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04: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고전 3: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12-02 00:00
조회
1525
고린도전서 강해 04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고전 3:1-9)
2018. 12. 2.

프롤로그

-올해 초 평창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전쟁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던 남북관계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깃점으로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동계올림픽에 여러 기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미터에서 이상화 선수가 과연 올림픽 3연패를 할 수 있느냐에,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상화 선수는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하필이면 일본 선수인 고다이라 나오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이상화 선수가 폭풍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데, 고다이라 선수가 다가왔고 이상화 선수가 그의 품에 안기는 게 아닌가?
금메달을 경쟁했던 두 선수의 포옹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고다이라 선수가 울고 있는 이상화 선수에게, 이런 말로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잘했어, 난 아직 너를 존경해.”
그녀의 말은 진정성이 묻어난 말이었다.

-경기 직후 고다이라 선수의 인터뷰 내용이 그걸 말해준다.
“이상화와는 월드컵 때부터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상화가 우승하고 나는 그러지 못했을 때, 상화가 함께 울어줬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상화를 위로하고 싶었다. 상화 덕분에 나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상화 선수의 인터뷰 내용도 소개하면...
“고다이라와 절친한 사이였고, 한국에도 초대할 만큼 사이가 좋았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다가, 고다이라가 ‘평창에서 네가 1등하고 내가 2등하면 좋겠다’ 이런 얘길 하길래, 반대로 ‘내가 2등하고 네가 1등하라’고 응원했다. 오늘 정말 그렇게 됐다. 일본에 갈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것 선물해준다. 고다이라도 제가 좋아하는 걸 많이 선물해줬다. 그런 추억이 많다. 남다른 애정이 있다.”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라이벌 관계를 넘어 동역자 관계로 봐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라이벌 관계를 동역자 관계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이고 초대 담임이었고, 아볼로는 후임이었다.
둘 다 워낙 뛰어난 목회자이고, 목회적 은사가 탁월했기에 호불호가 갈렸다.
그래서 편이 갈려지고, 더 나아가 분쟁이 일어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여겼는가?
동역자로 여겼다.

-국어사전에서 “라이벌”을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라고 풀이했다.

-“동역자”는 어떻게 풀이했을까?
‘<기독교> 선교 따위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사전 단어 풀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라이벌의 핵심은 경쟁에 있고, 동역자의 핵심은 협력에 있다.

-경쟁에는 끝이 없다.
참된 기쁨도 평안도 없다.
서로를 넘어서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내가 상대방을 이겨야 하고 상대방도 나를 이겨야 한다.

-협력은 그렇지 않다.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준다.
내가 잘 되면 좋고 상대방이 잘 돼도 좋다.

-복음을 전해도 경쟁적으로 전할 수 있다. 빌 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 이야기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걸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도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되지’ 하고 대인배 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협력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면 바울에게 더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괜찮은 걸까?
성과만 올리면 괜찮은 걸까?
아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이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결과가 좋고 성과를 올려도 생치기가 난다.
장기적으로 보면 사역보다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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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왜 분파가 생겼는지 왜 분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곧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과 성숙한 것은 다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다 성숙하지는 않다.
교회 안에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가진 사람을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 믿는 것은 순간적이다.
그러나 성숙함은 지속성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자기 수행이 필요하다.
물론 성령님이 주도하시지만 성숙을 위한 자기 노력 또한 필요하다.

-바울은 2:14,15에서 신령한 자와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한 적이 있다.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자연인을 가리킨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신령한 자는 예수 믿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1절에서는 신령한 자를 육신에 속한 자와 대조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영적 어린아이, 영적 성인아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의미가 다르다.

-신령한 자도 육신에 속한 사람과 대조하고 있으니까 구원 받은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란 뜻으로 썼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란 성질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성숙해도 성질이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있는 성질을 죽이는 것이다.
아무 때나 성질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에서도 성숙한 미숙함이 있다.
자기가 기준인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다.
그럼 어떤 기준을 가진 사람이 성숙한 사람인가?
말씀이 기준인 사람이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기준인 사람이다.
예수를 얼마나 믿었느냐 교회를 얼마나 다녔느냐가 성숙한 사람의 기준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 이것이 과연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생각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교회에 분쟁이 생겼을 때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은 쉽다.
인격이 미숙해도 생각이 미숙해도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 눈물로 묵묵히 기도하는 것은 성숙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성숙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쪽파 대파 양파 골파로 갈리어 분쟁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영적 아이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바울이 토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아이가 처음부터 밥을 먹을 수는 없다.
젖부터 먹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유식을 먹고 점차 밥을 먹어야 한다.
세 살이 되고 다섯 살이 돼서도 젖 밖에 안 먹는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젖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젖 먹는 사람이 다수였다.
한 동안 시간이 지났는데, 전에 바울이 젖 먹일 때의 상태다.
그 때 바울이 그들에게 젖을 먹였던 것은, 그들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젖 먹어야 하는 수준에 있으니 답답하다는 것이다.

-신앙이 정체되어 있는 교인을 보는 목회자의 마음이 다 그럴 것이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목회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은퇴한 이동원 목사님은, 자기 설교집 <이렇게 너의 성전을 거룩되게 하라>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자기가 잘났다는 소리를 계속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면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인들이 변화 받게 하옵소서. 성숙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직까지 한 번도 고백하지 않은 저만의 기도가 있는데, 저는 사실 이런 기도도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저의 솔직한 기도입니다.

-교인수가 많아서 배부른 기도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원하는 마음이 없이, 그런 기도 할 수 없다.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이, 그런 기도 못한다.
신앙이 정체되어 있는 교인을 바라보는 게, 오죽 답답하고, 오죽 안타까웠으면, 그런 기도를 다 했을까 싶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다”는 바울의 말에,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아니다 우리는 그 때보다 성장했다. 우리를 어린 애 취급하지 말라” 하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 비췬 그들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였다.

