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설립4주년/마태복음 강해 11: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삽시다.(마 5:13-2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907
마태복음 강해 11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삽시다.(마 5:13-20)
2016. 7. 10.


프롤로그

-한국교회 내 영향력 있는 어떤 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교회소개>란을 소개하겠다.
한국교회는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한국교회는 꿈이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예수로 이땅을 덮는 꿈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구제하며 선교합니다.
한국교회는 천국을 경험하며 천국을 확장하는 중입니다.
한국교회는 우는 이와 함께 울고 웃는 이와 함께 웃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장로님이 있어 행복합니다.
어머니 품속 같은 한국교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로 나가셔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며 사세요.
이 아름다운 한국교회 중 하나인 서울 광염교회를 소개합니다.

-그걸 보고 참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자탕교회로 널리 알려진 광염교회이긴 하지만, 홈페이지에 들어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는, 보통 교회와는 뭔가 차별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몇 년 전에 국민일보 함태경 기자가, 광염교회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중 몇 줄을 인용하겠다.
“또 광염인들은 평일에는 현장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가며 주일날이면 병원전도대 지하철전도대 등산전도대 등으로 나눠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광염인 모두가 현장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재미있고 창조적인 곳이라는 신선한 의식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소년들은 물론 청장년 광염인들은 인도 캄보디아 등 해외 선교지와 국내 전도지로 단기선교여행을 떠난다.
이를 통해 평신도 선교사의 꿈이 영글어 간다.”

-광염교회는 재난을 당한 곳이라면,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가는 교회이다.
그럼에도 자기 교회이름이 아닌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란 이름으로 봉사활동을 한다.
그런 교회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름대로 사는 그 교회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교회 이름은 그럴듯하게 지을 수 있으나, 교회 이름처럼 사역하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내가 얼떨결에 개척을 하고, 교회 이름을 짓기 위해 기도하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 했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올네이션교회였다.
영어 이름이라서, 노회에서 허락할지 염려가 되긴 했지만, 다행히 좋게 봐주셨다.

-교회이름은 국제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개척교회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도 개척하면서부터 바로 선교했다.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선교비는 지출했다.

-하루는 기도 중에, 올네이션교회란 이름에 맞게,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나라를 분양해주기로 했다.
교인들에게 세계 지도를 펴놓고 나라를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나라를 품고 늘 기도하라고 했다.

-나도 한 나라를 골랐다.
그 때 내가 고른 나라가 바로 라오스였다.
올네이션교회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포항동광교회와의 합병으로 인해, 올네이션교회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면서도, 나라 분양 사역도 자연스럽게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라오스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저번에 한 주간 태국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일명 골든트라이앵글을 다녀왔다.
메콩강에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게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국경을 이룬다.

-나는 메콩강 저 너머에 있는 라오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가 기도했던 땅이었기에, 각별한 마음이 느껴졌고, 비록 발로 밟지는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눈도장은 찍고 왔다.
눈도장을 찍고 왔으니, 언제가 발로 밟을 날도 오지 않겠나 싶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전인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오스에서 오래 사역하고 있는 이영상 선교사님과 함께 축구를 한 적이 있다.
포항믿음교회에서 주일오후에 설교하고, 지광용 목사님과 함께 축구하러 왔는데, 그날 함께 했던 목사님들에게, 꼭 한 번 라오스에 단기선교를 와달라고 부탁하더라.
다른 어떤 것도 필요없고, 축구화만 들고 오면 된다고 했다.
매일 기도했던 땅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축구로 선교하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 있을 거 같아 솔깃했지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가능하다.

-몇 년 전부터 김온유 이보배 선교사도 선교지에 왔다가라고 했는데 못 가고 있는데, 라오스부터 가면 좀 그럴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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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다른 말로 제자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충실하게 따르려면 자기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믿으려면,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존재냐,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아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알면 교만하지 않는다.
자신을 알면 분수를 잃지 않는다.

-몇 주 전 어떤 교회 장로님을 만났다.
자기 교회 목사님이 처음에는 1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란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니까, 호텔 식사가 아니면 안 넘어간다고 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하더라.
나도 전에 1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 잘 안 넘어갔는데, 요즘에는 몇 만원을 넘기는 것도, 별 부담 없이 잘 먹어서다.

-초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사람이 왜 초심을 잃는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려서 그렇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초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자신을 알아야 자기를 성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 성찰이 소홀해지면, 분별력이 떨어진다.
다른 사람은 보는데, 자기는 못 본다.
다른 사람은 걱정하는데, 자기는 괜찮다고 한다.
당연히 선한 영향력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소금과 빛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먼저 소금이다.
부모님의 사랑은 돌아가신 뒤에 알고, 소금의 가치는 없어진 후에 안다는 격언이 있다.

-원시시대의 소금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소금을 얻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고, 소금을 해외에 내다팔기 위해 길을 냈는데, 그걸 ‘소금길’이라고 했다.
옛사람들에게 소금은 금 못지않은 가치를 가졌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소금의 가치가 크게 하락해졌다.

