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3: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마 5:38-4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1063
마태복음 강해 13
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마 5:38-48)
2016. 7. 24.


프롤로그

-2016년 6월 7일 KBS 아침마당에 “교회 나오지 말라는 괴짜 목사”라는 타이틀로 조정민 목사가 나왔다.
조정민 목사는 MBC 앵커 출신이다.
25년간 기자생활과 앵커로 활약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가 좀 독특하다.
아내는 모태신앙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기는 불교 모태신앙이다.
아내를 교회에 못 가게 13년간 박해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를 잡으러 갔다가, 자기가 예수님께 잡혔다.

-새벽마다 교회에 간다는 아내가 다른데 가는 것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확인 차 뒤 따라 갔다.
교회에 가 보니 시끄러웠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방언기도 때문이었다.
방언기도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라, 가짜구나 생각하고 집 앞에 이런 이단 교회가 있다니 생각하고, 카메라 출동으로 고발하려고 일주일간 취재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나흘 만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길을 바꿔, 진짜 알아보자, 아내가 그토록 빠져있는 신앙이 뭔지, 기자로서 취재하는 느낌으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사흘만의 경험이란, 기자가 원래 잘 울지 않는데, 찬송가를 듣는 순간 마음이 풀리며 울기 시작했다.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마음이 풀리고 울면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배우고 싶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바로 성경을 5독했다.
읽을수록 성경은 너무나 옳았다.
기독교는 너무나 옳은 진리였다.
그런데 교회는 옳지 않은 일이 많으며, 신자들도 목회자들도 옳지 않은 일이 많음을 보면서, 더 확실하게 배우고 알기 위하여,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47살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여, 50세가 넘어서 미국에 있는 고든코넬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것이다.
-25년간 뉴스를 진행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졌다.
기자의 시각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봐야 했다.
미담으로는 뉴스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다.
좀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를 모를 때는 괜찮았지만, 예수를 알고부터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목사가 된 것이다.
목사가 되어 생명의 뉴스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세상이 온통 모순되고 부조리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살만한 세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는가?
아니다. 세상은 그대로다.
여전히 세상은 모순되기도 하고 부조리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살만한 세상으로 보인다.
그의 시각이 바뀌어서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니까,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보인다.
더 이상 전에 자기가 기자로 있을 때의 세상이 아니다.

-너무 세상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건 악한 사람들 좋아할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세상에 분노한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으면 분노해야 한다.
불의한 세상에 대항하고 항거하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다.
사명과 열정과 은사가 있어, 그렇게 하는 사람을 존중한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면이 있다.

-요즘 증오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 12일 미룩 플로리다주 올랜드에서 오마르 마틴이라는 젊은이가, 총기를 난사하여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가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이며, IS에 충성을 맹세한 바 있고, 동성애자를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그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지만, 뭉뚱그려서 한 마디로 증오범죄라고 할 수 있다.
증오범죄란 특정 인종이나 민족, 특정 종교나 성의 사람, 특정 계급이나 지역의 사람, 특정 이데올로기나 신념의 소유자, 동성애, 장애인, 노인 등을 향한 혐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언뜻 들으면 나와 상관없을 거 같다.
그러나 누구나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내가 특정인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특정인이 아닌데, 그 사람이 나를 특정인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밤길도 혼자 나갈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였는데, 이제는 남자인 나도 혼자는 밤에 가까운 슈퍼마켓 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용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어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피하면 된다.
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원수라는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 받는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악인보다 좀 나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보다는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율법을 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율법을 배울 정도다.
그러니까 주님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 서툰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다.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율법을 스스로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그게 잘 지키는 게 아니다고 깨우쳐 주신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고깝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율법을 정식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요즘으로 하면 홈스쿨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홈스쿨이 아직도 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칭 종교 엘리트들을 까칠하게 대하셨다.
자신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하면 들을 귀가 없는데 가르친들 듣겠는가?

-그러나 말씀을 사모하는 무리에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셨다.
그들의 절박한 필요인 각색 질병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사람이 몰린다는 말은, 민심이 한 쪽으로 쏠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도자들은 긴장한다.
그런 그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꼬투리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채 감시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으셨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모세에 대해 말을 꺼냈다.

-지난 주 살인의 문제, 간음의 문제, 맹세의 문제에 이어, 오늘은 악한 자를 대하는 문제, 원수를 대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별로 예민한 문제는 아니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율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고민이 생긴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생각이 든다.
그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게 자기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을 깨우쳐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달리 해석이 필요없다.
그대로 지키면 문제 될 것 없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신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율법교사로서 기분 나쁜 얘기다.
위로 위로 올라가면 모세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인데 기분이 나쁜 경우 있잖은가?
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감정이 그랬다.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백 번 맞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다.
이게 죄인의 심리다.

