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 송년주일: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눅 2:8~1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2-12-25 12:03
조회
246


성탄절(2022)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눅 2:8~14)
2022. 12. 25. 주일


프롤로그

-우리가 사람을 찾아갈 때, 세 가지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

-첫째는 내 마음이 허락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가장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까운 거리도 갈 수 없다.
↳마음이 움직이기만 하면 아무리 먼 거리도 갈 수 있다.
↳결국 가고 못 가고는 거리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이다.

-둘째는 내 환경이 허락 되어야 한다.
↳북이 고향인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아무리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존해 있어도 맘대로 가지 못한다.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어도 도저히 환경이 허락되지 않으면 못가는 것이다.

-셋째는 상대방이 허락해야 한다.
↳사람 중에는 아무 때나 찾아가도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내가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도, 상대방이 오는 것을 굳이 싫어하면 갈 수 없다.
↳나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만 가능하다고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허락해야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탄하신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데는 ...
↳먼저는 내 마음이 허락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내 마음은 없었는데 온 분들이 있는가?
↳아니면 실수로 마음을 빼놓고 온 분들이 있는가?

↳다음은 내 환경이 허락 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교회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가정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건강의 환경이 허락되었고 ....

↳더 나아가 상대방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는 거 아닌가?
↳찾아온 우리를 허락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환영하심을 믿으라.
↳돌아온 우리를 환영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심을 믿으라.

-그런데 이거 아는가?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때, 아니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
↳성탄절이 바로 그 날이다.

-성탄절은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다.
↳성탄절은 세상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날이다.
↳성탄절은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이다.

-성탄절예배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바란다.
↳송년주일예배를 통해,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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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올 수 없는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 땅은 찾아올만한 곳이 못되었다.
↳온갖 죄와 허물로 오염되어 있는 세상이었다.
↳불의와 불법과 불공평이 난무한 곳이었다.
↳너무나 타락하여 하나님의 눈에 볼썽사나운 곳이었다.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그렇게도 애원해서, 막상 보내주었더니, 환영하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오는 것과 같다.
↳어쩌면 그 보다 더 낮고 천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 역시 낮아져야 한다.

-베들레헴에 예수탄생 기념교회가 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코스인데, 그 교회를 유명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 출입문이다.
↳출입문이 얼마나 작은 지, 한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다.
↳황제조차 말에서 내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는 자세가 맞는가 싶은 사람들이 있다.
↳예배 시간, 예배 복장, 예배 헌금 등 다각도로 돌아보아야겠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이 세상은 ...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망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예수님이 없는 이 땅에서...
↳조그만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작은 소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땅은 예수님이 필요치 않다.
↳우리가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예수님 외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가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도 가정이 희망이라고 한다.
↳그럼 가정이 진짜 희망을 주는가?
↳그런데 왜 가정 안에서 받는 상처가 그리도 많은가?
↳가족 간의 문제로 겪는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큰가?
↳지상낙원이어야 할 가정이,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곳이야 말 다했다.

-예수님이 없는 이 땅은 희망이 없다.
↳예수님이 없는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 같은 것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롬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참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우리의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때부터 불행이 찾아왔다.
↳불행 중에서도 최고의 불행은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더구나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심판 이후에는 형벌이 따른다.
↳영원한 형벌 곧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럼 행복해지는 비결이 뭔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지지 않고는, 절대로 불행의 짐, 불행의 굴레, 불행의 운명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땅에서 불행하게 살다가, 영원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 불행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손 삼사 대까지 꼼짝없이 저주를 받게 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복음이 여기 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화목제물로 오신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죄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다.
↳영적인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이다.
↳정신적인 고통에서 자유케 해주신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찾아오신 주님을 반기지 않았다.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게 문제이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자기 백성에게 찾아왔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다는 아니었다.
↳그 중에 일부 영접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이미 이 약속을 이룬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받았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히13:5...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씀의 약속대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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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찾아올 가치가 없는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찾아오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깬 사람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보기 좋게 어긴 불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첫 작품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창조주를 실망시킨 첫 번째 사람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한 거짓말쟁이였다.
↳그는 범죄한 것에 대해 회개하기보다, 하나님이 준 와이프 때문이라고 핑계된 남자답지 못한 비겁자였다.

