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2:은혜 받은 사람은 고난도 받습니다.(빌 1:12-3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9-09 00:00
조회
1237
빌립보서 강해 02은혜 받은 사람은 고난도 받습니다.(빌 1:12-30)2018. 9. 9. 프롤로그

-A.W. 타겟이라는 사람이 쓴 단편 소설 중에 [창]이라는 작품이 있다.
어느 작은 병실에 입원해 있는 두 남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로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병세로 말하자면 폐암 말기 환자는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왜 그런지 얼굴에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루는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창밖에 뭐가 보여요?”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고, 보트도 보이고, 백조도 보이네요.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이 보이고,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얼굴도 보이는군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의 얼굴이,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자기는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 폐암 환자가 빨리 죽어서 나가면, 자신이 저 창가 침대를 차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아니야, 저 환자가 죽어야 내가 저 침대를 차지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두고만 봤다.
아침이 밝아 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다.
그 옆에 있었던 폐암 환자가,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얼마 후에 병원 측에서 그에게 병실을 옮기고 싶은지 여부를 물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이 방이 좋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면 저 창가 침대로 자리를 옮겨 주세요.”

-병원의 허락을 받아 창가 침대로 옮기자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창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제야 그는 폐암 환자의 기쁨이 상황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택한 기쁨...’
그렇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발생한 기쁨이 아니다.
찾아온 기쁨이 아니다.
선택한 기쁨이다.

-그렇다. 기쁨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왜 이런 찬양이 있지 않은가?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내 팔의 힘과 목소리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내 마음은 기뻐하기로 결심을 했네

-바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는 지금 로마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하였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살아서 나간다는 보장이 없는 감옥이다.

-바울은 로마의 꿈을 가졌다.
그건 자신이 평소 로마를 동경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다.행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로마에 갈 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죄수로 압송되어갔다.
가다가 배가 파선되는 등 죽을 고생을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로마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동안 셋집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복음을 전했으나, 후에는 감옥에 갇혔다.
그 후 로마의 대화재로 인한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 순교의 제물이 됐다.

-바울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상했을 것이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이거 하나 뿐이었다.“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자기가 당한 일보다, 복음 전파의 진전을 더 생각했다.
누가 봐도 자기 코가 석자다.
그럼에도 복음 전파의 진전이다.
이건 복음에 미친 사람만이 가능하다.

-세상이 보기에 그는 대책이 안 서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대책이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그의 대책이었다.
하나님을 대책으로 삼은 사람은, 죽고 사는 것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생명보다 더 큰 관심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있다.
그게 사명이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여겼다.
복음 전파가 진전됨을 알리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표정이 상상이 되는가?
어떻게든 복음 전파의 진전된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어 하는, 바울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지는가?
이런 사람이 사명자다.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는 매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 매임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켰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갇혀 있다는 사실”이라고 번역했다.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가 왜 갇혀 있는지를 시위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 시위대는 죄수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이다.
자연스럽게 바울과 접촉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바울은 그걸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다.

-복음은 최선의 환경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지금의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더 나은 환경이 주어져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그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다.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형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비록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을 쳐다보는 눈이 있었다.
바울이 그 상황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을 보고, 그들도 힘을 냈다.
바울이 매인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동기부여가 됐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이 바울의 명성을 알고 있다.
그런데 바울 같은 사람도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 겁을 내야 한다.
그전에 뭣 모르고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 보니 이 일이 엄청 위험한 일인 줄 깨닫고 포기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소문을 듣고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갇혀 있는 것을 통해, 그들이 주님을 더 신뢰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참 말도 안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신앙이다.

-예수 믿으면 환경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순서상 일 번은 아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먼저다.
내 가치관이 바뀌고, 내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먼저다.

-복음과 무관했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누리며 사는 것도 훌륭하다.
교회 안에는 있지만, 실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다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간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에서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그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게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복음을 받고는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사람이 소수이다.
그나마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사람마저도,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니다.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이 어디가나 환영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전도자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울이 로마에 오기 전부터, 이미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14절에 나오는 형제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에는, 바울이 매인 상태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에 도전을 받고,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저렇게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하면서, 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복음을 전하기는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기는 선하지 않았다.
바울에 대한 시기와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우리가 바울에게 로마 복음화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열심을 냈다.

-바울에게 그런 소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든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는 거였다.
역시 대인이다.
역시 그는 그릇이 큰 사람이다.

