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18: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고전 10:14-3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4-07 00:00
조회
858



고린도전서 강해 18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고전 10:14-33)
2019. 4. 7.

프롤로그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물론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기본은 예배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중의 기본은 예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
예배의 실패자는 신앙의 실패자가 된다.
아무리 성경 박사여도 예배에 실패하면 신앙의 실패자다.
하루 10시간씩 기도해도 예배에 실패하면 신앙의 실패자다.
매주 한 명씩 전도를 해도 예배에 실패하면 신앙의 실패자다.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 출석을 잘 해야 한다.
예배에 듬성듬성 참석하면서 예배에 성공할 방법은 없다.

-예배에 출석만 한다고 예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준비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 곧 은혜받을 준비,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그렇다고 받을 준비만 하면 안 된다.
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
곧 기도, 찬양, 봉헌할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예배에 집중한다.
하지만 준비 없이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예배가 산만하다.
마음이 나눠진다.
마음이 분요해진다.
이걸 가톨릭에서는 분심이라고 한다.
집중은 정신력만 갖고는 안 된다.
육체가 피곤하면 예배에 집중하기 어렵다.

-결국 예배의 성공여부는 상당부분 토요일 저녁에 결정된다.
피곤한 육체로 예배에 참석하면, 졸음과 싸우다 어느덧 예배가 끝난다.
그럼 예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시간을 버티는 것이 되고 만다.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는데,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예배를 받으시는 그분, 곧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다.
물론 혼자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주일예배는 공동체로 예배한다.
한꿈교회 믿음의 가족이 함께 예배한다.
그렇다고 해도 예배 집중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의 대상이 올바르지 않으면 우상숭배가 된다.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구약의 이스라엘이 잘못된 예배의 대상을 향해 얼마나 열심이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육신의 혈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그토록 열을 올렸다.
그러다가 결국 망했다.
예루살렘 성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너졌다.

-그랬으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이방인들과 혼인을 통해 우상숭배를 끊지 못했다.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자기라는 우상, 이기심이라는 우상 말이다.
사실 이게 무서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해, 자기 조상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상숭배와 함께 주의를 시킨 것이 있다.
그게 음행과 주를 시험함과 원망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우상숭배와 무관하지 않다.
바울은 조상들의 예를 들며, 그 일을 본보기로 삼자고 권한다.

-다른 사람이 망하는 것을 보며 교훈을 얻는 것이 지혜다.
민족의 아픈 흑역사를 보며 교훈을 얻는 것이 지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망하는 것을 본받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그게 애가 탄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 중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는 일인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의 간증이다.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다.
수많은 흑인들을 치료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다.
도무지 무슨 병인지 병명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큰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역시 병명을 찾지 못 하였다.
아내는 점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사명 속에 죽겠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 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유심히 보고 물었다.
형형색색의 줄로 꼰 팔찌였는데, “어디에서 난 거냐”고 물었다.

병원을 세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다.
그는 그 게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 믿는 이들을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주었다.
그리고 늘 마술을 걸어 왔던 거였다.
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녀의 병은 거짓말처럼 나았다.

-고린도는 철학의 도시 아덴과 멀지 않다.
아덴에 인접한 고린도 역시, 지혜라면 어떤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다.

-바울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지혜를 인정해주고 있다.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그러니 바울의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했다.
사실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 지혜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이 지혜자일 수 없다.
공부는 많이 했어도, 지혜자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
마음의 귀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 공부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지혜자여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바울은 성만찬에 대한 언급을 한다.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복되게 여긴다.
성찬을 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우리를 성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다.
사실 아무나 성찬에 초대받는 게 아니다.
교인이라고 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찬에 참여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
혹은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를 해야 가능하다.

-교회 내에서 내리는 최고의 벌이 수찬정지이다.
교회는 나오되, 성찬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찬정지는 교회 밖으로 내쫓는 출교 다음으로 큰 벌인 것이다.

-우리교회는 성찬식을 매월 둘째 주에 한다.
가톨릭이나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처럼 매주 행하지는 못하지만, 장로교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유대인들은 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이 있었다.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이었다.
축복의 잔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일반적인 성만찬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했다.
아마 그리스도의 보혈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이 왜 중요한가?
이는 제사에서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와 같다.
속죄의 의미를 가진 제사는 모두 피흘림이 있다.
즉 희생제사였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명백하게 알려준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성만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에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추가하고 있다.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만찬 안에서 한 떡을 뗀다.
우리는 한 떡을 떼어 먹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싸인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 식구임을 표식하는 것이다.

-식구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란 뜻이다.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끼니만 같이 해서는 안 된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예배 참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교회비전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진정한 믿음의 식구인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과 구약의 화목제를 연관시키고 있다.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제단 위에 태워서 드린다.
남은 고기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 뜰에서 나누어 먹었다.
제물은 제단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것이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여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교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상이 특별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상이든 우상의 제물이든 거짓이다.
우상에게 기도하면 혹 역사가 일어나곤 한다.
그렇다고 우상이 살아 있느냐, 우상에게 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우상을 앞세운 마귀가 배후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마귀의 존재를 모르면, 우상에게 속을 수밖에 없다.

