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모세) 강해 14: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 14:01-1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2-12-11 12:35
조회
275


구약인물(모세) 강해 14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 14:01-16)
2022. 12. 11.


프롤로그

한 어촌 마을에 고기잡이 나간 배가 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는가?
한 집, 두 집 걱정하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 애가 촛불을 넘어뜨려 집에 불이 나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은 불끄랴, 돌아오지 않은 배를 걱정하랴, 너무 당황하고 있었다.

남편은 풍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가재도구마저 불타고 말았다.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맞은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을 맞았다.
아침이 되자, 그렇게 고대했던 배가 돌아왔다.

배에 탄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풍랑 속에서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육지에서 큰 불길이 올라와, 그 불길을 보고 항로를 바로 잡았습니다.”

집에 불이 난 것이 재앙이었는가?
그렇다. 그건 분명히 재앙이었다.
그런데 꼭 재앙만은 아니었다.
구원의 등불이기도 했다.
만약에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다면, 가장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칫 어느 한쪽 면만 보고 낙심하곤 한다.
하나의 길이 막히면 모든 길이 막힌 양, 실의에 빠지곤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다.
화가 바뀌어 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전화위복을 믿는 사람들이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장차 축복으로 바뀌게 될 줄 믿는다.
현재의 위기는 위험의 보자기에 싸인 기회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보자기만 보고 지레 놀라지 말고, 보자기를 풀어 기회를 삼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운 해변 길이 아닌 홍해의 광야길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출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치를 군사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 군대와 맞부딪치게 되면, 쉽게 낙심하고, 출애굽한 것을 후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소지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연약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적당한 조치를 취하셨다.
홍해의 광야길이 비록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 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으로 취하신 예방조치였다.
이걸 모르니 이렇게 투덜거릴 수 있다.
‘아니,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놔두고, 왜 빙 돌아서 가냐?’

우리는 앞일을 모른다.
몇 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모른다.
단지 예측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
목자는 꼭 필요해서 가는 길이지만,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느낄 수 있다.
왜 좋은 길을 놔두고, 이런 험한 길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목자가 왜 그 길로 인도했는지를 알게 된다.
눈앞에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고, 맑은 시내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기 바란다.
그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절대로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여, 골탕 먹이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가 힘에 겨워 끙끙대는 것을 보며, 은근히 즐기는 고약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 어려움이 훗날 간증거리가 되게 하실 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살게 된 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막의 황량함과, 혼자 지내야 하는 지루함을 참다못해, 그녀는 마침내 친정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그저 싫을 뿐이에요. 이곳은 살기에 너무 끔찍한 지역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답장을 보내왔다.
아주 짤막한 글이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낸 글의 의미를 간파한 딸은 별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 전통을 연구했다.
그 결과 남편의 복무기간이 끝날 즈음에, 그녀는 사막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책을 쓰기까지 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희망을 바라볼 수도 있고, 절망을 바라볼 수도 있다.
우리는 행복을 바라볼 수도 있고, 불행을 바라볼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수도 있고, 환경을 바라볼 수도 있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 중에,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행복과 불행 중에,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과 환경 중에,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여기서 “돌이켜”의 원어 ‘슈브’는 ‘뒤로 돌이키다’ ‘옆으로 틀다’는 말이다.
긴박하고 급작스런 방향 전환을 말한다.
가던 길을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애굽을 떠났으면 어떤 길로든 빨리 가야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다.
모세가 착오를 일으켜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양 옆에는 산이 있고, 앞쪽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는 곳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
홍해와 믹돌 사이에 진을 친 것이다.

믹돌이란 지역은 애굽의 국경선 부근이다.
국경선을 표시하는 높은 망대 앞에 홍해가 있다.
그리고 양쪽에는 비하히롯과 바알스본이라는 산이 있다.
양쪽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 뒤에는 사막이 있다.
그 곳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애굽의 바로가 볼 때도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바로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갇혔다고 볼 수 있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갇힌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이다.
그런데 순종한 결과가 광야에 갇힌 것이다.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코너로 몰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막을 친 좌우에 산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비하히롯이고 다른 하나는 바알스본이다.
비하히롯은 ‘구출’이라는 뜻이 있다.
바알스본은 ‘바알이 내려본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구출해주지 않으면, 바알신 앞에 항복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만난 것이다.