-그럼에도 소금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소금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심장병 등 소금 섭취를 자제해야 하는 질환을 지닌 환자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일체 소금섭취를 중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생리적으로 소금을 필요로 한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소금의 한 성분인 나트륨 이온을 조금이나마 필요로 하고, 혈액과 근육은 더 많이 필요로 한다.
더구나 아무리 소금을 먹지 않아도, 소변, 땀 등으로 잃는 소금의 양이 하루에 1그램은 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소금을 섭취하여야 한다.

-소금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단맛을 주는 설탕 대체물은 여러 가지가 시중에 팔리고 있으나, 소금 대체물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소금이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그가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닌,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었는 핵심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을 한다.
물론 짠 맛을 낸다.
그런데 짠맛만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맛을 더 진하게 내준다.
옥수수를 삶을 때, 물에 설탕과 함께 소금을 넣으면 단맛이 더 강해진다.
토마토나 삶을 감자를 먹을 때, 소금을 찍어 먹으면 달고 맛이 더 있다.
보리차를 끓일 때도, 소금을 조금 넣으면, 향이 더 좋아진다.
커피 마실 때도, 소금을 조금 넣으면, 향도 좋아지고 정력증진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맛을 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기에 내 색깔을 내는 것과 함께, 다른 사람의 색깔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가 그 사람의 보색이 되어 주어야 한다.

-또한 소금은 썩지 않는다.
소금이 썩었다는 말을 들어봤는가?
소금은 자신이 썩지 않을뿐더러, 다른 것을 썩지 않게 돕는다.
야채, 생선, 육류 등 다양한 식품을 소금에 절이면, 미생물의 번식을 막아 이들을 장시간 보존할 수 있게 한다.
껍질을 벗긴 과일을 소금물에 담궜다가 꺼내면, 오래 두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금으로서 내가 썩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진다.
우리가 썩지 않아야, 세상의 방부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소금은 씻을 때도 사용된다.
논에서 우렁이를 잡았다, 그러면 소금물로 씻는다.
추어탕을 하기 위해 미꾸라지를 잡았다 하면, 소금으로 씻는다.
바다조개를 잡았을 때도, 소금물에 담궈 놓으면, 흙이나 모래를 토해낸다.
옷에 피가 묻었을 때도, 소금물에 담궈 핏물이 빠지면, 비벼서 빨면 된다.
심지어 건어물의 짠맛이 너무 강할 때도, 소금물에 담궈 두면, 주변의 소금물과 같은 염분 농도가 되기 위해서, 건어물 속의 소금이 용해되어 나온다.

-오늘날의 소금은 치약, 화장품, 약품, 화학품 등 활용도가 보다 다양해지고 있다.

-소금을 얻는 것이 예전보다는 쉬워졌지만, 그래도 소금을 얻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소금을 만드는 데는 수고가 따른다.
주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가?
피 흘리는 수고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금으로 살라고 하셨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소금이 아닌, 세상의 소금으로 살라고 하셨다.

-세상의 소금이란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유익을 주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건 녹을 때 가능하다.
녹아서 소금의 형체마저 없어질 때 가능하다.
소금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기능도 못한다.
녹아야 맛을 내고, 녹아야 기능을 발휘한다.

-소금이 녹는 것은 다른 말로 희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이 말처럼 쉽지 않다.
어쩌다 큰맘 먹고 희생을 해도,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알아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운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소금된 우리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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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빛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이 자기를 숨기고 희생해야 한다면, 빛은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소금은 소멸되면 기능이 발휘되고, 빛은 나타나야 기능이 발휘된다.
빛은 숨으면 안 된다.
빛이 숨으면 주위를 비추지 못한다.
빛은 자신을 숨길 수도 없고, 다른 것도 숨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이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현실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과 섞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움은 무엇으로도 몰아낼 수 없다.
어떤 무력으로도 어두움을 쫓아낼 수 없다.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어두움은 떠나가라고 해도 안 된다.
그러나 빛이면 가능하다.
태양빛이 아니어도 괜찮다.
호롱불도 어두움 앞에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어두움은 불같지도 않은 반딧불조차도 이겨내지 못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은, 세상이 어둡다는 전제를 한 것이다.
정오에 무슨 빛이 필요하겠는가?
태양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다면, 어떤 빛도 소용없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필요하다.
어둠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눈감고 잠자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주님이 보신 세상은 어둠이다.
그것도 빛을 환영하지 않는 어두운 세상이다.
사실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두움의 속성상 빛을 거부한다.
왜 그럴까?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얼마나 죄악과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지,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어둠에 만족한 세상은 빛을 선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빛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빛으로서 세상에 나갈 때,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빛 그 자체이신 예수님도 배척받으셨다면, 우리가 빛으로서 배척받는다면 영광이다. .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된 빛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이다.
태양이 아닌 달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반사하는 것이다.