-밥그릇 싸움이 치열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면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
‘자기 밥그릇도 못 찾아 먹는다’며 바보란 소리를 들을까?
그럴 수 있다.
충분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께는 어떤 소리를 들을까?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하는 삶을 살면 된다.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에게는 그리스도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걸 위해 다메섹에서 부름을 받았고, 1, 2, 3차 전도여행을 했고, 로마에까지 왔다.
바울은 지금 몸이 매여 있어 어쩔 수 없다.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등, 제한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사방으로 달려가 복음을 전하고 싶다.
그런데 자기한테 도전을 받아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라도 복음이 전파되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이게 바울의 진심이었다.

-어찌 보면 좀 불편할 것도 같은데,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죽음의 그림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노 사도가, 무슨 낙을 보자고 맘에도 없는 말을 하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복음 전파가 진전 되는 것을, 빌립보교회 교우들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기도에 대한 감사이자, 또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감옥 생활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빌립보교회 교우들의 기도가 큰 힘이 될 것을 알았다.
목회자를 위해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친 목회자를 일으켜 세운다.

-바울은 모든 일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음을 믿고 있다.
그럼에도 빌립보교회 교우들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다.
성령님은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성도가 기도할 때 역사하셨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라.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바울 사도에게조차 중보기도가 필요했다.
그 힘든 상황에서 바울 자신도 기도했을 것이다.
동시에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기도 부탁을 했다.

-목회자는 성도의 기도를 먹고 산다.
사탄교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
목회자들이 실족하여 넘어지기를 위해 깨어 기도한다.
이단 사이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도가 목회자를 기도로 지켜야 한다.
성도는 자기 기도의 절반을 교회를 위해서 하고, 교회 기도의 절반을 목회자를 위해서 해야 한다.

-바울이 지금 재판을 앞두고 있는 듯하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는 재판 결과보다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고,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고 싶어 했다. “살든지 죽든지”
이 말에서 죽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초연해 있는 듯하다.
살만큼 살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생에 대한 애착이 생각보다 강하다.
바울이라고 예외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역시 감옥 생활이 힘들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담대하게 선포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이 고백은 찬양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소망의 바다 미니스트리>에 실린 『십자가의 전달자』란 노래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무익한 날 부르셔서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내 몸에 밴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내 사랑 나의 십자가

-바울은 재판에서 풀려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그는 생사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
생각해 보면 풀려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
자기만 생각하면 세상 고생 끝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생활하는 것이 더 좋다.
문제는 바울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어떤 게 더 유익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게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진심이다.

-바울에게는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한 바람이 있었다.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믿음의 진보였다.
진보가 있으면, 퇴보가 있는 법이다.
믿음은 점진적으로 진보해야 한다.
믿음의 진보를 보고 있으면 흐뭇하고, 믿음의 퇴보를 보고 있으면 안타깝다.
자기 믿음을 스스로 진단해 보라.
내 믿음이 진보하고 있는가? 퇴보하고 있는가?
어제보다 오늘 더 진보했는가?
작년보다 올해가 더 진보했는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퇴보한 것이다.
어쩌면 믿음의 현상유지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현상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진보하고 있다면 격차가 벌어진다.
우리가 무엇보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 관심을 좀 갖자.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바람이 또 있었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생활하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시민답게 살아라’이다.
복음에 합당한 시민답게 살아라는 말은, 천국 시민답게 살아라는 뜻이다.
하늘나라 시민권자로 살아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드리면, 하늘의 시민권자가 된다.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면, 권리와 함께 의무가 주어진다.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으면,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해야 한다.

-걸맞아야 보기 좋다.
걸맞지 않으면 어색하다.
복음과 생활은 걸맞아야 할 관계다.
복음과 생활이 견주어 어울려야 한다.
복음을 어떻게 여기느냐가, 그 사람의 생활이다.
자신의 생활을 통해 복음의 가치를 말해준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바람이 또 있었다.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은혜주신 이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다.
“은혜와 고난...”
이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주신다.
‘은혜 받은 자로서 고난도 달게 받는 것...’
이건 자기와의 싸움에 해당한다.
누가 고난 받고 싶어서 받겠는가?

-고난 중에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고난의 보자기를 풀어본다.
본래부터 은혜의 보자기는 없다.
밤나무에 밤알이 바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밤알은 밤송이라는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를 주신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