우리도 살다보면, 인생의 코너에 몰리게 될 수 있다.
앞으로 가자니 홍해이다.
양쪽은 산이고, 뒤는 애굽이다.
그렇다고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들이 어떻게 출애굽을 했는데 다시 돌아가겠는가?

어렵게 예수를 믿게 되었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면 일이 잘되어야 할 게 아닌가?
모든 일이 계획한대로 술술 풀려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수 믿기 전보다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럴 때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첫째,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다는 반응이다.
믿으면 좀 나을까 싶어서 믿었는데,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 굳이 믿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괜히 사면초가의 자리로 몰았겠느냐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여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혹 현재 인생의 코너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사면초가의 자리에 서게 된 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우연히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장막을 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믹돌과 홍해 사이게 진을 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해졌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원래부터 선한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고의로 완악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완악해진 그의 마음을 내버려두셨다는 말이다.
바로에게는 그게 하나님의 벌이다.

오히려 징계는 복이다.
징계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믿는다면 감사할 수 있다.

어떤 부부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풍랑이 닥쳐오자, 아내는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지만, 남편은 너무나 태연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풍랑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남편은 대답대신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들고, 아내를 죽이려는 듯 칼을 겨누었다.
아내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어버렸다.
그 때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두렵지 않소?"

아내가 대답했다.
"두렵기는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데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때 남편은 칼을 거두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거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풍랑으로 우리를 죽이시겠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삶의 풍랑으로 인해, 우리는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혼자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줄 믿는다.

마음이 완악해진 바로는 이스라엘을 뒤쫓기로 결정했다.
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그 때는 분명히 내보낼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잡고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장자가 죽는 판이었으니까.
정말 이스라엘을 지키는 신의 능력은 막강했고, 애굽의 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놓아주긴 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리자, 바로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사실 노예를 다 내어보낸 애굽인들 입장에서는,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바로는 곧바로 군대를 일으켰다.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선발된 병거 600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한 것이다.
선발된 병거 600대는 바로의 친위대로 보인다.
최고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이다.
아마 바로는 속으로 ‘이제 너희들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더해진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코너에 몰려있는데, 이제 정말 꼼짝없이 죽었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했는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귀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그 꼴이 뭐냐?’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으면 잘 돼야할 게 아니냐?’
믿지 않는 가족들을 통해서, 혹은 믿음 없는 지인들을 통해서 공격해온다.
때로는 믿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비판의 화살을 날리기도 한다.

마귀는 우리가 잘되는 것을 눈 뜨고는 못 본다.
어떻게든 신앙에서 넘어뜨리려고 한다.
신앙의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
교회는 다니되 적당히 다니게 한다.
예수는 믿되 적당한 선에서 믿게 한다.
그럴 듯한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양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 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너무너무 집요하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나온다.
보통 때와는 다르다.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마귀의 술책임을 알아채야 한다.
그럴 때는 직접 부딪히지 않는 게 지혜이다.

마귀에게는 휴전이 없다.
마귀는 쉬도 때도 없이 싸움을 걸어온다.
공휴일도 없고 국경일도 없다.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으며, 천륜도 없고 인륜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건,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절대 안전하기 때문이다.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마귀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아버지와 늘 좋은 관계에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갇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뒤쫓도록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무슨 말인가?
홍해사건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이다.
거기엔 연출자이신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첫째는 심판의 의도이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했던, 애굽과 바로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홍해 앞으로 그들을 모이게 하셨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는, 최고의 지휘관과 군사들이다.
바로가 가장 믿는 근위대이다.
그들을 총집합시켜 놓고, 흔적도 없이 수장을 시키실 계획이었다.

둘째는 자신을 알리실 의도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말씀이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리실 계기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믿는다.

