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마 5:21-3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467
마태복음 강해 12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마 5:21-37)
2016. 7. 17.


프롤로그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아니 혼자 살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요즘은 나홀로 족이 많아졌다.
우리는 지금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1인 가구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냥 혼자 사는 것이 아닌, 혼자서도 잘 놀고 즐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혼놀족’을 위한 공간도 다양해지고 있다.

-혼자 사는 남자들의 생활이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mbc <나혼자 산다>는 프로그램이다.
나도 틀어놔서 한 두 번 봤는데, 시답잖은 내용이긴 했지만 시대의 문화코드를 읽는 셈치고 봤다.
그들은 모임 이름을 무지개로 정하고, 서로를 회원님이라고 부른다.
회원들은 혼자 살면서 느끼는 불편함과 고민을 함께 나눈다.
이들은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싸와서 같이 나눠 먹기도 하고, 새로 영입하고 싶은 회원을 물색하기도 했다.
또 앞으로 알고 있는 살림정보를 나누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안 쓰는 물건은 벼룩시장을 열어서 교환하자며 의기투합했다.

-무슨 말인가?
역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전엔 배가 고파도 혼자서는 식당에 가지 못했는데, 요즘엔 혼자서도 밥을 먹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아예 1인용 칸막이 식당까지 생겨나고 있다.
몇 년 전에 일본에 그런 식당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 대학가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그래도 혼자 하면 이상한 것들이 있다.
바로 노래방 가는 것이다.
노래방이 어떤 곳인가?
주로 모임의 식사나 술자리 후 함께, 여흥을 즐기러 가는 곳 아닌가?
하지만 최근 대학가엔, '혼놀족'을 겨냥한 '동전 노래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소파와 테이블 대신 노래방 기계 하나만 달랑 있는, 1평 크기의 노래방이다.
보통 500원에 노래 2곡을 부를 수 있다고 한다.
혼자 오는 손님이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종업원 없이 운영되는 '무인 노래방'도 등장했다고 한다.
-또 영화관이다.
영화관은 대표적인 데이트 장소였고, 누군가와 함께 관람해야 제맛이 나는 곳이었다.
영화 매니아여서 혼자 영화를 즐긴다면, 집에서 DVD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니다.
'최근 함께 영화 본 사람이 누구냐'는 문항에, '혼자'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2013년에 8.2%에 불과했는데, 작년엔 44.5%를 차지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최모씨는 매달 1~2차례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데, 혼자 가는 이유로 어차피 영화를 보며 대화를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친구와 함께 볼 필요가 있냐고 했다.

-치맥은 들어봤을 거고, 그럼 책맥이라고 들어봤는가?
싱글족들의 대표적인 취미인 독서와 2·30대들이 많이 찾는 맥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책맥' 카페도 등장했다.
손님들은 맥주를 주문한 후, 자연스럽게 1인용 소파나 바에 앉아 책을 읽는다.
취한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게 가능할까 궁금해서 기자가 물었는데, 책바를 경영하는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전문 서적은 들여놓지 않아요. 반대로 소설이나 시는 오히려 좀 취해야 더 몰입할 수 있지 않나요?" -------------------------------------------------------
-오늘 상고할 말씀은 혼자 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것들이다.
율법이나 계명은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면 율법도 계명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지금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게 쉽다.
네 알아서 살아라 하면 어렵다.

-어떤 식당에 갔더니 이런 메뉴가 있더라.
‘아무거나’
식당에 들어와 메뉴를 정하는데 “뭐 먹을 거냐”고 물으면 “아무거나” 라고 한다.
그래서 계발한 메뉴가 ‘아무거나’이다.
말 그대로 식당 주인이 알아서 아무거나 준다고 한다.

-하나님이 네 알아서 살아라 하면 힘들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절하게 구체적으로 계명을 주셨다.
이웃은 이렇게 대하라, 종은 이렇게 대하라, 물질은 이렇게 대하라, 가축은 이렇게 대하라....
오늘 말씀은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게 해석상의 차이가 좀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뜻은 그게 아닌데, 율법학자들이 잘못 해석을 함으로 예수님이 그 본뜻을 바로 잡아 준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데,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지나치게 의역을 해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구약이라면 더 그렇다.
묵시가 나오는 에스겔이나 다니엘, 요한계시록 등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설교자가 필요하고 성서학자가 필요하다.

-이단도 성경을 말한다.
아니 어쩌면 더 성경에 집착한다.
자기들만이 가장 성경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기존 교회는 비성경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왜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가?
분명히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데 왜 잘못됐는가?
성경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과 의역을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에 성경을 짜 맞춘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나는 성경을 복음서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서신서를 복음서의 관점으로 보고, 구약도 복음서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왜 복음서의 관점인가?
복음서는 예수님이 직접 육성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처음부터 경전으로 쓴 것이 아니다.
앞뒤 짝이 맞고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구성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책간의 충돌이 있을 수가 있다.
신약과 구약은 물론이고 서신서간에도,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말이 다를 수 있다.
그걸 복음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계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다.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서 옛사람은 모세를 가리킨다.
사실 계명은 단순하다.
살인하지 말라
거기다 주님이 살을 붙이셨다.
물론 율법에 살인자를 심판에 처했음을 감안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터이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율법을 들었다.
율법교육은 어려서부터 필수이다.
현용수 교수에 의하면, 유대인은 자녀가 세 살만 되면 율법을 줄기차게 가르친다.
유대인은 조기교육으로도 유명한데, 조기 교육에 <세 살 신화>라는 말이 있다.
세 살이 넘으면 이미 늦다는 얘기다.

