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제자 강해 10:다대오(막3:13-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3-08-27 13:18
조회
127


열두제자 강해 10
다대오(막3:13-19)
2023. 8. 27.


프롤로그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함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어느 무명용사의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은 미국 뉴욕대 부속병원 재활센터 (Center for Physical Medicine and Rehabilitation) 벽에 걸려있다.
↳미국 남북전쟁 때, 어느 무명용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기도문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제자는, 무명에 가까운 다대오이다.
↳순서로는 열 번째 제자이다.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다대오는 세 번째 그룹 곧 C팀에 속해 있다.
↳C팀의 팀장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다.
↳지난 주일에 살펴봤듯이, 팀장이 조용한 기도의 사람이다.
↳그래선지 다대오도 조용히 주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위해, 어느 무명용사처럼 살다 갔다.
↳물론 다대오는 무명용사와는 달리,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름 외에, 별다른 것을 남기지 않았다.
↳열두 제자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 없이, 덩그러니 이름만 남기고 갔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유명한 성경학자로, 성경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했던 제롬(Jerome, 히에로니무스)은, 다대오를 가리켜 ‘트리노미우스’라고 불렀다.
↳‘트리노미우스’란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세 개의 이름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첫 번째 이름을 다대오이다.
마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다대오란 ‘사랑받는 아들’이란 뜻이다.
↳‘젖먹이’로 볼 수도 있다.
↳젖먹이란 젖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짐작컨대, 집에서 막내였던 거 같고, 젖을 늦게까지 먹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태복음 10:3절을 보면, 개역개정은 각주가 달리지 않았지만, 새번역에는 보면 있다.
↳각주 내용을 보면,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레배오' 또는 '다대오라고 부르는 레배오’라고 되어 있다.
↳레배오는 ‘가슴’을 뜻하는 단어 ‘렛’에서 유래했다.
↳레배오는 ‘아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레배오’가 그의 별명이었다고 보면, 그는 가슴이 따뜻한 제자였을 것이다.
↳다대오와 레배오를 종합해 보면, 그는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가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는 열심당 시몬과 함께, 세 번째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몬처럼 강인한 사람도 쓰셨지만, 다대오 같은 부드러운 사람도 쓰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시몬과 마태는 또 어떤가?
↳둘이 앙숙 같은 존재인데, 제자공동체에 함께 있다.
↳예수님이 둘 다를 품으셨기에 가능했다.
↳다른 말로 그만큼 예수님의 품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주님께 쓰임 받은 사실이 중요하다.
↳주님께 끝까지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시몬은 시몬으로 쓰임 받으면 되고, 다대오는 다대오로 쓰임 받으면 된다.
↳시몬이 시몬으로 쓰임 받아야 행복하고, 다대오가 다대오로 쓰임 받을 때 행복할 수 있다.

-부르심에 감사하고 쓰심에 감사하자.

-두 번째 이름은 유다이다.
눅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유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발음이 같다.
↳유다란 이름의 뜻은 ‘찬양’이다.
↳그가 좋은 뜻의 이름을 가졌다.
↳유다는 그의 본명이고, 다대오는 별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유다라는 좋은 이름을 버려 놨다.

-그래서 요한은 그를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불렀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가룟 유다의 부정적 영향으로, 유다라는 이름을 쓰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유대인들이야 상관없지만, 기독교 영향권 아래서는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위에서도 유다라는 이름을 본적이 없는 거 같다.

-나잇값뿐만 아니라, 이름값도 하고 살자.

-세 번째 이름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행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아들’이란 단어에 각주가 달려 있는데, 성경 본문 밑에 보면 “또는 형제”라고 되어 있다.
↳유다가 야고보의 아들일 수도 있지만, 야고보의 형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를 형제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사전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온다.
↳‘유다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이며, 타대오는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소(小)야고보와는 형제 관계이며,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다른 사람이다.‘

-정리해 보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형제가 아닌 거 같다.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당해 보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이어서,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 형제까지, 열둘 중 절반이 형제 제자인 셈이다.

-혹은 유다 다대오를 예수님의 동생 유다와 동일시하여, 그가 유다서의 기록자라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그건 너무 나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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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대오를 이름과 관련하여 설명을 했다.