지나온 삶 중에서 지금이 최악의 상황일 수 있다.
앞은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양 옆엔 산이 가로막혀 있고, 뒤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면초가의 위기 같을 수 있다.
가장 깊은 밤은, 새벽과 맞닿아 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좀 더 살펴보자.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바로의 병거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히 추격해오자,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는, 답답하긴 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자, 심히 두려워하여 부르짖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할 수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아주 눈을 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면 안 된다.
우리의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주장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동굴과 터널은, 어둡기로 치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진다.
반면에 터널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끝이 있다.
빛이 있다.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는 가기 힘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우리의 시련은 동굴이 아닌 터널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기서 부르짖었다는 말이 기도했다는 말이 아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원망의 부르짖음이다.
그들이 모세에게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에게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노예근성이 나오고 있다.

문제가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를 비난했다.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떠넘기고 있다.
일이 잘되어 출애굽하게 되었을 때는, 모세를 영웅시했다.
“우리의 영웅 모세”라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지금 보면 모든 비난이 모세에게 집중되어 있다.
막상 죽느냐 사느냐의 현실적인 문제 앞에 서자, 공개적으로 모세를 불평했다.

사실 모세가 무슨 잘못인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다.
탑리더는 고독할 때가 많다.
한 때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일이 잘 풀리면 영웅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거품일 뿐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이 다 어디 갔는가?
몇 명의 여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리더는 외롭지만 마냥 외롭지마는 않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두려워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과는 달리, 홍해 앞에서 믿음을 드러냈다.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게 모세의 위대한 점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믿음이 없어,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로 인해 벌벌 떨고 있을 때,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봤다.
둘 다 똑같은 상황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처한 환경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둘은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냈다.
환경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믿음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어디서 이런 담대한 믿음이 나왔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모세도 부르짖었다.
그러나 같은 부르짖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의 부르짖음이었고, 모세는 도움의 부르짖음이었다.
모세는 부르짖음에 응답을 받았다.
“내가 친히 구원하겠다.”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겠다.”
하나님께로부터 확답을 받은 것이다.
자기에게 언제나처럼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그를 그토록 담대하게 했다.

삶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다.
환경에 이상이 찾아왔을 수 있다.
내 믿음을 드러낼 기회로 생각하기 바란다.
홍해 앞에 선 것과 같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는 것 같은 일이 생겼다면, 하나님께 내 믿음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믿음을 교회 안에서만 보여주려고 하면 안 된다.
문제 앞에서, 암담한 현실 앞에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믿음이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으로 순종해보기 바란다.
기적은 그 후에 따라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을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상황에서 할 게 없었다.
배를 만들겠는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우겠는가?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앞으로 가라.”

우리가 삶의 위기에 몰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울수록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두려워하면 더 두려워진다.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감옥에서 할 일도 없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올 때마다, 성경에 밑줄을 그어봤다.
하도 많이 나와서 세어 봤더니 365회였다고 한다.
그래서 ‘1년 365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하고, 크게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심령에 들려오기 바란다.

둘째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다.
먼저 기도하란 말이다.
하나님을 개입시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드리라는 말이다.

내가 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하실 게 없다.
내가 항복하고 관둘 때,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을 주신다.
하나님께 무릎 꿇기 전에, 내가 앞질러 한 일은 거의 무효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셋째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를 주신다.
기도해야 할 때가 있고, 일어나야 할 때가 있고, 앞으로 가야할 때가 있다.

많은 고아들을 기도로 먹여 살렸던 죠지 뮬러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절대로 주님보다 앞서지 말자.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자.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

하나님께 계속 무릎 꿇고만 있으면 안 된다.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하나님은 모세더러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셨다.
기도한 것을, 뭐라고 나무라신 것이 아니다.
내가 다 보고 들어 알고 있으니까, 이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실 때, 이미 홍해가 갈라져 있었는가?
무슨...홍해는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다.
기도할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다.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삶이 홍해 앞에 놓인 것 같을지라도, 약할 때 강함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삶이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는 것 같을지라도, 쓰러진 나를 세우시고, 우리의 빈잔을 채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