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15:복음은 권리 이상의 것입니다.(고전 9:1-1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3-24 00:00
조회
1035



고린도전서 강해 15
복음은 권리 이상의 것입니다.(고전 9:1-14)
2019. 3. 17.

프롤로그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자기 이름을 건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권리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기독교에서 권리 포기란 말을 쓰곤 한다.
권리포기란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김원호 장로는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생명 중에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자기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권은 평생 바울을 괴롭힌 일종의 딜레마 같은 거였다.
그래서 바울은 늘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유독 강조하곤 했다.

-본래 사도란 네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①첫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제자로 부르셨어야 사도이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고 친히 부르신 자가 제자이다.

②둘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을 함께 한 자여야 사도이다.
예수님이랑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우고 함께 다니고, 그래야 사도다.

③셋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사도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라야 사도가 될 수 있다.

④넷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불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사도이다.
주로 이적을 행하고 표적이 따른 것으로 증명됐다.

-그런데 바울은 이 네 가지를 다는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그는 육신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3년 동안을 함께 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바울이 사도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바울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조차, 관계가 좋을 때는 “바울 사도님” 하지만, 틀어지면 바울의 사도 자격이 어쩌고 운운했다.
문제는 항상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목회 자체가 안 된다.
어르고 달래고만 하면, 시간이 지나도 신앙의 성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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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의 두 가지 신분을 말하고 있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하나는 자유인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다.
자유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인이다.
사도,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다.

-바울은 예전에 유대교, 유대주의에 매여 있었다.
또한 성전과 안식일, 할례 같은 율법에 매여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한 자유인이 되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일뿐더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사도가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때문에, 이런 권세가 주어졌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주신 말씀과 흡사하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주신 영적 권세다.
그래서 사도는 어디를 가도 영접을 받았다.
그를 사도로 보내신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을 권세가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가 대접받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된다면, 바울의 모든 사역이 부정된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면 안 되었다.
그들이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바울 때문에 지옥 갈 것을 천국 가게 되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목회하다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한테 그러면 안 돼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로 살면서 그런 사람을 몇 명 만나봤다.
바울이 딱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섭섭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자신의 사역이 통째로 부정되는 것 같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보통 일인가?
죽을힘을 다해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단에게 통째로 넘어가는 거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최고의 적은 바울이었다.
바울만큼 유대교를 위협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바울 한 사람만 쓰러뜨리면 되었다.
그러면 그가 개척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바울에게는 또 하나의 적이 있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으나, 유대교를 완전히 버리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다.
일명 할례파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탄은 목회자만 흔들면 된다.
담임 목회자만 무너뜨리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손쉽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위해 방패기도를 쉼 없이 올려야 한다.

-이 예화를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메가처치 리서치 센터(Mega-Church Reseach Center)의 소장인 존 번(John Vaughan) 목사님이, 어느 날 뉴잉글랜드 지역의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그의 곁에는 어떤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머리를 숙이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번 목사님이 그가 기독교인줄 알고 물었다.
“혹시 기독교인이세요?”

-그 청년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뇨, 나는 사탄 숭배자입니다.”

-목사님은 기도 내용이 궁금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 무엇을 기도하세요?”

-그러자 그 청년의 대답이 이랬다.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목사들이 타락하고, 그 가족들이 타락하게 해달라고 사탄에게 기도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를, 피터 와그너는 자기 책 [방패기도]에서 몇 가지로 정리했다.

①목회자도 연약한 인간이다.

②목회자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이 있다.

③목회자는 더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④목회자는 영적전쟁의 주요 표적이다.

⑤목회자가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

⑥목회자는 더욱 눈에 잘 뜨인다.

-평범한 사람이면서 목회자로 사역하니, 기도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의 절반을 교회를 위해서 하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절반을 목회자를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이 사도로서 몇 가지 권리가 있다고 변명했다.

-첫째, 바울은 먹고 마실 권리가 있었다.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목회자로서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노예도 먹을 것은 준다.
일꾼도 먹을 것을 주고 일을 시킨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할 때나 위임을 할 때,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결의를 한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역을 하는 동안, 그 당연한 권리조차 행사하지 않았다.
고린도교회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봐라, 바울이 사도라면 먹고 마실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나” 라고 되레 공격했다.

-둘째, 바울은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다.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게바인 베드로에게는 확실하게 아내가 있었다.
나중에 장모가 죽고 나서는, 사역할 때 아내를 데리고 다녔던 모양이다.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라고 한 것을 볼 때, 다른 사도들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도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바울이 혼자라는 것이다.
독신 사역자인데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를 말하니 이상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 나설 때는 독신이었지만, 그 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상처를 하고 한 후에는, 혼자 살았지 않겠나 추정한다.
다른 사도들이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는 말을 꺼낸 것은, 결혼한 사역자는 교회로부터 식솔들까지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들은 “봐라 베드로는 사도니까 아내를 동반하고 다니는데, 바울은 사도가 아니니까 혼자 다닌다” 라고 되레 공격했다.

