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14: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합니다.(고전 8:1-1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3-10 00:00
조회
887



고린도전서 강해 14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합니다.(고전 8:1-13)
2019. 3. 10.

프롤로그

-2019. 01. 23. 한국경제신문 생활/문화면에 실린 기사다.

-시댁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으로 차별받는다는, 며느리 A씨의 토로가 눈길을 끌고 있다.
결혼한 지 석 달째인 A씨는, 결혼 직후 남편으로부터 "우리 집은 매주 주말마다 다 함께 모여서 식사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왜 결혼 전 미리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에, 남편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매주 모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아닌, 음식 차별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A씨는 지난 주말 시댁에서 백숙을 먹다가, 또다시 설움을 느꼈다.
"닭이 두 마리였는데, 시어머니가 다리 두 개는 남편과 시아버지 앞접시에 급하게 덜어두고, 날개는 두 개씩 시어머니 본인과 아가씨 접시에 올려뒀어요. 저는 마지막에 가슴살 찢어주시더라고요."

-보다 못한 A씨가 "어머니, 덜어주지 마시고 알아서 먹게 하세요. 저만 맨날 가슴살 먹어요" 하자, 시어머니는 "뭐 어때. 가족끼리..."라고 답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런 패턴에 섭섭해진 A씨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이제 시댁 식구들 식사에는 시댁 분들끼리 모여서 먹고, 나는 식사 자리에서 빼주세요" 라고 격하게 반응했다.

-남편은 "미안하다. 내가 편한 것만 생각하게 네가 불편한 건 생각 못 했다"라며 당황해했지만, 시어머니는 "나는 하늘에 맹세코 차별한 적 없다. 나를 뭘로 보는 거냐"라며 사과하라고 역정을 내셨다.

-A씨는 "내가 어떤 부분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사기결혼 당한 기분이다"라고까지 했다.

-밥상 시인 오인태는 이렇게 말했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삶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같이하는, 즉 공동체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의 구성원을 식구(食口)라 부르는 것이겠죠. 요즘은 식구끼리도 밥상을 마주하기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방증이지요.”

-어찌 보면 교회는 음식 공동체다.
예배를 통해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다.
한 설교자가 차린 영의 양식을 함께 먹는다.
그리고 예배 후 셀별로 모여 말씀 나눔을 통해 영의 양식을 나눈다.
그런데 영의 양식을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육의 양식으로 공동식사를 한다.
방금 전 영의 양식을 나눴던 믿음의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육의 양식을 함께 먹는다.
이게 교회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먹는 것이다.
삶에서 먹는 재미가 빠진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성경은 인류의 불행이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단히 고상한 문제가 아니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열매를 먹은 데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것도 보라.
고상한 문제로 시험받으신 것이 아니다.
시험 내용이 먹는 문제였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먹는 문제로 영생의 기회를 놓치고, 파멸로 떨어진 인류에게 해결책이 무엇이었는가?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먹는 것을 통해서였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음식문제에 대해서다.
당시 시장에 나온 고기들은, 대부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면, 제물들을 사제들이 처리를 한다.
그런데 그 양이 하도 많다 보니까, 미처 다 처분을 하지 못하면,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물론 모든 고기가 우상 제의에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가, 우상 제의에 사용했던 고기인지, 아닌 고기인지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로 고린도교회가 어려움을 겪곤 했다.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가, 히브리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 간의 뚜렷한 입장 차가 존재했고, 서로의 주장이 과해 다툼이 일기도 했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존중과 배려가 있는데, 신앙이나 진리 문제로 들어가면 그게 쉽지 않다.

-뭐든지 극단적인 게 문제다.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제의에 썼던 고기라면 오염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방인이었다가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설사 우상 제의에 썼다고 해도 아무 문제될 게 없다고 했다.
이게 너무 입장차가 커서,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조건 묻는 게 좋은 방법이다.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문의를 했다.
7장의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한 답글을 보면, 주의 명령과 자신의 의견을 구분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바울은 지식을 그리 긍정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지식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지식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이 문제다.
좀 안다고 아는 체하는 교만한 지식인이 문제다.

-본래 지식이란 파편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식은 지혜처럼 종합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부분만 아는 것이다.
박사도 그런 거 아닌가?
어떤 한 분야를 전공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박사들은, 자기 분야 외의 것에 대해서 물으면, ‘그건 내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한다.

-지식에 편견이 더해지면, 분쟁을 유발시킬 수 있다.
자기 지식만 옳다고 주장하니,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새로 어떤 분야를 개척하거나, 새로운 분야를 전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서를 통해서 지적인 지경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과 지적인 교류를 할 정도면 좋겠지만, 그 정도는 못해도 듣고 수긍할 정도는 돼야 한다.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과도 그래야 하는데, 같은 교회 안에서도 안 되니 문제다.
지식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자기가 들은 지식, 자기가 배운 지식, 자기가 경험한 지식만 줄기차게 주장한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실 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그런 면이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유대교가 전부인 줄 알았다.
자기가 어릴 때부터 배운 율법이 전부인 줄 알았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그림자이고, 예수가 실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데, 비싼 수강료를 지불했다.
하마터면 실명할 뻔했다.
아니 죽을 뻔했다.

