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0: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고전 11:17-3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5-19 00:00
조회
1479



고린도전서 강해 20

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고전 11:17-34)

2019. 5. 19.





프롤로그

-우리 교단 헌법 제4편 예배와 예식 제2장에 보면, 예배의 기본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말씀의 예전과 성례전이다.

-그 중 성례전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예전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보이는 형태인데,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
성례전에 사용되는 물과 떡과 포도즙은, 비록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들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가지고, 그와 성도들과의 구속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성례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 성례전과 성찬 성례전이다.
세례는 죄인이 죄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죄의 씻음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와 중생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지체가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때부터 교회의 책임적인 구성원이 되어, 의무와 권리를 갖게 된다.

-세례 성례전을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성도들은, 성찬 성례전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한다.
이 예전의 주인은 성령님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새 언약의 표로서 떡과 잔을 나누셨다.

-성찬 성례전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그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떡은 자신의 몸이요, 잔은 그의 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상처를 입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약속의 표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찬 성례전을 행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생각하고 기념(회상, 재현)하라고 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예전을 행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대교회 때부터 현재까지, 성찬을 신령한 예전으로 지켜 오고 있다.

----------------------------------------------------------

-확실히 고린도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다.
바울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교회였다.
이 문제가 좀 잠잠한가 하면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진다.
11장 앞부분에서, 여자의 수건 쓰는 문제를 다뤘다.
오늘날도 모든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긴 하다.
또 다른 문제가 바로 성찬이다.
고린도교회는 성찬에 대해서도 말썽이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그 문제로 인해 칭찬할 수 없다고 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물론 고린도교회가 꾸중만 들은 것은 아니다.
11장 2절에 보면 칭찬을 들었다.

고전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바울이 전해준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 것에 대한 칭찬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가 꼭 잘 지켜서 받은 칭찬은 아니다.
문맥으로 보면, 권면하기 전 어떻게든 잘 받아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한 칭찬이다.
그 이후 바로 여자의 수건 문제에 대해 권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칭찬하지 않는다고 했다.
거룩한 성만찬이 유익이 못되고 해로운 모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참된 표지가 말씀의 유무이다.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이 있는 게, 참된 교회의 표지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예배의 기본 요소가 말씀의 예전과 성례전인 것과 맥이 통한다.
그런데 성만찬을 위한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해로운 모임이 된다니 무슨 말인가?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영혼을 살리는 은총의 수단이, 영혼을 망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충격적이다.

-초대교회 때는 성찬보다는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애찬이라는 게 있었다.
애찬은 아가페의 식사로 불렸다.
이 식사가 끝날 무렵에, 주의 만찬을 나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애찬과 성찬이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랑하면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식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식사는 누구랑 같이 하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이랑 하면 밥맛이 떨어진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밥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자기 친한 사람 곁으로 간다.
먼저 가서 자리 잡아놓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기도 한다.
그런데 무시하고 다른 사람한테 갈 수도 없다.
그럼 새가족들이나 친한 사람이 없는 사람은 소외가 될 수 있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그게 작은 파당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분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음식에서 정이 날 수도 있지만, 음식 끝에 맘 상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어떤 경우는 집에서 안 먹고 교회 와서 실컷 먹어서, 음식이 모자라 못 먹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요즘이야 음식이 남아서 문제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또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남은 음식을 버릴 수 없으니 싸가지고 간다.
그런데 싸주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준다.
어떤 사람은 “좀 싸줄까요?” 물으면,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은 아니다.
어느 날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왔는데, 많이 남아서 좀 싸가고 싶어도 예전에 안 가져간다고 했으니, “좀 싸줄까요?”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먼저 “좀 싸줘요” 말을 꺼내기도 자존심 상한다.
이게 사람이다.

-전에 설향목을 함께 했던 어떤 목사님은, 주일에 공동식사 후 남은 음식을 아무도 못 가져가게 한다고 했다.
자기가 먹든지 나누든지 버리든지 알아서 할테니까, 그냥 두고 가라고 한다고 했다.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음식 문제로 분쟁하는 것보다야 낫겠다.

