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19:체득한 복음을 체현하며 살아야 합니다.(고전 11:1-1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5-12 00:00
조회
992



고린도전서 강해 19

체득한 복음을 체현하며 살아야 합니다.(고전 11:1-16)

2019. 5. 12.





프롤로그

-지난 포항 부활절연합예배 때 강사로 오셨던 곽선희 목사님 책에서 본 내용이다.
오래 전 목사님이 미국에 부흥회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이야기다.
호텔도 많고, 유숙할 곳도 많은데, 굳이 어느 젊은 장로님 댁에 가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 장로님이 자동차도 하나 내주면서 “마음대로 타고 다니라”고 했다.
“그저 불편하게 생각지 말고 내 집이라 생각하라”고 했다.
냉장고도 따로 주면서 “여기서 무엇이든 꺼내어 먹으라”며, “그저 편안하게 손님도 초대하라”고 했다.

-목사님은 ‘숙소를 호텔에다 정하지 않고, 왜 여기다 했을까’ 여간 궁금했다.

-나중에 그 장로님이 이렇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제가
아버지를 본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참 신앙생활을 잘하셨습니다. 할아버지도 장로님이고, 아버지도 장로님인데,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교회봉사에 아주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았는데, 저는 아버지같이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아버지를 닮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손님 대접을 잘하셨습니다. 옛날에 어려울 때였지만, 그저 손님들 대접, 목회자 대접 하는 것을 가장 즐겁게 생각하고,
교회에 오는 손님은 전부 집에서 대접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그저 흉내라도 좀 내느라고 이러는 것이니, 나 좀
효자 만들어주십시오. 불편하시더라도요.”

-참 귀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속으로 ‘그래, 내가 당신 효자 만들어주지’ 하고는, 그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참 좋았었다고 회고했다.

-자기를 본받고 싶어 하는 아들 장로를 둔, 그 아버지 장로님이 여간 부럽다.
못난 아비로서 자식들 앞에서, 더 잘 살아야겠다는 부담이 든다.

-바울처럼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말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본래 “본받는 자"가 있다면, “본을 보이는 자"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본받는 자였다.
바울에게 본을 보이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본을 보이는 자가 누구였는가?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본을 보이는 자인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되었다.

-자기에게 본이 있다는 게 좋은 것이다.
자기 삶에 본보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
본이 있으니, 보고 흉내라도 내면 된다.
꾸준히 흉내를 내다보면 그것이 내 것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꾸준히’다.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흉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이른바 ‘체득(體得)’이라고 한다.

-체득이란 몸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체득이야말로 배움의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체득이 몸에 담아내는 것이라면, ‘체현(體現)’은 몸에 담고 있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몸에 담고만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몸에 담고 있는 것을 풀어내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체득하셨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체현하셨다.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체현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지방에서 체현해야만 했다.

-그건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체득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을 체득하기 위해서다.
복음을 체득했으면, 체현해야 한다.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볼 수도 없다.
대신 그들은 우리를 본다.
그들은 예수 믿는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자 한다.
그게 복음을 체득한 우리가 복음을 체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복음을 체득한 사람이 바로 ‘복음인’이다.
복음인은 ‘자기 복음화’가 된 사람이다.
자기 복음화란 말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 ‘민족복음화’는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 복음화가 먼저다.
자기 복음화가 되지 않고, 어떻게 세계복음화, 민족복음화가 가능하겠는가?

-복음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복음의 증인’이 된다.
체득이 되면, 자연스럽게 체현이 되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체현이 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복음을 체득했다고 보기 어렵다.

-여러분은 복음을 체득했는가?
여러분은 스스로를 복음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솔직하게 자기 복음화가 된 거 같은가?

-그렇다면 이제 체현하기 바란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바란다.
세계복음화 민족복음화에 헌신하기 바란다.

-바울은 본받는 것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다.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바울이 말한 본받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기억하고”

-기억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진다.
그뿐인가? 사랑하면 그 사람을 본받고 싶어진다.

-본받는다는 말은 닮는다는 말이다.
사랑하면 닮아간다.
닮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닮게 되어 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닮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하고 존경하면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무의식적인 습관까지 모방하고 싶어진다.
모방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닮아간다.

