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02: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고전 1:18-3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11-18 00:00
조회
1033



고린도전서 강해 02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고전 1:18-31)
2018. 11. 18.

프롤로그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한 셈이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이미 처리한 셈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부여잡고 씨름하는 중에 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는 해결했다.

-사람은 큰 문제를 겪고 나면, 웬만한 문제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저런 문제 앞에서 자주 쉽게 흔들린다면, 내가 구원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문제를, 예삿일로 여기면 안 된다.
구원은 내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광고 때부터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일부러 날 잡아서 본 영화가 있다.
<관상>, <궁합>, <명당>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나는 다 재미있게 봤다.
왜 관상 보는가?
왜 궁합 보는가?
왜 명당 찾는가?
운명에 순응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어떻게든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서다.

-세상에 운명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운명이 바뀌었다.
운명이 바뀌는데, 내 공로가 없다.
그럼 다른 사람의 공로인가?
아니다. 예수 공로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 예수 보혈의 공로다.

-내 공로도 네 공로도 아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 운명은 단번에 영원히 바뀌었다.
이걸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문제는 이것이 너무 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진다는 것이다.
죽을 고생을 해도,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일을 말이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걸 이름 하여 ‘십자가의 도’라고 한다.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양날의 검과 같다.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주고, 그 도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을 준다.
인간은 이 십자가의 도 앞에서 선택을 요구받는다.
‘받아들인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영원한 삶이 결정된다.

-이 땅에서 선택할 기회는 여러 번 주어진다.
딱 한 번의 기회로 영원이 결정되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기회가 언제까지나 무한대로 주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엔 기회가 있었다.
노아가 세 아들과 함께 방주를 짓는 동안엔 기회가 있었다.
노아가 세 아들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회가 있었다.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게 한 두 번의 기회가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노아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를, 미련한 것으로 취급했다.
노아가 말씀에 순종하여 홍수 심판을 대비하는 것을 정신 나간 짓으로 치부했다.
이 땅에서 차별화된 삶은 이처럼 미련하게 보일 수 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의 세계관으로 보면, 그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다.

-지난 10월 21일-25일 3박 5일 일정으로, 오천지역교회 연합회에서 목회자 수련회를 마카오와 홍콩으로 다녀왔다.
그 때 개신교 최초의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잠들어 있는 묘원도 방문했었다.

-모리슨 선교사에게 이런 기도문이 전해지고 있다.“하나님,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일하게 해 주소서!”

-이 기도문이 상식적으로 이해되는가?
여러분은 이 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같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도, 그 기도를 드리며 중국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를 드높이기는 해도, 막상 자신은 그런 기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선교사로 와서 선교활동을 전개한 25년 동안에, 어떠한 교회도 건립하지 못하고, 단지 열 명의 여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는 사이 아내와 자녀들을 잃었고, 자신도 52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을 향해, 세상이 찬사를 보낼까?
비웃음을 보낸다.
그건 당연하다.
하긴 그리스도인조차 주의 부르심 앞에서,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소서” 하기보다, “쟤도 있어요. 쟤를 보내주소서” 하며 뒷걸음을 치니 말이다.
그건 십자가의 도를 정확이 몰라서 그렇다.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믿지 않아서 그렇다.
십자가의 도를 정확히 알고 제대로 믿으면,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는가?
왜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가?

-지혜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뜻풀이를 해놨다.
‘깨닫는 능력’과 ‘판단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게 미련한 것인지 하나님의 능력인지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그릇에 담기 위해서는, 담겨져 있는 것을 비워야 한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이전까지 누구도 제시한 적이 없는 새로운 방법이다.
인간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를 멸하지 않고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게 인간 지혜의 한계다.
자기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기 힘들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바울은 지혜 있는 자, 선비, 변론가를 불러낸다.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이 세 부류가 당대에 지혜 있는 자의 대표였던 모양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지혜를 어떻게 하셨다고 하는가?
미련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그들의 지혜를 한참이니 뛰어넘었다.
‘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된다?’ 이게 그들의 지혜로 이해가 되겠느냐 말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에서도, 신이 인간이 된 적이 없다.
신이 인간이 되는 것도 이해불가인데, ‘인간을 구원하려고 자신이 죽는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는다’, 이걸 어떻게 자신들의 지혜로 설명하겠느냐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지혜를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받는다.

-인간의 지혜를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또 있다.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세상에 제시한 십자가의 도를,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말씀을 드렸다.
소수지만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을 전도자로 사용하셔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표현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지혜를 짜낸다.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했는데, 미련한 것에 지혜를 더하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하다.
전도는 그냥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쉽게 말하면, 내가 아는 사람에게 내가 믿는 예수를 전하여 내가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다.