-달이 밝아봤자 태양처럼은 아니다.
그래도 보름달 같은 경우, 사람들이 활동하기에 큰 제약이 없다.
우리는 온 세상을 태양처럼 밝게 비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보름달이면 족하다.
전등불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보름달도 밝은 편이다.

-원래 달은 둥그렇다.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달
그런데 보면 반달도 있고, 눈썹달도 있다.
왜 그런가?
가려서 그렇게 보인다.
우리 눈에는 달의 밝은 면만 보인다.
원래는 둥근달인데, 보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보름달이 된다.
우리가 예수로 충만하면, 세상을 보름달로 비출 수 있다.

-그런데 초승달, 그믐달처럼 희미하게 비추는 이들이 있다.
언뜻 보면 보이지도 않는다.
달이란 이름은 가졌지만, 빛으로서 별 영향력이 없다.

-또 반달로 비추는 이들이 있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노래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말 그대로, 반달은 반쪽짜리 달이지, 온 달이 아니다.
비추는 기능을 50%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반쪽 달이다.

-나는 <반달>보다 <둥근달>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보름달 둥근달 동산위로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처럼 환해요
초가집 지붕에 새하얀 박꽃이
활짝들 피어서 달구경 하지요

-가사가 얼마나 복음적인가?
작사자인 윤석중 씨가 기독교인인지는 모르지만, 내용만 놓고 보면 꽤 복음적이다.

-자신을 달에 비유했을 때, 어떤 달인지 진단해보라.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희미한 빛은 아닌가?
혹 반달로 반쪽짜리 빛을 내고 있지는 않는가?
동산위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어둡던 마을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기를 바란다.

-우리가 빛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우리에게 시선이 모아진다.
그 때 조심해야 한다.
작은 영광이라도, 내가 취하려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신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 우뚝 세워주신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면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들,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요셉이 스스로 높아지고 했다면, 말단 공무원도 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높여주니까, 단숨에 총리가 되었다.
우리 계산 잘 해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에 이어, 자신이 왜 왔는지를 알려주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예수님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가, 반율법주의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정상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뭔가 자기들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민초들이 예수님께 열광한 이유 중에 하나도, 종교 귀족층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가르치는 율법 교훈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율법 교훈을 따르면 자기들은 희망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자기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자기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더구나 예수님에게서 말씀의 권세가 나타났다.
말씀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가고,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메시야나 할 수 있는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서는, 율법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경계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에 대해 자기들과 다른 해석을 하는 예수님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를 밝히신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율법 완성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율법 폐기자가 아닌 율법 완성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율법은 폐기될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았는가?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왜 안 드리고 있는가?
그들은 안 드린다기보다 못 드리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성전이 없어서이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서만 드릴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이슬람교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제사를 어떻게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도 구약에 나온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이유가 유대인들과 다르다.
제사를 정한 율법이 폐기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 율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죄를 위한 희생 제사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사죄를 완성하셨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율법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중에는 이루어진 말씀이 있다.
제사법이 대표적이다.
계속 지켜야 할 것도 있는데,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윤리법이다.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는 교훈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윤리법은 교훈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주님의 율법 해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율법을 주신 법 정신을 따라야 한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읽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계명을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중요한 계명 덜 중요한 계명, 큰 계명 작은 계명 등으로 나누었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계명은 중요하니까 꼭 지켜야 하고, 이 계명은 덜 중요하니까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크고 작음을 말했지만, 주님은 천국에서 크고 작음을 말씀하셨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친다고 천국에서 제하여 지옥에 보낸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국도 모두에게 같은 천국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등급이 있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온다.
이 땅에서 차별 대우 받는 것도 서러운데, 천국에 가서까지 차별 대우 받는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이 땅에서야 기꺼해봤자 몇 십년이지만, 천국은 영원하다.
영원히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천국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예수 믿는 우리에게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내세의 면류관과 함께, 이 땅에서 100배의 복을 받기 바란다.

-주님은 제자들의 수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높게 책정하셨다.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준수에 엄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철저히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고, 안식일을 칼 같이 지켰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보다 우선순위는 없었다.
물론 형식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의를 비난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우리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낫다고 보기 어려워서이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인들 중에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
교회 규모가 클수록 그 %는 더 떨어질 것이다.
맥추감사주일헌금 통계 보고 실망스런 직분자들이 있다.
주일성수는 또 어떤가?
예전엔 주일 새벽기도회부터 저녁예배까지 드렸다.
잠깐 집에 갔다 오는 거고,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그러나 요즘은 주일예배 한 번 드리는 것도 힘들어 한다.
52주를 본 교회에서 예배드린 사람 손에 꼽을 정도이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우리가 외적인 면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못 미친다.
그럼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열정이, 그들보다 확연히 앞설까?
주일성수와 예배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클까?
물질을 대하는 태도가,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를까?
무엇 하나 그들보다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겸비해야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못한 “내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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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으로서 세상에 녹아지고 있는가?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으로서 세상을 비추고 있는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자.
우리 한꿈교회가 설립4주년을 맞았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로 쓰임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