-바울이 말한 본받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바울이 그들에게 전해준 것이 무엇인가?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복음을 전해줬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복음”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설교자가 어려운 것은, 설교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지식만 잘 전달한다고, 훌륭한 설교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학원 강사는, 가르치는 실력으로만 평가 받는다.
인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고결하고 고상한 삶을 살아야, 실력 있는 강사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바울 안에 복음이 녹아 있었다.
바울의 인격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흐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본받는 것이 무엇인가?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여기서 전통을 ‘교리’로 볼 수 있다.
교리가 성경 자체는 아니다.
교리는 성경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교리의 내용을 보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교회’, ‘성도의 교제’, ‘죄 사함’, ‘몸의 부활과 영생’이다.
즉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이다.

-초대교회의 신조에는, ‘사도신경’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A.D. 381년)’과 ‘아타나시우스 신경 (A.D. 500년경)’이 대표적이다.

-종교개혁 시 신앙고백서 중 대표적인 것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년)’이다.

-개혁(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 중의 대표적인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및 ‘대.소요리문답 (1647년)’이다.

-물론 우리교회가 속한 통합 교단도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갖고 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년)’이다.

-또한 전통을 ‘예배 모범’으로 볼 수도 있다.
이방인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고, 맨 먼저 부딪히는 것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이다.
예배 모범이 없다면, 우상에게 드리던 방식으로 예배할 거 아닌가?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드리는 소 잡고 양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더 이상 희생제사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교단 「헌법」에도 보면 <예배와 예식>이 있다.
그 부분에 보면 예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예배 예식서>라는 제법 두꺼운 책이 있다.
우리교단 목사님들은, 누구나 이 책을 참고하여 예배와 예식을 진행한다.

-문제는 같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학교와 장년들의 예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통합하여 드리는 예배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교회 규모가 크지 않아, 한 번에 수용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드리는 것이 좋을 거 같다.
함께 예배해야 들은 말씀이 같고, 같은 말씀을 들어야 같이 나눌 수 있어서다.

-이어서 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말하고 있다.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와 여자 얘기가 나온다고 부부를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 안에서의 영적 질서를 말한다.
세 단계의 질서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믿음이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질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부자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굳이 이처럼 영적 질서를 강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지나치게 자유를 강조하다보니, 설치는 여자들로 인해 교회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열악했다.
그게 바울과 불과 몇 십 년 차이 안 난다.
그런데 복음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급격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혼란을 동반한다.
아무리 옳은 방향이라도, 급변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바울은 교회의 안정, 더 나아가 사회의 안정을 원했다.
복음 안에서 점진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했다.
그래야 선교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선교적 관점과 목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바울은 예배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를 언급한다.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장소를 교회로 본다면, 기도나 예언이 공예배가 된다.
그렇게 보는 것이 무난할 거 같다.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예속’의 의미를 띈다.
예전 우리나라에도 ‘너울’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시대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착용하던 가리개가 바로 ‘너울’이다.

-이슬람 여성들은 오늘날도 의복에 제한을 받는다.
부르카(Burqa)는 눈을 포함한 몸 전체를 가리는 옷을 말한다.
눈 부위는 얇은 천이나 망사로 처리하여 앞을 볼 수 있도록 하고, 간혹 장갑까지 착용하기도 한다.
니캅(Niqab)은 히잡에 가리개를 덧붙여 눈 부분만 드러내고, 몸 전체를 가리는 옷을 말한다.
차도르(Chador)는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를 가리는 넓고 검은 색의 옷을 가리킨다.
히잡은 얼굴만 드러내는 두건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너울이나, 이슬람의 전통의상이 의미하는 바가 ‘예속’이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식 때 신부가 쓰는 면사포도 의미가 다르지 않다.
‘나는 당신의 여자다’라는 의미다.
‘나는 당신이란 남자에게 속해 있다’는 의미다.
‘나는 당신이란 남자 외에 다른 남자에게는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미다.

-가톨릭 미사에 가보면, 여성들이 흰 수건을 쓰고 있음을 본다.
세례를 받은 여성 신자들이 머리에 쓰는 흰 수건을 가리켜 미사포(Veil)라고 한다.
미사포를 쓰는 것도, 내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예속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사포를 써서 그리스도께 확실히 예속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상징적으로라도 그런 생각으로 미사포를 쓴다면 괜찮을 거 같다.