-그런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찾아오셔서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다.
↳죄 없는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그들의 벗은 수치를 가려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의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배신자이다.
↳수제자로서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 실패자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시몬에서 베드로란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반석처럼 굳건하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말앗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수제자로서 실패했던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오셨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실망과 낙담에 빠진 채, 갈릴리 호수에 와서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재차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한 후, 다시 쓰시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갈길 잃은 양인 우리를 찾아오셨다.
↳인생길에 지쳐 쓰러져 있는 우리였다.
↳무거운 짐을 홀로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진 우리였다.
↳이 땅의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우리였다.
↳지옥을 향하여 급행열차를 타고 달려가는 우리였다.

-하나님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우리였다.
↳인생의 목적도 목표도 분명하지 않은 우리였다.
↳꿈도 비전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우리였다.
↳참된 나를 숨기고 거짓된 나를 내세우고 살아가던 우리였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쏟으며 살아가는 우리였다.

-한 마디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였다.
↳예수님이 찾아올 만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영원한 지옥 불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였다는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찾아오셨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를 책망하고 훈방조치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바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게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이지만,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에서는 기쁜 일이 아니다.
↳아들을 세상에 왕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다.
↳독생자를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할 통치자로 보내신 것이 아니다.
↳죽는 자리에 보내신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으라고 보내신 것이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류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으라고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입장에서는 성탄절이 고통스러운 날이다.
↳우리에게는 더 없이 큰 은혜이지만, 하나님께는 대가지불인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의 원작자인 C. S 루이스가 종교 토론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는 토론이 있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토론이 끝나지 않았다.
↳부활이 있고, 성육신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부활과 성육신 비슷한 개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C. S 루이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기독교의 독특함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타종교에는 없고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은혜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종교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크고 작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죄에 따른 율법의 저주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순종의 대가를 예수님이 지불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다.
↳그런데 자기 아들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걸 은혜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박종호 10집에 실린 <하나님의 은혜>란 찬양이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 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처음에 이 찬양이 나왔을 때, 너무나 좋아서 듣고 또 들었다.
↳따라 불러 보고 혼자도 많이 흥얼거렸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여기까지 달려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앞으로도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 인지 잘 모른다.
↳자신이 은혜로 된 존재라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기가 없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깨에 힘을 준다.
↳성공의 자리에 오르면 목에 깁스를 한다.
↳다른 사람이 보면 꼴불견인데, 자기만 그걸 모른다.

-나이 30세에 벼락 출세를 한 사람이 있다.
↳애굽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의 됨됨이를 알게 하는 말씀이 있다.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게 그의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의 고백이다.

-은혜를 아는 요셉은, 자신을 노예상인들에게 판 형들을 눈물로 품어주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형제들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것으로서 요셉은 자신이 은혜를 아는 자임을 증명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다르다.
↳은혜를 아는 자는 확실히 다르다.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다르다.
↳교회생활이 다르고, 예배생활이 다르다.
↳말씀과 기도생활이 다르고, 헌금생활이 다르다.
↳가정에서의 생활이 다르고, 직장에서의 생활이 다르다.
↳절대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같을 수가 없다.

-은혜로 된 삶은 잃을 게 없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은혜로 살 때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이 땅에,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맞는 성탄절예배와 송년주일예배를 겸하여 드리고 있다.

-우리의 걸어온 인생이 주님의 은혜였다.
↳앞으로 걸어갈 날들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가자.
↳다른 것은 잊어도 주님의 은혜만은 결코 잊지 말자.

-적극적으로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자.
↳은혜가 나를 다스리는 삶을 살자.
↳은혜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자.

-성탄에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란다.
↳올해 남은 며칠도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