-다대오도 지난 주일에 살펴봤던 작은 야고보나, 다음주일에 살펴볼 셀롯인 시몬과 더불어, 성경에서 말해주는 정보가 빈약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요한복음 14장에 그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후, 제자들과 나눈 말씀이다.
↳그래서 다락방 강화라고 불린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중에, 다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요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앞의 제자는 가룟 유다를 가리키고, 뒤의 제자는 베드로를 가리킨다.
↳가룟 유다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제자이고, 베드로는 수제자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데다, 두 명의 핵심제자들이 예수님을 팔고 부인할 거라는 말씀을 들었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근심했겠는가?
↳그들의 근심이 역력한 눈빛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서둘러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이런 말씀으로 다락방 강화를 시작하셨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가만히 있었다.
↳이번에는 도마가 나서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냐고 할 때,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바로 그 길이다라고 하셨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나서서, 그 아버지를 우리한테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나를 본 게 아버지를 본 건데 아버지를 따로 보여달라고 하냐고 하셨다.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한참 말씀을 이어가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모처럼 유다 다대오가 나섰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
22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서,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진다.

-거칠고 투박한 말투의 베드로와는 대조된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얼마나 주제넘은 소리인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이라니...그게 말이 되는가?
↳예수님한테 항변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아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예수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처럼 거칠게 나무란 것이다.

-그에 반해, 다정다감한 심성의 소유자인 유다 다대오의 질문에는, 겸손함이 듬뿍 묻어난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듯이, 세상에도 나타내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거 같은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지를 물은 것이다.

-자기는 예수님을 만나 너무 좋다.
↳자기는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찬양을 한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영접하지 않는다.
↳유다 생각에,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보여주신 것을, 세상에도 보여주신다면, 세상도 달라질 거 같다는 것이다.
↳그런 점이 아쉬워서,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이다.

-또한 그의 질문에서, 그에게 선교적 관심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선교적 관심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상당수는,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다.
↳그 걸로 변론했고, 심지어 그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눅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문제는 타이밍이다.
↳그런 변론을 할 때가 언제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있은 후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눅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 때는 언제냐도 중요하다.
↳예수님이 유월절만찬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거라는 말씀을 한 이후였다.
↳아니 이게 진짜 말이 되냐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과 친척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유다 다대오의 관심이 남달라 보인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선교적 관심 때문에, 자신들이 본 영광을 세상에도 나타내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오늘날은 점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선교적 관심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에 관심이 희미해져간다.
↳자기, 자기 가족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연합회 활동도 잘 안 된다.

-예수님이 유다 다대오에게 대답하셨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기도하여 기적이 일어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을 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
↳우리가 교회당을 크고 웅장하게 지으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 없이 살아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가 주목받지 못해도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말씀에 세워야 한다.

-예수님이 교회를 어디에 세우겠다고 하셨는지도 보라.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의 기초를 말씀 위에 세우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두 가지 치우친 신앙이 있다.
↳기적 중심의 신앙이 있다.
↳은사 위주의 신앙이 있다.
↳기적 필요하지만, 그 당시뿐이다.
↳은사도 유익하지만, 신앙을 성숙하게 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은 말씀뿐이다.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말씀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신앙의 나침반이다.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느냐가 결정적이다.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기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불변한 말씀이 기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고, 우리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다.

-유다 다대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먼저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있다.
↳그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위해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진다.

-예수님이 좋아하면 나도 좋고, 예수님이 싫어하면 나도 싫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수님은 좋아하는데 나는 싫고, 예수님은 싫어하는데 나는 좋고...
↳그게 말이 되는가?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면 나도 관심이 가고, 예수님이 관심 없어 하면 나도 관심이 없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예수님이 관심 있는 것에 나는 없고, 예수님이 관심 없는 것에 나는 있고...
↳그게 말이 되는가?

-신앙이 예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 중심이 나한테 맞춰져 있다.
↳나 중심의 신앙은, 성경과 무관한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적이냐를 따져야지, 나한테 맞느냐를 따지면 안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예수님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게 된다.
↳더 수고하지 못해서 죄송스럽고,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 덕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다대오는 전승에 의하면, 유대 땅을 떠나 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유프라테스 강 근처인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에뎃사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에뎃사는 지금의 튀르키에이다.
↳더 나아가 이란, 이라크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말년에는 아르메니아 지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에뎃사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의 왕이었던 아부가르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걸 계기로 부족 전체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식은 아르메니아에까지 전해졌고, 그가 아르메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 이미 복음화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시리아로 다시 돌아와 전도하다가, 시리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숨지면서도,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나라에는 무명용사가 없다.
↳하나님께 작은 일은 있어도 작은 충성은 없다.
↳우리교회에 유다 다대오 같은 마음이 따뜻한 제자가 많이 세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