-그럼 그게 남의 얘기인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맞다.
그런데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아멘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 우리 얘기이다.

-성경을 우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은혜가 안 된다.
그러면 성경과 내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
내가 3인칭이 되면 안 된다.
내가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예수님이 되어보기도 하고, 제자가 되어 보기도 하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되어 보기도 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이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제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성경이 은혜가 된다.
성경에 빠져들게 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게 형벌인가? 복음인가?
그 중간쯤 되지 않나 싶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다.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르는데, 동일한 상해나 배상 원칙을 적용한 일종의 처벌법이다
그 법의 제정된 목적은, 범법자 규제를 통해 사회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억울한 피해를 예방하는 데 있었다.

-동해보복을 해야지, 두 배 보복을 했다, 그럼 상대도 두 배 보복을 할 것이다.
그럼 원래 사건에서 4배가 커진 것이다.
이야 개수라도 많지만, 눈은 두 개밖에 안 된다.
동해보복이 아니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당해서도 안 된다.

-율법은 공평을 말한다.
법에 있어 공정성은 생명과도 같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한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공정한 법 집행에서 신뢰가 나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 집행을 하면서 믿어달라고 하면 안 된다.

-주님은 공평에 사랑을 더하셨다.
공평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공정한 보복이 아닌 사랑이라고 해석하셨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실례를 들었다.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그가 오른손잡이라고 볼 때,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치는 것이다.
한 번 해 보라.
손바닥으로 뺨을 치면 손등으로 치는 것보다 소리는 크다.
그러나 아프기는 손등이 더 아프다.
그런데 그건 아프기의 문제가 아니다.
손등을 사용하면 맞는 사람이 더 모욕을 느낀다.

-지금은 부모도 자식의 뺨을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뺨 맞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 때 학교 선생님들이 왜 그리 때렸는지 모른다.
맞았던 기억을 살려봐도, 손등으로도 맞을 때가 더 기분이 나빴다.
물론 자로도 맞고, 심지어 슬리퍼로 맞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난리날 일인데, 그 때는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맞아 더 모욕감이 들어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다.
아니 오른쪽 뺨 맞은 것도 화가 나는데 왼쪽 뺨까지 돌려대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실제로 어쩌다 한 쪽 뺨을 맞았다고 하자.
그런데 다른 쪽 뺨을 돌려대면 어떻게 될까?
“오, 예수님의 제자가 맞네” 할까?
“야, 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구나” 할까?
그건 매를 버는 것이다.
약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감정이 폭발하고 말 것이다.
한 대 맞고 말 것을, 두 대 세 대 맞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신병자나 중독자가 오른편 뺨을 때려도 왼편을 돌려대라는 말인가?
아니다. 도망쳐야 한다.
그 자리를 피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상대방이 내 오른편 뺨을 친다, 그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맞고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예를 든다면 같이 때릴 것이다.
그건 힘이 비슷할 때 가능하다.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강하면, 한 대 맞고 돌아선다.
잘못하면 몇 대 더 맞을 수도 있으니, 속에서는 천불이 나도 참는다.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약하면, 내가 두 대 세 대 때린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의 예를 든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하다.
이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 때 참을 수 있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을, 두 세대 때리고 나면, 속이 잠깐은 후련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해답이 될 수 없다.
그가 복수를 칼을 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내 손에서 끊어야 한다.
내가 손을 대면 부작용이 많다.
자식대로 물려질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손대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다윗이 그랬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동굴에서 만났으나,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하나님께 맡겨 드렸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처리하신다.
우리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든 말씀마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쉽지 않다.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속옷 가지려고 나를 고발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건데 고민스럽다.
일단 재판의 자리로 가지 않아야 한다.
고소를 당하지도, 고소를 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 하는 것은 최후의 선택이어야 한다.
너무 쉽게 고소고발은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교회 내 송사 문제를 다뤘다.
고전 6: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왜 소송을 하는가?
이기기 위해서 한다.
지기 위해서 소송하는 사람은 없다.
40절은 내 권리에 대한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니
권리 주장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아주 작은 권리라도 주장하고 싶어한다.
권리를 침해당하면 견디기 힘들어 한다.