-바울은 유대교 출신이다.
그래서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을 100% 수용할 수도 없다.
그럼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 문제는 이미 1차선교여행 후 예루살렘 총회에서 일단락지어진 문제다.
그런데 그 문제에 붙들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바울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온 사람들에게 답글을 써 보낸다.
지금은 서로 지식을 주장할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한다고...
고린도교회가 그렇지 않아도 양파, 대파, 쪽파, 실파로 인한 분쟁이 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종종 사회법으로 가지고 갔다.
음행과 결혼, 재혼, 독신 문제로 인해 복잡했다.
거기다 우상제물, 곧 음식 문제까지 겹친 것이다.
그게 다 지식과 관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의 불완전성을 말한다.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특히 신(神)지식은 더 그렇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만큼만 알 수 있다.
신구약 성경에서 계시하는 만큼만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점진적으로 알아간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자라 가라고 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다.
어제까지 안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이 다가 아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독이 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지식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인류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모든 지식을 두루 섭렵하여 만물박사가 되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른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어린 애들도 아는 천국과 지옥을,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도 그걸 모른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른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과 직결된 지식이다.
그러니 그게 최고의 지식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존재다.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이건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 대해 몰라도, 멀찍이서 흠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아는 만큼 할 수 있다.
깊이 알면 깊이 알수록,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가 3절 말씀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느니라”

-그런데 성경에는 이 말씀과 대조 되는 말씀이 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자기는 예수님을 안다고 “주여 주여” 하는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신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는가?
평생 교회 다녔는데, 심판대 앞에서 이런 일 당하면 큰일 난다.
자칭 잘 믿는 것은 소용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도록 믿는 게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우상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한 마디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우상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말을 듣지 못한다.
사람이 신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이 신이 될 수 없다.
물론 우상에 귀신이 붙을 수 있다.
우상에 악한 영이 붙어서 역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우상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악한 영이 역사할 때 사람들이 속는 것이다.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신으로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긴 하다.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하늘신 태양신 달신을 비롯하여, 땅에 별의 별 신들이 있다.
심지어 살아 있는 사람이, 신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단에서도 교주들이 실질적으로는 신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을 신앙하는 사람도 있고, UFO를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에서는 신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집집마다 섬기는 신이 다를 정도니, 아마 몇 십 만개는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우리가 믿는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그분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우리의 기원이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원이 아메바가 아니고, 우리의 기원이 원숭이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빚으신 걸작품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고백이 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런 고백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런 지식이 있으면, 절에 가도 속이 불편한 느낌이 없다.
굿을 하는 곳에 가도, 그냥 구경할만하다.
고사를 지내는 광경을 봐도, 그냥 봐줄만 하다.

-그런 지식이 없으면,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든다.
자칫 영적으로 눌릴 수 있다.
그런 쪽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 특별히 장이 나쁜 것도 아닌데, 다음날 설사를 한다.
지식이 부족해서 그렇다.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다.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이 고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다’ 이것도 지식이다.

-’이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다‘ 이것도 지식이다.
이건 선택의 문제이다.
전자를 선택하여 그것을 따를 수도 있고, 후자를 선택하여 그것을 따를 수도 있다.
이건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선택이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지식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나를 잡아맬 수 있다.
똑같은 우상 제의에 썼던 음식이라도, ‘이 고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다’는 지식으로 먹는 사람과, ‘이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다’는 지식으로 먹는 사람이 같을 수 없다.

-음식을 앞에 두고 절을 했어도, 음식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냥 음식일 뿐이다.
그런데도 먹는 사람의 지식에 따라, 양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한다는 점이다.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음식은 우리 신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믿음이 좋아지게 하는 음식은 애석하게도 없다.
요즘 건강보조식품이 많이 팔리는데, 믿음보조식품이란 건 없다.
기호식품이라고 별 다르지 않다.
술을 한 잔 한다고 신앙이 나빠지지도 않고, 담배를 끊었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음식은 음식일 뿐이고, 식품은 식품일 뿐이다.
자기 몸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되고, 건강에 해로우면 안 먹으면 된다.
자기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하니까,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음식 문제에 대해 자유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원칙이 있다.

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음식이 나오면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앞에 놓고 감사 기도할 수 있다면, 무슨 음식이든 먹어도 된다.

-문제는 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다.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분명히 나는 그 음식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내 신앙에 음식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직분자라면, 자기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원칙이 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똑같은 문제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험거리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시험거리가 안 될 수 있다.

-비행기를 타면 음료 서비스를 한다.
물은 물론이고, 커피도 나오고, 쥬스도 나오고, 와인도 나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와인이다.
장거리 비행에서 계속 깨어있을 수 없을 때, 와인 한 잔 하면 잠이 잘 온다.

-어떤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평소처럼 와인을 한 잔 했다.
그걸 이웃교회 교인이 본 것이다.
늘 경건한 목사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술 마시는 목사였던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서비스로 나왔고, 잠을 청하기 위해 와인 한 잔 했다고, 목사님의 경건성이 떨어지겠는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문제를 만들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반대로 와인을 안 마시면 어떤가?
안 마신다고 문제 될 게 있는가?
안 마신다고 경건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해야 할 이유가 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가 믿음이 약한 자인가 강한 자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자매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형제자매를 실족시키는 것은, 그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우리는 사람 눈치 보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바울의 고백이 답이다.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지식을 쌓아야 한다.
성경 지식만 쌓지 말고, 사랑으로 덕을 쌓아야 한다.
자기를 주장하는 지식이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우리의 남은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