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7: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빌 3:10-2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10-14 00:00
조회
1177
빌립보서 강해 07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빌 3:10-21)2018. 10. 14. 프롤로그

-영화 <상류사회>를 찍은 변혁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인생에선 달려가는 게, 목표가 된 거 같다. 목표가 있어서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셈이다. 그 목표가 바람직한지, 긍정적인 에너지인지 살피지 않은 채 말이다.”

-어디로 달려가는지 확실한 목표도 없이, 무작정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달려가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이다.
열심히 달리다보면 목표가 세워지는 게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남들이 달리니까 같이 달렸다.
그러다가 ‘어, 내가 왜 달리고 있지?’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지?’ 자각할 수 있다.
그럼 달리는 것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질문한다. 답을 얻는다.
그 후에 다시 달린다.

-이제는 달리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달려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목표만 분명하면 달려가는 것은 쉬운가?
이론상으로는 쉽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셉 마샬이라는 사람이 쓴 [그래도 계속 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손자가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할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못 살겠어요.”
손자는 할아버지 앞에서 계속 투덜댔다.
모든 것들이 다 힘들다고, 뭐하나 쉬운 게 없다며 투덜거렸다.

-이 때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추장에게 딸 하나가 있었단다.
추장은 사위를 삼으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세 명의 총각들이 남았지.
마지막 관문은 이거였어.
“마을 뒤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일곱 번 올라갔다오라.”

-그런데 조건은 굳은 날씨에만 일곱 번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쉽게 올라갔지.
그런데 세 번째쯤인가는 진흙 구덩이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났고, 다섯 번째는 너무 힘들어서 지쳐서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갔다.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일곱 번을 채웠다.

-그들은 ‘아, 이제 끝났구나’ 다들 안도했다.
그런데 추장이 한 번 더 올라가라고 한 거야.
세 사람 중 두 명은 화를 버럭 냈다.
“지금도 죽다가 살았는데 또 가라고 합니까?”
그런데 한 총각은 가려고 일어섰다.
하지만 한걸음 내 딛고 푹 쓰러졌다.

-두 명이 힘이 들어서 나가 떨어졌다면, 그 나머지 한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
사람에게 육체적인 한계는 거의 비슷하니까.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
그건 그래도 가겠다고 내딛는 한 걸음 바로 그것이다.
계속 가려고 한 걸음 더 내디딘 사람이, 추장의 후계자가 되었단다.

-“그래도 계속 가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되뇌어야 할 말이다.
달려가다 보면 힘들 때가 있다.
목표가 더 멀어지게 보일 때가 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자기를 향해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래도 계속 가라”
그렇게 버티며 꾸역꾸역 가다보면 승부가 난다.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번역이 조금 어렵게 됐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3: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3: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바라고,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건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 다른 소원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말고, 또 다른 소원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죽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것으로 끝이면 우리는 낭패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려가다가 죽어도 실패가 아닌 이유이다.
영광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 이후에 고난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신앙은 어찌 보면 갈등의 연속이다.
잘 믿으면 잘 믿는 대로 갈등이 있고, 잘 안 믿어도 갈등이 있긴 마찬가지다.

-바울 역시 이미 도달한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 사이의 갈등을 나타내고 있다.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됐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의심이 조금도 들지 않게, 너무나 확실한 표적으로 회심을 했다.
그는 그 때 ‘계속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와 그 지체인 교우들을 박해했다가는, 자칫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아, 이제 나는 예수님한테 꼼짝없이 붙잡혔구나!’
‘나는 이제 남은 삶을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위해 달려가야겠구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다메섹에 가서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고는, 바로 전도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회심이 전부가 아니다.
회심은 예수 믿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회심했으면, 예수님께 붙잡혔으면, 이제 달려가야 한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달려가야 한다.
영적 성장을 위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달려가야 한다.
교회의 비전과 자신의 사명을 위해 쉼 없이 달려가야 한다.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달음질이 둔해진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여기는 순간 달음질을 더 할 수 없게 된다.

