척, 기도를 많이 하는 척, 신앙이 좋은 척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관계로 당신을 아는 것을 싫어하신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그분은 진실함으로 장가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진실한 관계인가?
여러분의 진실함을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가?

-새로 맺는 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가? 2: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아무리 울부짖어도 응답이 없었다.
하늘도 반응이 없었고 땅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곡식이나 포도나무나 감람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고, 이스르엘 평지는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날이 언제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날이다.
부르짖음보다 더 우선은 관계이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더 우선이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과의 관계회복을 원하신다.
관계회복만 되면, 하늘에도 땅에도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도 응하게 된다.
이 말은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다시 기도하기 바란다.
아골 골짜기 같은 상황이라면, 더 더욱 기도하기 바란다.
소망의 문이 열릴 때까지,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말기 바란다.
한 동안 느슨해진 기도의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바란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라는 사실을 꼭 잊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의 채찍을 드실 때가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기 바란다.

-우리에게 향하신 계획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2: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이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어떻게 호칭할지 생각해 봤는가?
그날에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무슨 고백을 하겠는가?“주는 내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