-바울이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비그리스도인들은 제사를 통해서 귀신과 교제한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에서는 그게 확실히 정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섞이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확실한 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두 주인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다.
잔을 받는 것은 그에게 소속되었다는 의미이다.
우상의 이름으로 잔을 드는 것은, 복의 근원이 우상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잔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잔을 드는 것은, 복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겸하는 것이 혼합주의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이유가 혼합주의다.
그들은 우상도 섬기도 하나님도 섬겼다.
그들은 바알 하나님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도 섬겼다.
그게 바로 혼합주의인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도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혼합주의다.
혼합주의는 잘 표도 안 난다.
주일이면 멀쩡히 교회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 올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지도 않는다.
하나님께 자기의 무게중심을 온전히 맡기지는 않는다.
만일을 모르니까, 언제라도 한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신앙생할한다.

-자기 백성이 그런 모습을 하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보고 계실 수 없다.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노하신다.
사람이 주를 노여워하게 해서 좋을 게 없다.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게 해서 좋을 게 없다.
우리는 주님보다 강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힘이 셀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을 이길 수 없다.
주님을 이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주님을 이겨먹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심심찮게 있다.
주의 노여움을 사고 싶어서 그런다.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한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내 모든 행동의 영역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내 몸에 유익이 없을 수도 있다.
내 양심에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신앙에 유익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를 주장하기 전에, 이게 정말 내게 유익한가를 물어야 한다.

-나에게 무익하고 도리어 나에게 해악이 된다면, 자유를 쓸 필요가 없다.
그런 줄 알고도 자유를 강행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이기(利己)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신령 상 인격 상 유익을 위해서, 여러분의 자유를 행사하라.
그게 진짜 지혜다.

-다음은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덕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 도덕적 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

2.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타인 없이 자신밖에 없다면 덕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있어서 덕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자유를 행사했을 때, 먼저는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를 따져야 하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은 늘 손해만 본다...그러면 그는 실속 없는 사람이다.
그런 배우자와 함께 사는 사람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끔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
큰 손해까지는 아니라도, 유익을 덜 볼 생각은 해야 한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덕이 안되고, 더 나아가 손해가 된다면, 그건 바른 자유를 행한 것이 아니다.

-덕을 세우려면 타인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덕을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옛날 초가 지붕이 낮아서, 지붕 위에 호박도 있고 박도 있었다.
어느 집에 여덟 살 꼬마 신랑과 열여섯 살 신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이 다 바깥에 일 보러 나가고, 신랑 신부만 남아 있었다.
‘이때다’ 싶어 꼬마 신랑이 신부보고 ‘업어달라’ ‘누룽지 끓여달라’, 이런저런 어리광을 피워댔다.
처음에는 설득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하도 귀찮게 굴어서, 꼬마 신랑을 지붕 위에 올려버렸다.
놀란 신랑은 내려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어른들이 돌아오면서, 이 모습을 보게 되는데... 며느리는 ‘큰일 났다’ 싶었다.
하늘 같은 신랑을 지붕 위에 올려놨으니... 앞이 노랬다.
어른들이 지붕 위에 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얘야, 너 왜 거기 올라가 있니?” 했다.

-그 때 신랑이 뭐라고 대답했을 거 같은가?
“어머니, 큰 호박을 딸까요? 작은 호박을 딸까요?”

-그날 밤 잠자기 전에 신랑이 신부한테 말했다.
“내가 입만 뻥끗했으면 너는 죽었다.”

-이게 지혜다.
이게 덕을 세우는 것이다.
꼬마 신랑은 어른들에게 고자질할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를 골탕 먹인 신부를 이참에 혼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꼬마 신랑은 신부에게 덕을 세우는 편을 택했다.
자유를 통해 자기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음식 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음식 자체가 선하고 악하고가 없다.
그냥 있는대로 먹으면 된다.
몸에 나쁘지 않다면 먹으면 된다.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먹는 것은 주님이 만드신 땅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먹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불신자의 초대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종교가 다른 사람이 초대를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서 기도하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내 맘대로 누려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란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자유에는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로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내 자유로 타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바른 자유행사일 것이다.
주어진 자유를 바로 행사할 때 자유의 가치가 높아진다.
나에게는 이런 자유가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가치있게 보이던가?
아니면 자기에게 있는 자유를 타인의 유익을 위해 제한하는 사람이 가치있게 보이던가?
내가 소유한 것을 어떻게든 가치있게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자유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부터 배우면 좋겠다.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야 자유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다.
우리는 먹을 자유, 마실 자유, 무엇을 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기쁘게 안 한다.
건강식에 관심을 갖는 것 좋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돼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생각보다 추상적이지 않다.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먼저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 자유가,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안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산다.

-다음은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영혼에 관심을 둔다.
그 타인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다.
타인의 영혼을 위해주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주세요” 하면서, 타인의 영혼에 무관심하고 도리어 해를 준다면 이율배반적인 신앙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남은 삶을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