-“달려가노라”의 원어 ‘디오코’는, ‘추적한다’는 의미로, 사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사용된 단어다.
목표물을 추적하는 사람은 한 눈 팔지 않는다.
추적하다 딴 생각을 조금만 해도 목표물을 놓치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가?
예수 믿는 것에다 의의를 두는가?
예수님께 붙잡힌 것에 안도하고 있지 않는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멈춰 서지 않았는가?
지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금은 주저앉아 있지 않는가?
달려가야 한다.
다시 일어나 달려가야 한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

-잘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과거를 떨쳐버려야 한다.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내 과거가 행복했든지 불행했든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찬란했든지 초라했든지, 그건 어쩔 수 없다.
과거가 나의 현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내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내 미래는 내 현재가... 내 운명은 주님이 결정하신다.

-내 과거 중 잊어버려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회개한 죄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회개한 죄는 곧 용서 받은 죄이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신 죄를 다시 기억하는 법이 없다.
“하나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하면, “글쎄 나는 기억에 없는데...” 하신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이런 죄도 지었고 저런 죄도 지었던 사람입니다. 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면 “아, 글쎄 나는 기억에 없대두...” 하신다.

-내가 지었던 죄를 나는 기억한다.
또 기억하는 자가 있다. 마귀다.
마귀는 내 기억을 이용하여, 나를 죄의 올무에 묶어두려고 한다.
그리고는 심심하면 찾아와서 과거를 공격한다.
“네 과거를 생각해봐라. 네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생각해봐라.”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회개한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정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 곧 성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회개한 죄는 잊어버려야 한다.

-내 과거 중 잊어버려 할 것이 무엇인가?
과거의 실패다.
과거의 실패를 내려놓아야 한다.
실패했다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했다면 그건 과거에 실패한 것 뿐이다.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면,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니다.

-한 번쯤 실패해보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살면서 몇 번쯤 실패하는 걸 정상으로 여겨야 한다.
스스로를 실패자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성공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달려가야 한다.

-1914년 겨울밤 에디슨의 공장에 불이 타버렸다.
그의 필생의 노력의 결과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화재소식을 듣고 달려온 에디슨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화염을 방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그것은 에디슨에게는 재기 불능의 재난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날 아침 에디슨은 잿더미로 변한 공장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시행착오며 실패들이 완전히 타 버리고 없어졌다. 이제 우리는 그런 실패들을 거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3주일 후에 에디슨은 첫 축음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과거의 실패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달려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패한 과거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밤에 급한 일로 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늘 선착장에 배를 매어 놓았다.
그는 밤에 급히 가기 위해서 줄을 푼다고 대충 풀고, 그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열심히 노를 저었다.
몇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를 저었다.
한참 후, 그는'이제는 목적지에 다 왔겠거니...' 생각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그래서 이제 이 쪽 섬에 내리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내리려고 했더니, 웬걸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까?
밧줄을 온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매인 밧줄 덕분에 밤새도록 수고를 했지만, 배는 단 1미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한다.
버려야 할 것은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

-잘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푯대를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의 원어 ‘카타 스코폰’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란 의미다.
무조건 달려가선 안 된다.
빨리만 달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 달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 달려야 한다.

-우리는 경주자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달려가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다.

-경주자인 우리에게 푯대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쳐다보고 달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한 눈 팔면 마귀가 미혹한다.
‘한 번 사는 인생을 힘들게 살려고 하냐며 경주를 중단하라.’
‘예수 밖에 모르는 따분한 인생이 아닌 적당히 즐기면서 살라.’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말 들으면 신앙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교인인 우리에게 또 다른 푯대가 있다.
바로 교회 비전이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1110세계비전이다.
우리는 이 비전을 똑바로 쳐다보고 달려야 한다.
1110세계비전에서 조금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한 눈 팔면 마귀가 미혹한다.
‘한꿈교회만 교회냐’
‘적당히 믿지 꼭 그렇게 별스럽게 믿어야 하느냐’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말 들으면 교회에서 주변인이 되고 만다.