-분명히 내 속옷이다.
그런데 소송을 걸어 내 속옷을 가지고자 한다.
그럼 겉옷까지 줘버리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서 주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 속옷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하면 둘 다 피곤해진다.
시간과 돈은 물론이고 신경쓰고 머리 아프다.
상대가 걸어온 소송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겠지만, 먼저 소송을 거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권리포기는 개인적인 문제로 제한된다.
공공의 문제라면 달라질 수 있다.
전에는 공장에서 폐수를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일이 있었다.
비올 때를 날 잡아서 그렇게 하곤 했다.
그걸 보고 눈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공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사정 당국에 알려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억지로 뭘 하게 했을 때의 문제이다.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억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며칠 전 청년부 중고등부 연합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애들 엄마 세탁소에 맡긴 단복을 찾으러 갈 일이 생겼다.
그 때가 9시쯤 되었고, 나와 신집사는 집중하고 있었고, 예람이는 취침복장이고, 결국 그 미션이 시호한테 떨어졌다.
물론 시호도 잠옷 바람이었다.
옷 갈아입고 세탁소 좀 갔다고 오라고 했더니, 인상이 잔뜩 흐려졌다.
내 얼굴 한 번 보고, 이모 얼굴 한 번 보고 하다가, 마지못해 갔다 오긴 했다.
하지만 얼굴은 전쟁터에 갔다 온 표정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뭐라고 한 소리하면 꿈자리 사나울까 싶어서 “아휴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달랬다.

-잠시 후 제 엄마가 와서, “형 주게 치킨 사러 가자” 하니까, 군말 없이 따라갔다.
들어올 때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왜? 형 때문에 자기도 치킨 먹게 생겼으니까... 인간이 그렇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인가?
억지로 해야 할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억지로 해야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럼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오 리를 가게 할 때, 십 리를 동행해 주는 게, 의무감으로 가능하겠는가?
기쁨이 없이는 안 된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공부는 목표는 아니다.
하지만 공부는 과정이다.
과정이니까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과정은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양육도 훈련도 마찬가지다.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한 번은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억지로 하다가 수지맞을 수도 있다.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단순하게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경우가 있고, 필요해서 꾸어달라고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경우가 있다.
일단 있어야 줄 수 있다.

-주는 것과 꾸어주는 것은 다르다.
주는 것은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도 받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못 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꾸어주는 것은 다르다.
말 그대로 꾸어주는 것이다.
자기 통장에서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출을 해서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주는 경우도 있다.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서, 믿고 꾸어주는 것이다.
때로는 배우자 몰래 꾸어주는 경우도 있다.

-줄 때의 태도도 중요하다.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가진 자로서 거만한 태도를 해서는 안 된다.
나한테 있는 재물이, 영구히 내 곁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언제 남의 손으로 옮겨갈지 모른다.
언제 남에게 손을 내밀게 될지 모른다.

-꾸어달라고 한다고, 다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꾸어줄 사람도 분별해야 한다.
사기꾼, 노름꾼, 마약중독자...등등
이자 많이 준다는 말에 꾸어주면, 원금도 날릴 수 있다.

-또 꾸어준 것은 받아야 한다.
꾸어주고 못 받을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그냥 주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속 끓인다.
교회 안에서는 돈 거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돈 문제가 불거지면, 교회 내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잘못하면 돈 잃고 사람 잃고 할 수 있다.

-돈을 꾸었으면, 빨리 갚아야 한다.
돈을 꾸고 갚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오직 답답하겠는가마는, 갚으려는 최선의 의지가 보여야 한다.
꾸어준 사람으로부터 “천천히 갚으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아마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의 분위기를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누가 감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던가?
자기조차 꿈도 꿀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친히 원수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만이 가능하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분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린 손양원 목사님조차 힘들어 했다.
그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두 아들을 잃고도 보통 때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 양아들로 삼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잠든 깊은 밤에 혼자 일어나,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원수 사랑은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라는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라는 것이다.
기도 없이 원수를 사랑하려는 것은, 교만 중의 교만이다.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도전이다.

-원수 사랑은 놔두고, 가족 사랑도 기도 없이는 안 되더라.
아내 사랑도 자녀 사랑도, 기도해야 가능하더라.
탁구 같이 하는 목사님 중에, 결혼 40주년을 앞두고 있는 분이 있다.
어떤 목사님이 그분에게 “결혼 30주년은 넘었어요” 하니까, 펄쩍 뛰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10년을 깎느냐” 해서 뻥 터졌다.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도 없이 힘들다.
이게 정답이다.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사람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사랑할 사람의 범위를 넓히는 기도를 하자.
그게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것 아닐까?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원수 사랑에는 보상을 약속하셨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그 보상을 보면 보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정도는 해야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에게 사랑에 있어 당신 수준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아버지의 온전함에 이르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