-고린도교회 상황도 그랬다.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오늘날은 교회 재정에서 공동식사비를 지출한다.
식사 당번이 있어 전체 식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준비해가지고, 교회에 가져와서 애찬을 했다.
오늘날도 매주는 아니라도, 연중행사로 한 번쯤 해볼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대교회 때는 성찬이 독자적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애찬에 이은 주의 만찬의 형태였다.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가지고 와서 애찬을 하는데,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그럼 준비해온 음식에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부유한 자들이 넉넉하게 준비해 와서, 가난한 자들도 부담없이 참여하는 풍성한 식탁이 되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부유한 자들끼리 어울리는 파당이 지어졌던 거 같다.
그리고 가난하여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자들은 굶주리기까지 했다.
성찬식이 끝나면, 어떤 사람은 배가 부르고 포도주에 취해 있고, 어떤 사람은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이게 어떤 주님이 말씀하신 성만찬일 수 있겠는가?

-바울은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음식을 먹는다고, 그게 성만찬일 수 없다고 질타하고 있다.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

20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부자와 빈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분열되어 있다면, 분쟁이 있고 파당이 있다면, 그게 무슨 주의 만찬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예배다.
바꿔 말하면 그게 무슨 예배냐는 것이다.

-아프지만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들어보자.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배자로 인해 예물로 인해 곤혹스러워 하신다.
예배가 하나님을 고문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교회 밖에서 차별받는 것도 서럽다.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그런데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와서까지 차별을 받는다.
빈궁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물론 가난이 자랑일 수는 없다.
그럼 가난이 죄인가? 그렇지 않다.
소유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는다면, 누가 교회 가고 싶겠는가?

-기독교 정신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주는 것이다.
그게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강한 자는 강한 자끼리 놀고, 약한 자는 약한 자끼리 어울리고, 두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존재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다.

-안산제일교회 원로이신 고훈 목사님 얘기다.
그가 처음 예수 믿을 때, 교회 공동 작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몸이 약해 직장생활을 못했기에, 있는 게 시간이었고, 건강 때문에 교사나 성가대로 봉사하지도 못했다.
다른 교인들이 힘든 노동을 할 때, 그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았다.
작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수제비를 끓여 나눠먹었다.
그러나 그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젊은 여 집사님이 수제비 한 그릇을 들고, 왕복 10분 거리의 자기 집에 가서, 남편이 먹을 쌀밥과 바꿔왔다.
“고 선생은 몸이 약해 수제비를 못 먹으니, 당신이 수제비를 드세요. 당신 밥은 고 선생 드립시다.”

-훗날 고훈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다.
“여
집사님의 청을 받아들인 그 남편의 쌀밥 한 그릇은 밥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성찬이었다. 나는 그 사랑으로 목사가 됐다. 세상
어디에도 그 밥보다 더 큰 사랑의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런 맛을 느낀 적도 없다. 우리 교인들이 힘쓰고 있는 무료급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때 밥 한 그릇 진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이게 교회의 모습이다.
이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런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런 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겠는가?

-바울은 성만찬의 기원부터 설명해주고 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성만찬은 교회가 발전해 가던 중에, 새로 도입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기원이 주님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성만찬은 주님이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재현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한 성만찬은 사라질 수 없다.

-성만찬의 핵심 재료는 떡과 포도주다.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렇다고 떡이나 포도주 자체가 신비한 물질이 아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와 중세교회 때,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성만찬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성물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톨릭처럼 그걸 신성시하지는 않는다.

-가톨릭에서는 그것을 성체라고 해서 예를 표한다.
천주교 용어자료집에 보면, 성체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체는 신약의 성사로서 살아계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형태 안에 참으로 실재로, 실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말한다. 성체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현실로는 빵과 포도주이면서, 실체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성물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교회에서는 다들 앞으로 나와서 성찬을 받는다.
빵을 뗄 때 “주의 몸입니다” 하면 “아멘” 하고, 포도주를 받을 때 “주의 보혈입니다” 하면 “아멘” 하며 받는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말씀은 귀로 듣는 거니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성찬은 몸으로 참여하는 거니까, 예배 공동체 밖에서는 불가능하다.
사실은 매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시행하는 게 원칙이다.
매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회상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매주 십자가와 부활만 설교할 수는 없다.
특히 성경 한 책을 정하여 쭉~ 강해해 나가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성만찬에, 좀 더 집중하여 참여하기 바란다.