-헨델이 메시아라는 위대한 곡을 작곡할 때, 무려 23일간이나 침식을 잊고 작곡에 몰두했다고 한다.
훗날 헨델은 그 곡을 작곡하던 때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 때 오직 하나님나라 그리고 이 나라의 주되신 메시아 바로 그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할 상황은, 인생의 최악의 시기였다.
그는 병들어 있었고 가난했다.
엄청난 부채에 시달려야 했고, 채권자들이 그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쳐다봄으로서, 위대한 음악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음을 말했다.
하지만 그 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간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끝까지 달려간 자에게 주어진다.
주의 몸된 교회와 비전을 향하여 끝까지 달려간 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고 싶지 않은가?
나는 정말 그 상을 받고 싶다.
그 상을 우리교우들과 함께 받고 싶다.
그 때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주의 은혜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나는 그 상을 받아들고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주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라며, 눈물을 글썽이고 싶다.
여러분도 그 상을 받아들고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주의 은혜입니다. 목사님 덕분입니다.” 라며,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면 큰 보람이겠다.

-교회 안에 모든 성도가 같을 수는 없다.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기서 온전히 이룬 자는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
성숙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성숙한 자들에게는 은혜 되는 말씀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시험이 될 수도 있다.
똑같은 부모 아래 태어나도, 각기 다르다.
똑같은 교회에서 똑같은 목회자와 함께 하는데도, 각기 다르다.
그럴 때 ‘왜 다르지’ 하고 문제제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 문제만 아니면 다른 게 정상이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문제만 아니면 달라도 괜찮다.
1110세계비전 문제만 아니면 다를수록 좋은 것이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니, 헌신이 같을 수가 없다.
은사의 종류가 다르니, 사역이 같을 수가 없다.
다만 공동체에 보조를 맞추기는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나 홀로 독불장군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하다.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들고 있다.
우리 문화에서는 좀 적응이 안 되는 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기 우월감에서 교만한 말을 한 것은 아님을 안다.
신앙에 완전한 자가 있겠는가?
인품에 완전한 자가 있겠는가?
사역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모본으로 자신을 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만 본보기로 든 것은 아니다.
자기와 함께 동역하는 자들, 곧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들고 있다.

-우리는 교회 생활하면서 본보기가 필요하다.
교우들이 생업을 접고 풀타임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를 본받을 수는 없다.
한 발 앞서가는 자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신앙의 완전한 사람은 없다.
인품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직분자로 세우셨다.
그렇다면 그의 주어진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권위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권위를 인정하고 싶어도 인정이 안 되는데 어쩌겠나’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사실 남 앞에 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달려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 그들을 격려해줘야 한다.
그들을 응원해주고 성원해줘야 한다.
뒤에서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막상 자기가 그 자리에 서보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뒤에서 잘난 척했으니, 도와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다.

-사역에 관하여는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히 말했던 바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죽음 앞에서도 담담했던 바울이다.
막상 로마에 왔지만, 매인 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서는, 묵묵했던 바울이다.
그런데 자기를 생각해 주고 후원해주는 빌립보교회 안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눈물로 호소한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이건 그냥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이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의 눈에 피눈물이 맺힌다.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기도조차 잘 안 된다.
그저 “주여, 주여”를 부르며 눈물만 훔칠 뿐이다.

-보면 밭에 곡식만 자라는 게 아니다.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교회라는 밭에는 곡식뿐만 아니라 가라지도 자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붙들고 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최후가 있다.

-19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다.3: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최후는... 멸망이다.
그들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
자기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기 때문이다.
자기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으면, 멸망할 걸 뻔히 알기에,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답이 나온다.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소망 때문이다.
미래의 소망 때문이다.
소망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다.
소망은 무작정 죽치고 앉아서 기다림이 아니다.
준비하는 것이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 사모하는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훈련할 수 있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가 오신다.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기다려야 할 이유이다.
지금은 믿는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거기서 거기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지금은 잘 믿는 자나 그렇지 않는 자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걸 판별할 그날이 온다.
머잖아 그 날이 오면, 모든 게 달라진다.
최종 승부는 바로 그날 갈린다.

-다시 푯대를 바라보자.
다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유일한 구원자 되신 예수님만 똑바로 쳐다보자.
1110세계비전만 똑바로 쳐다보고 같은말 같은마음 같은뜻으로 달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