-유치원에서는 안식일에 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연습시키고, 학교에서는 아침 7시부터 1시간 동안 기도를 드린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오전 내내 종교교육만 해도, 수많은 수재가 배출된다.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길은, 세상 학문에 있지 않고, 지혜와 슈르드에 있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머리를 비울 틈을 주지 않는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여유마저 주지 않는다.
그래서 고3이 되면, 교회학교 고등부에 나오지 않는다.
조기졸업을 하고, 일 년간 무적으로 있다가 대학부로 간다.

-세상을 이기는 길이 세상 학문에 있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1등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 진학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지 않는가?
2014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학진학률이 OECD 국가 중 최고였다.
대학교육 이수율이 66%였고, 고교 이수율은 98%였다.

-현용수 교수의 말을 인용하겠다.
“율법은 곧 선악을 구별하는 가치 기준이다. 세상의 법은 현행법만 있으나, 유대인의 법에는 종교법, 양심법, 윤리와 도덕법, 현행법 및 생활하고 생각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법은 그들의 인성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결국 인성이란 말이다.
인성을 무시한 지성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성과 인성, 인성과 지성을 겸비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다.
그런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겸비할 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
말과 자기 성질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말 한 마디 잘못하여 일을 망치곤 한다.
성질 한 번 잘못 부려 판이 깨지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더불어 살면서 “살인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율법이 여러 가지로 말했지만, 그것들은 살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종교지도자들은 타인을 실제로 살해하는 경우만 살인으로 봤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해석하셨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라가 곧 욕설을 하는 자도,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다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다.
당시 율법학자들과는 해석을 달리한 것이다.
심판을 받는 것과 공회에 잡혀가는 것,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건 살인자가 받는 심판이다.
그렇다면 노하는 것과 욕설하는 것과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을, 사실상 살인에 견준 것이다.
인격적인 살인까지도 살인으로 본 것이다.

-물론 노한 것과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욕설한 것과 살인이 같을 수 있겠는가?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은 살인과 차원이 다르다.
다만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며,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하셨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명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목회하면서도 가장 힘든 사람이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고생한다.
‘자기 의’가 깨질 때까지 고생을 겪는다.
‘자기 의’가 깨져야 ‘그리스도의 의’가 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좀 더 높은 차원의 말씀을 하신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예배에 적용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멀쩡하게 제사 드린다.
거룩하고 엄숙한 의식을 따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았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맘속에 있다.
그리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제사를 드린다.

-이게 우리 이야기가 아니면 좋겠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으면 좋겠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예배드릴 사람이 많이 줄 것이다.
원망 들을 만한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진짜 있겠나?
예배 인도자인 나부터도 아내나 자식들한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거 같다.

-예배를 수직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함께 예배하는 형제와의 관계에 이상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떠날 수 없고, 목회자 얼굴은 보기 싫고, 그래서 교회 기둥 뒤에 숨어서 예배하는 것은 예배가 아닌 것이다.
저 사람 꼴보기 싫어서 교회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자기는 천사처럼 예배한다면 그것 역시 예배가 아닌 것이다.
예배의 열납 여부는 어쩌면 교회당에 오기 전에 결정되는 것이다.

-한 주간의 삶에서 형제와 화목하게 살았으면, 그 형제와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더 없이 좋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즐거운 축제이다.
나 먹고 살기 바빠서 한 주간 내내, 형제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급히 예배하러 나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한 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한 동안 못 만났지 서머서먹 이상했었지

-그러니 예배에 무슨 감동이 있겠나?
형제 간에 얼굴보기가 서먹서먹한데, 아버지 얼굴이 친근하겠나?
예배는 아버지도 만나지만, 한 주간 동안 흩어져 지내던 형제를 만나는 것이다.
형제가 많아야 축제가 된다.
어린 아이들이 왁자지껄해야 축제 같다.
우리교회가 매주 예배의 감격이 넘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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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혼자 산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십계명 중 인간과 관련된 6-10계명을 보면,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10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
공동체가 정글이 되고 만다.
정글이 어떤 곳인가?
양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다.
거기선 힘센 놈이 대장이다.
진리도 없고 논리도 없고,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공동체로 살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필요한 율법을 주셨다.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계명을 주셨다.

-간음이란 부정한 성관계를 의미한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성은 거룩하지도 그렇다고 세속적이지도 않다.
부부 간의 성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관계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성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은, 잘못 되면 그만큼 추해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순백의 순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또 냄새는 얼마나 그윽한가?
하지만 시들면 더없이 추해 보인다.
냄새까지도 악취가 난다.