-바울 당시 여성들이 깎거나 밀어 짧은 머리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첫 번째는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
두 번째는 조신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참고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경우는 어쩔 수 없다.
두 번째 경우에 속한다면 여자의 수치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수치다.
그 수치를 머리에 쓰는 것으로 가리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가려야 할 판인데, 가리라고 하니 감사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가리고 싶어도 가리지 못했다.
마땅히 가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의 수치를 무엇으로 가린다고, 하나님이 못 보시겠는가?
그런데 주님의 옷자락으로,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셨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용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수건을 여성 차별로만 볼 필요가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건 은혜의 수건이다.
알고 보면, 그건 내 수치를 가려주는 수건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동딸과 외롭게 사는 한 여인이 있었다.
한번은 사랑하는 딸이 가출하여, 어느 도시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는 딸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전단지를 뿌렸다.
그런데 전단지에 딸의 사진은 없었다.

-전단지에는 엄마 자신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딸아, 어머니가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엄마는 전단지에 딸의 사진을 그려 넣으면 얼굴이 알려지게 되어, 딸이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 대신에 자신의 사진을 넣은 것이다.

-딸은 가출한 지, 며칠 만에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
"엄마의 깊은 사랑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어요. 저를 위해 대신 수치를 당하신 그 사랑에 죄송하고 감사드려요."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길갈이 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갈이 되셔서, 과거 우리의 모든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

-바울은 머리에 수건을, 여자는 써야 하고, 남자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창조의 질서에서 찾고 있다.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자의 기원이 남자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창세기 2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셨다.
그렇다고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성을 말하거나, 남성우위론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텍스트인 말씀을 받는, 콘텍스트인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그랬던 거 같다.

-왜 그렇지 않는가?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좀 열정을 가져라” 독려한다.
열정이 과한 사람에게는 “좀 냉정해져라” 주문한다.
말씀이 중요하지만, 말씀을 받는 대상도 꽤 중요하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여자들이, 어지간히 치맛바람을 일으켰나 보다.
오죽했으면 창세기 창조기사를 들어, 영적 질서를 권면했겠나 싶다.

-그렇게 권면하고도,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보충 설명도 잊지 않는다.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여자가 예배 때 수건을 써야 하는 것과는 별도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못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남녀의 인격의 동등이고, 주님께 복종해야 하는 측면에서 동등이다.

-남녀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최초의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지만, 그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났다.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
남녀의 창조된 순서는 다르고, 창조된 재질도 다르지만, 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남자든 여자든 다 하나님께 예속된 피조물이요,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피조물인 것이다.

-바울 당시는 수건을 쓰고 기도하느냐, 수건을 벗고 기도하느냐가, 상당한 논쟁거리였다.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건을 쓰고 기도하면 어떻고, 수건을 벗고 기도하면 어떤가?
무릎 꿇고 기도하면 어떻고, 양반자세로 기도하면 어떤가?
일어서서 기도하면 어떻고, 엎드려서 기도하면 어떤가?
기도실에서 기도하면 어떻고, 침대에서 기도하면 어떤가?
어떻게든 기도하면 된다.
아니 어떻게든 기도해야 한다.

-지금 시대는 그리스도인이 기도 자체를 잘 안 한다.
목사님들끼리 모이면, 요즘 교인들이 새벽기도 좀 나오냐고 묻는다.
그럼 얼마 정도 나온다고 한다.
공통적인 답변은 “너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말씀과 기도다.
우리교회는 올해부터 수요예배를 시작했다.
작년까지는 수요일에 셀모임을 가졌는데, 셀모임에서 말씀 나눔만 떼어서 주일예배 후에 하고, 수요일엔 어성경을 공부한다.
처음엔 초보강사라서 어설프고 버벅거렸는데, 이제 좀 적응이 됐다.
어성경을 통해 성경이 읽어지면, 말씀이 일하실 것을 믿는다.

-문제는 말씀이란 한쪽 날개만으로는, 더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다른 쪽 날개도 함께 날개짓을 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 교우들이 심야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다.
문제를 당하고 난 후에 급하게 기도하기보다는, 미리 기도를 저축해두는 지혜자가 되기를 바란다.

-평소 규칙적인 기도를 하면 영적인 근육이 생긴다.
안 하던 기도를 하면, 안 쓰던 근육을 쓰면 아프듯, 좀 힘들 수 있다.
그 아픔은 좋은 것이다.
그 고통은 필요한 것이다.
기도하다가 몸살도 좀 나보고 그래야 한다.

-우리가 체득한 복음을, 예배로 전도로 체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