-셋째, 바울은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있었다.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여기서 일은 생계를 위한 일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 가지씩 익힌다고 한다.
아마 바울은 그 때 텐트 만드는 기술을 익혔던 모양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생계 유지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바울은 훗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롬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가장 힘들 때 함께 해준 그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내가 올네이션교회를 개척했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을 평생 잊지 못할 거 같다.
그 중 상당수는 교회를 떠났지만, 그래도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 경조사가 생겼다고 연락이 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것이다.
목회자로서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은혜 때문이다.

-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바울이 항상 자비량 선교만 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상황에 따라서 전도에만 전념할 때도 있었고, 고린도에서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때가 있었다.

-지난 2월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토요일에, 포항믿음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특강을 했다.
중고등부를 대상으로 워낙 오랜 만에 해서 그랬는지 거의 망쳤다.
전날 잠을 거의 못자서인지 조는데, 그 앞에 나는 무능한 강사였다.
‘내가 이러려고 강사로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17명의 아이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면 후회 없겠다.

-나는 그들에게 굳이 목사가 되지 말라고 했다.
굳이 선교사가 되려고 하지도 말라고 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좋은 평신도가 되라고 했다.
라스트 비전으로 선교를 제시했다.
평신도로 사역하다가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 자비량 선교사로 나가라고 했다.
자비량 선교사로 나가서,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라고 했다.

-열심히 직장 생활하여 노후 준비를 완벽하게 한 후에, 그곳 선교지로 살러 가는 것이다.
거창하게 선교한다고 선교비 모금하고 할 필요 없이,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리 교단 호남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차종순 교수 말처럼, “선교란 선교지에 가서 사는 것”이다.
다녀오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 묻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교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비량 사역을 했는데, 그들은 달리 생각했다.
헬라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을 천시한 까닭이다.
바울이 자비량 사역하는 것을 보고, “봐라 바울이 사도가 아니니까 육체 노동을 하면서 사역한다” 라고 되레 공격했다.

-넷째, 바울은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바울은 자기 역시 일에 보수가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다.
복음의 역군으로서, 복음의 농부로서, 복음의 목자로서 사역을 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는 것은 결코 세속적인 게 아니다.
신령한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받는 것이, 세속적인 게 될 수 없다.

-올해부터 목회자도 세금을 낸다.
어떤 분이 자기는 세금 낼 것도 없다며 웃더라...
나는 “사례를 많이 받아서 세금 많이 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웃었다.

-돈 많이 벌어서 세금 많이 내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은, 정당하게 돈 벌어 정당하게 세금 내는 것이다.
세금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내는 십일조고,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이다.
이게 주님의 세금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 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직장이 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사업장이 형통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물질을 구하는 것이 물질주의가 아니다.
물질을 구하는 것이 기복주의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물질을 먼저 구해서 문제다.
열심히 노동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물질의 복을 구하는 게 문제다.



“정당하게 돈 벌어 정당하게 세금내자!”

-우리 어릴 때를 떠올리면,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입에 망을 씌웠다.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렌스키에 의하면, 다른 이방 지역에서도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웠다고 한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그걸 금지를 시켰다.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소가 일할 동안에는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꾼들 뿐 아니라, 일하는 소까지도 먹거리를 챙겨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노동자 노임가지고 장난 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밥줄 가지고 장난치면, 하나님께 혼날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같이 잘 살아야 한다.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사용자와 노동자가 함께 잘 돼야 한다.
하나님은 사용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밭주인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밭가는 자와 곡식 떠는 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육적인 것을 거두는 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바울은 말씀 사역자를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로 묘사했다.
그로 인해 받는 사례를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했다.
신령한 것을 뿌리는 자에게 육적인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육적인 것을 천시하면 안 된다.
우리가 주중에 일터에서 하는 일이, 육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한 돈을 벌어 정당한 세금을 낼 수 있다.
목회자는 그렇게 벌어서 헌금한 깨끗한 돈을 사례비로 받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돈이 있다.

신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얼마나 헌금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벌어서 헌금하느냐가, 더 중요함을 깨우쳐주는 말씀이다.

-바울이 지금까지 사도의 권리를 몇 가지로 말했다.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권리, 일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를 스스로 제한한 것을 밝히고 있다.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열심히 사역하면, 돈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사역하지 않으면, 돈과 상관없으니까 그런다고 할 수 있다.
이래도 비판을 받고 저래도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권리를 포기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제 손으로 일하여 먹고살면서, 자유로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택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비량 선교였다.

-그럼에도 사역자의 생계에 대해, 구약을 들어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은, 기업을 분배받지 않았다.
생업이 없으니, 마땅히 먹고 살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린 제물 중의 일부를 제사장 몫이 되게 하셔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구약의 예를 든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복음 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 권리를 확신했지만, 그러나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았다.
얼마든지 권리는 주장할 수 있었지만, 복음 전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스스로 권리를 제한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속도 모르고 사도권을 공격했다.
이게 바울의 아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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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앞에서는 권리 포기를 선언하기 바란다.
사람들 앞에서는 주장할 권리와 제한할 권리를 분별하기 바란다.



“복음은 권리 이상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