-지혜자는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잠 5: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은은한 성교육인 것 같다.
자기 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안의 샘물이 집 밖으로 넘쳐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간음인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간음을 육체적인 성관계로만 이해했다.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마음으로는 아무리 음욕을 품어도, 육체적인 관계만 맺지 않으면 깨끗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해석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봐도,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적인 간음과 마음의 간음은 같지 않다.
아니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같다고 보면 큰 일 난다.
그거야말로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마음의 간음은 회개가 간단하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그만이다.
자기가 음욕을 품었던 여자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에게 음욕을 품었는데 용서해 주세요”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결혼 전의 과거도 밝혀서 좋을 게 없다.
굳이 신혼 첫날밤에“ 사실 당신이 내 첫 남자가 아닙니다”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좋을 게 없다.

-과거가 있다고 지금 와서 어떻게 할 건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아무리 과거가 깨끗하고 순결을 유지했으면 뭐한가?
지금이 깨끗하지 않다면 소용없다.

-마음의 간음은 해결을 자기 선에서 끝낼 수 있다.
남한테 피해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간음은 다르다.
자기 배우자에게 죽을 거 같은 고통을 준다.
상대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자녀가 있다면 자녀에게 부끄러움을 준다.
자기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벗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런데 이 시대는 가정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러다보니 성의 울타리도 모호해졌다.
간통은 더 이상 죄로 처벌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성생활을 서로의 사생활로 존중해준다.
그런데 그게 진짜 존중일까 싶다.

-성문제는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복잡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이 노골적이 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회적 신분도 체면도 가리지 않는다.

-주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오늘날에 비하면 양반이다.
우리 시대 지도자들이 그 정도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성적인 죄에 대해 엄격하셨다.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만큼 생채기가 크게 나기 때문이다.
물건은 가져왔으면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되고, 원 주인한테 돌려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성은 그렇지 않다.
평생에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한다.
간음한 본인도 그렇고, 그 사람의 배우자도 더 그렇다.

-그래서 주님은 성적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칠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보다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
사실 이런 단호함이 없이는, 누구도 성적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
그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요셉이 잘 보여줬다.
보디발의 아내처럼 붙들고 늘어지는데, 어떻게 싸워서 이기겠는가?
피하고 도망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주님은 간음과 이혼을 연관시키고 있다.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간음과 이혼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주님은 간음으로 인해 배우자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기에, 배우자의 간음으로 인한 이혼만은 허락하셨다.
물론 배우자가 간음했다고, 무조건 이혼하라는 말은 아니다.
배우자의 간음이 이혼의 정당성을 제시한다는 말도 아니다.
주님도 그 정도면 이혼하는 걸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너무 쉽게 이혼하고 재혼하고 또 이혼하고 ...한다.
바꿔봤자 사실은 그게 그건데 말이다.
집안에 이런 표어를 붙여놓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그냥 살자.”“바꿔봤자 그게 그거다.”
재혼한 가정에 이런 표어를 붙여놓으면 좋겠다.
“두 번 바꿀 것은 아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자.
가정을 지상의 천국으로 가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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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다.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맹세는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이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맹세를 잘 했다.
자신의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에서 맹세는 효과적이다.
우리 어릴 때도 “너 맹세할 수 있어?” 하고 물으면, “그럼 맹세할 수 있지”했다.
사실은 맹세가 필요 없는 공동체가 건강하다.

-사람에게는 자기보호본능이 있다.
자기보호를 위해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모른다고 하거나 자기한테 유리하게 증언한다.
그건 3-4살 정도만 돼도 그런다.
누가 가르쳐줘서 그런 것이 아닌 보호본능이다.

-자기 애가 거짓말을 하면, “우리 애가 원래 안 그랬는데 어린이집 가서 배웠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본능적으로 그런 것이다.
애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그 때 애한테 눈을 치켜뜨고, “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어?”
“너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
그렇게 닦달할 필요는 없다.
애 지옥 보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

-본문에서 말하는 맹세는 그와 다르다.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을 걸고도 땅을 걸고도 예루살렘을 걸고도, 심지어 자기 머리를 걸고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 안 해도 갚을 사람은 갚는다.
맹세 안 해도 정직한 사람은 믿을 수 있다.
말끝마다 “이건 진짜야” “진짜 그렇다니까” 하면, 왠지 말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것만은 내가 맹세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마저 믿음이 덜 간다.
예를 들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데, “아, 정말요” 하면, 처음 한 두 번은 괜찮겠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면 기분이 살짝 나빠진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다.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말이 많으면 건질 말이 별로 없다.
말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말실수가 잦아진다.
특히 그 말이 맹세라면 더 그렇다.
자기가 한 맹세에 자기가 매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자기가 풀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풀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맹세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다.
하나님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뭘 무서워하겠는가?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여, 교묘히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기도 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등....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 쓰는 사람 보면 틀림없이 고생한다.

-말의 무게는 맹세에 있지 않다.
말의 능력은 얼마나 큰 대상으로 맹세하느냐에 있지 않다.
평소 삶에 있다.
평소 말 습관에 있다.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맹세를 안 해도 믿음이 가는, 말의 신뢰도가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