-성만찬에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나는 ‘주의 죽으심’이다.
다른 하나는 ‘주의 오심’ 곧 재림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라고 한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말로도 전해야 한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은 성찬식을 통해서 전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앞에서 가르칠 때, 학생이 책상에서 앉아서 배우는 방법이 있다.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학생이 보고 듣고 만지는 체험을 통하여 배우는 방법이 있다.
어떤 배움이 더 효과적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우리 자세를 돌아보자.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공동번역에서는 주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 중에는, 연회와 성만찬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회는 즐기는 잔치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연회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
연회는 자기 성찰 같은 게 없어도 된다.
그냥 참여하여 먹고 마시고 잘 놀면 된다.
그러니 연회는 성만찬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만찬에서 자기를 살펴야 할 이유가 또 있다.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십 년째 시골 목회를 하는 박종훈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추수감사절 때 성찬식을 겸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마침 목사님이 독감에 걸려, 겨우 예배와 성찬예식을 진행하느라, 초신자들에게 성찬식 참여 규칙을 잘 전하지 못했다.

-순서에 따라 세례교인 50명의 잔에 정확히 50잔을 채웠는데, 마지막 한 잔이 부족한 것이었다.
집례하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한 잔이 부족한 것이다.
그날따라 주전자에도 포도주가 없어서, 누군가가 양보해야할 상황이었다.
“목사님이 드시죠.”
“아니요! 장로님이 드세요.”
그렇게 하다가 결국 장로님이 드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을 아주 좋아하는 초신자가 분잔을 하는 장로님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집어서 홀짝 마셔버린 것이다.

-모든 예배를 마치고, 온 성도들이 식사를 나누기로 했는데, 초신자 할머니 한 분이 화가 잔뜩 나서 교회 문을 나섰다.
그 분은 평소 다리가 불편해 의자에 않지 앉고,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다.
동생 되는 집사님이 따라나서며, 그 할머니를 붙잡았다.
“아니, 언니... 왜, 식사도 않고 나간다요?”
“야! 이년아! 그거 한 잔만 마시면 내 다리가 다 나을 것 같은 디, 그거 하나 못 얻어주냐?”
“아따! 언니도...., 고것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새신자는 먹으면 안되지락욱...”
“뭐라구? 야! 내가 본께 나보다 늦게 나온 김씨도 잘 만 먹드라.”
그 할머니가 새로 나온 술 좋아하는 김씨가 먹는 것을 봤던 것이다.

-성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함을 느낀다.
참된 회심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다.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여하는 이들도 있다.
성찬이 은총의 수단인 건 분명하지만, 성찬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자기 죄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
처음에는 약하게 된다.
다음은 병이 들게 된다.
그래도 회심하지 않으면 잠자게 된다. 죽게 된다.

-30절은 엄한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경고는 듣지 않으면 손해가 된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손해가 된다.
가정적으로 물질적으로 손해가 된다.
경고만 잘 들어도 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지혜로운 사람은 권면을 잘 듣는다.
경고를 잘 들으면 망하지 않지만, 권면을 잘 들으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분을 보고, 30절이 생각날 때 조심해야 한다.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
내 시각이 편협할 수 있어서이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어서다.

-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 부부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성찬식에조차 이런 행동이 계속됐다.
성찬을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올 때도 손을 잡고 나왔을 뿐 아니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남편이 떡과 포도주를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람들은 이 부부의 행동을 보며, 민망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부 중 아내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장례식에 참석해 위로해주었다.
그 남편은 그간의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놀랍게도 이 부부는 둘 다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아내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성찬식에서조차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판단에 주의 징계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대에 대해 특히 공동체에 대해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기다리라고 한다.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자신이 가서 바로잡겠다고 한다.
항상 서둘러서 문제가 되곤 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을, 조급증 때문에 그르칠 때가 많다.
기도했는가? 주님이 하시도록 기다려보자.
말씀을 받았는가?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기다려보자.
전도를 했는가? 하나님이 그 영혼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