-전도에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이 있다.
나는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봉사하면 된다.
내가 할 일 곧 내가 해야 할 봉사가 무엇인가?
내가 아는 사람을 늘리는 것이다.
그게 전도 대상자를 확보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를 알리는 것이다.
말로 행위로 영향력으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다.
내가 복음으로 낳아서 내가 양육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때 성령님이 그 사람의 귀를 열어 말씀을 듣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하신다.
그리고는 성령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인을 치신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이유를 댄다.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냥 안 믿는 법이 없다.
예수 안 믿을 수밖에 없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이유가 통하지 않는다.
믿고 안 믿고가 본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내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 본인의 결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에 따라 예수를 믿는데 장애물이 있다.
나는 모태신앙인 게 너무 감사하다.
내가 예수 믿는 데는 일체의 장애물이 없었다.
그에 반해 내 아내는 아버지라고 하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어릴 때 매를 맞아가면서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 장해물이 됐다.
헬라인들에게는 지혜가 장해물이 됐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는 표적이란 장애물을 뚫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다.
헬라인들 중에는 지혜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럼 그걸 자신의 공로라고 자랑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다.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공평하다.
모든 사람에게 부르심은 열려있다.
누구나 그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라고 다 응답하지 않았다.
헬라인이라고 다 응답 안 한 게 아니었다.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한 자들이 많았다.
헬라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가 아니란 말이다.
구원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누가 응답하느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다.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부르심을 애써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거리끼는 돌이 되고 부딪히는 반석이 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능력이 맞는가?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인정하는가?
그리스도의 눈을 부담스러워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맞을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지혜가 맞을까?

-입술의 고백과 삶의 고백이 다를 수 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하는데 삶은 아니다.
삶은 엉터리다.
그럼 어떤 고백이 진짜일까?
입술의 고백이 진짜일 거 같은까? 삶의 고백이 진짜 신앙고백일 거 같은까?

-사람이 교만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지혜로운 줄 안다.
자신은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사람인줄 안다.
그런 사람치고 지혜로운 사람을 못 봤다.

-탈무드에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일곱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한다.
첫째,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침묵하고 듣는다는 것이다.
둘째, 남의 이야기에 절대로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대답할 때에 덤벙대지 않고 언제나 신중히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넷째,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미루어도 될 일은 맨 마지막에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모를 때에는 모른다고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일곱째, 진실을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탈무드에서 제시한 일곱 가지 조건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지혜 있는 사람인 거 같은가?
일곱 개 중 몇 개나 해당하는가?

-아무리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뭐한가?
구원 받지 못하는 지혜가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한 선비가 강을 건너가다가 사공에게 으스대며 물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

-사공은 노를 젓다말고 머리를 돌려 대답했다.
“뱃사공이 그걸 알 리가 있겠습니까?”

-선비가 사공이 딱하게 여기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세상사는 맛을 모르는구먼.”

-또 선비가 물었다.
“그러면 공맹(孔孟)의 가르침은 아는가?”

-그걸 알 리가 없는 사공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모릅니다.”

-선비는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런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구먼!”

-선비가 또 물었다.
“그럼 글을 읽을 줄은 아는가?”

-사공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는 까막눈입니다.”

-선비는 사공이 가련하게 보여서 혀를 끌끌 찼다.
“원 세상에! 그럼 자넨 왜 사는가?”

-이때 배가 바위에 부딪혀 가라앉게 되었다. 이-번엔 사공이 선비에게 급하게 물었다.
“선비님, 헤엄치실 줄 아십니까?”

-선비는 잔뜩 겁을 먹고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아니, 난 헤엄칠 줄 모르네.”

-사공의 목에 모처럼 힘이 들어갔다.
“그럼 선비님은 죽음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비와 사공,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지혜로운 거 같은가?
살면서 이런 저런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구원 얻는 지혜로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지혜와 이 땅에서의 삶의 지침이 들어있는 성경을 주셨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자.
성경의 가르침과 안내를 따라서 살자.

-고린도교회 역시 교회 내에 사회적으로 유력한 자들이 별로 없었다.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본래 부르심은 법정에서 사용하던 말이라고 한다.
재판관이 증인을 부를 때, 또한 피고를 부를 때 거역할 수 없다.
즉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이다.
기분 나쁘다고 대꾸도 안 하고 하면 제재를 받는다.
인격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강제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렇지 않다.
매우 인격적인 부르심이다.
구원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에게는, 또 한 번의 부르심이 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에 일꾼으로의 부르심이다.
즉 교회 사역에로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부르심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육체를 따라 부르실 수 있겠는가?
지혜로운 자라고 부르시고, 능한 자라고 부르시고, 문벌 좋은 자라고 부르시고, 그렇게 하겠는가?

-사실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를 부르시면, 당장 일하기는 수월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이 자랑할까 싶어서다.
하나님이 그 꼴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고,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면, “아, 하나님이 하시구나”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이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창조주가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 언뜻 말이 안 되지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예배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찬양이다.

-우리 역시 고린도교회처럼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그러니 하나님이 더 신경 써주실 거 같다.
잘 난 자식은 부모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경 써주는 것을 싫어한다.

-최고의 기도가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일명 예수 기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좀 더 짧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이다.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자신의 지혜 없음을, 자신의 능력 없음을, 자신의 볼품 없음을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자랑한 것이 있다.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자랑거리는 없다.
우리는 이거 자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말은 거듭남을 말한다.
이건 과거 완료이다.
우리는 이미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들이다.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나 같은 걸 불러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교제를 말한다.
이건 현재 진행이다.
우리는 지금 주님과 교제 중인 사람들이다. “나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당신은 날마다 주님과 교제합니까?”

-나와 교제하고 나와 동행하는 주님을 자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