-그들의 행위가 그걸 증명했다.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들 가운데 있는 시기와 분쟁이 그것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하는 것이 시기다.
시기가 자기 안에 있으면 자기가 죽어간다.
시기를 외적으로 표출하면 분쟁을 유발하여 타인을 죽게 한다.
시기는 자기가 죽든지 남을 죽이든지 한다.
시기는 마음의 병이다.
그런데 그 병으로 바로 죽지는 않는다.
그 병은 당장 죽는 병이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병이다.

-시기심이 겉으로 드러난 분쟁은 관리조차 쉽지 않다.
육신에 속한 자간의 분쟁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될 기미보다는 확산될 기미가 보인다.
오죽 했으면 글로에 집으로 전도여행 중에 있는,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까?

-고린도교회에 네 파가 있어 분쟁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파가 바울파와 아볼로파였다. 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바울이야 고린도교회를 설립한 사람이고 초대 담임을 했으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어떻게 아볼로가 그 정도 영향력이 있을까?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정리를 해보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이다.
그는 언변이 좋았다.
또한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헬라의 철학에 밝아 교리와 성경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요한의 세례밖에 몰랐지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거기다 가르치는 열심까지 있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배우는 겸손도 갖췄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유대인들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던가?
그런데 아볼로는 예수를 전할 때,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고 했으니, 그가 정말 대단한 셈이다.

-이런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니, 똑똑하기로 치면 바울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실력이지만, 고린도에서는 자기 말의 지혜를 내려놨다.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볼로가 부임하여, 헬라 철학에 밝아 교리와 성경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니, ‘와 우리 아볼로 목사님, 진짜 실력 있다’ 하는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나름 배웠다고 하는 식자층들을 중심으로 아볼로파를 형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볼로도 교회 내에 자기 파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현재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아볼로를 통해 은혜 받았던 사람들이 아볼로파를 지었고, 바울을 통해 은혜 받았던 사람들이 바울파를 지어, 교회가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다들 하는 주장들이 그럴듯하다.
그럼에도 그건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파와 분쟁은 육신에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주 앞에서 어떤 관계인지를 차분하게 설명해나갔다.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3: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더 잘 표현한 것 같다.
바울 자신도 그렇고 아볼로도 그렇고, 주 앞에서는 일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꾼이면, 또한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럼 교인 입장에서는 ‘주께서 세운 지도자이니, 존경하고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게 자기 영혼을 위하는 것이다.

-지도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나는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는 일꾼이다, 머슴이다, 종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게 자기 영혼을 위하는 것이다.

-바울이 후에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역자들이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이다.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알고, 목에 힘주고 살면 안 된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머슴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런 생각을 한 시라도 놓치면, 우스운 사람 될 수 있다. 3: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얼마나 멋있는가?

-주님이 필요에 따라 쓰신다.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주님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쓰신다.
같은 목회자라도, 바울은 심는 은사가 있었고, 아볼로는 물 주는 은사가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는 은사가 있었고, 아볼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이나 아볼로가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 쓰임 받았던 것이다.
주님이 바울과 아볼로를 바꿔서 쓰셨다면, 그들은 꽤 힘들어 했을 것이다.
현명하신 주님이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은사를 발견했으면 은사를 묵혀두려고 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이런 고백과 함께 말이다. 하나님 나라도 쓰시려거든 하나님 나를 사용하소서 나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도 쓰시려거든 하나님 주님의 뜻 안에서 성령께 이끌리게 하소서 나만의 생각으로 넘어지쟎케 오 주님 나를 인도하소서 매일 매일 똑같은 자리에서 주저앉아 실패하지 않도록 내게 주신 주님의 말씀 안에 힘입어 내게 주신 은혜를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 나를 채워주소서 영원토록 주 위해 쓰여지기 원하니 주님 나의 맘에 들어오셔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소서영원토록

-바울이 자신은 심는 자로 아볼로를 물 주는 자라고 한 것은, 둘을 한 팀으로 본 것이다.
고린도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나가는데, 두 사람이 시간 간격은 있지만 한 팀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아볼로를 경쟁하는 라이벌이 아니라, 협력하는 동역자로 본 것이다.
이런 의식을 갖는 게 성숙이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교회가 성숙한 교회다.

-교회 내 모든 사역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일을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일꾼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를 써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이 그걸 말하는 것이다.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드러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광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고 물 줘서 자라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은 사람이 내가 심었다고 자기를 내세우면 된다 안 된다?
물 준 사람이 내가 물 줬다고 자기를 내세우면 된다 안 된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분이 심은 사람이고, 저 분이 물 준 사람이다고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마디 덧붙이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상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사역자가 아무리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사역자가 일한 대로 상을 주신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자기 공을 내세워도, 하나님은 사역자가 일한 만큼만 상을 주신다.
세상에는 타인의 공을 가로채 자기 공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공명정대하다.

-자기에게 일이 맡겨질 때 감사하라.
자기 상급을 받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맡겨주지 않으면 못 한다.
예전과 달리 교회에서 일을 맡길 때 많이 배려한다.
막무가내로 맡기고, 잘한다고 몽땅 떠맡기지 않는다.
사역을 적당히 분배시키려고 한다.
그래도 사역자 세우다보면 중복을 피할 수 없다.

-1인 1사역을 원칙으로 100% 사역자가 되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대형교회에서는 20-80 법칙대로 20%가 80% 사역을 한다.
우리교회에서는 80%를 사역에 동참하게 하고 싶다.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사람이 누군가?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표현했다.
우리는 사역자로서 서로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동역자입니다.”“당신은 나의 동역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