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제자 강해 06:바돌로매(막3:13-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3-07-30 12:27
조회
134


열두제자 강해 06
바돌로매(막3:13-19)
2023. 7. 30.


프롤로그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이라는 것은 다 안다.
↳별 믿음이 없는 사람도,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열둘이란 숫자는 알지만, 그 중 알고 있는 제자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사람 몇 명 되지 않는다.
↳핵심 제자 3인방이나, A팀에 속한 네 명에 더해, 의심의 상징 도마나, 배신의 상징 가룟 유다 정도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돌로매는, 더더욱 생소한 제자이다.
↳성경에 그가 활동한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자리가, B팀의 두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A팀 B팀 C팀을 구분하는 기준이, 예수님과 가까운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자리가 B팀의 두 번째이다.
↳그렇다면 그가 활발하게 그리스도를 따랐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다.

-열두 제자 명단이, 성경에서 네 군데 나온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이다.
↳각 책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요한복음에는 열두 제자 명단이 없는 대신, 이색적인 정보를 준다.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있던 일곱 제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 때 일곱 제자 명단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다.
↳바돌로매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나다나엘이 들어가 있다.

-학자들은 바돌로매의 본명을 나다나엘로 본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가 꽤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 같다.
↳‘돌로매의 아들’ 하면, 누구나 알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는 본명보다는, 돌로매의 아들로 불리었던 것이다.

-혹 어떤 학자들은, 나다나엘을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보기도 한다.
↳마치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란 별명을 붙이셨듯이, 바돌로매에게도 나다나엘이란 별명을 지어주셨을 거라고 본다.
↳나다나엘이 본명인지 별명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나다나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주셨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으로, 폭넓게 이해하기도 한다.
↳부모님은 나다나엘을 낳고서, ‘이 아들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럼 나다나엘만 그럴까?
↳우리는 우리 가정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중 누구도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어쩌다 실수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각 사람은 각 가정에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선물이다.

-나다나엘의 고향은 가나이다.
↳지금도 가나에는 나다나엘 기념교회가 있다.

-성경에는 세 곳의 가나가 나온다.

-먼저는 여호수아에 나오는 가나 시내인데,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현재의 와디 가나와 동일시되는 이곳은 사마리아 지역에 속한다.

-다음은 역시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가나 성읍으로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고, 현재는 레바논 땅에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 예수님이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다른 가나와 구별하기 위해서, 또한 갈릴리 여러 동네 중 하나이기에, 통상 갈릴리 가나로 부른다.
↳가나는 갈릴리 지방의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고,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려와야 했다.

-나다나엘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자기 동네가 아닌 옆 동네에 살고 있다.
↳그 친구 이름은 빌립이다.

-빌립이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요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한 동네에 사는 안드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던 안드레가, 동네 친구인 빌립에게 말했을 거고, 그로 인해 빌립에게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있었던 차에,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빌립은 두 말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
↳안드레가 빌립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마음의 옥토화 작업을 잘해 놓은 덕분이었다.
↳물론 친구 형인 베드로도 한 몫 거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빌립이 친구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 다른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옆 동네에 살긴 하지만, 그 역시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빌립이 그 친구를 찾아갔다는 거 아닌가?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친구란 가장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대상이다.
↳좋은 것이 있을 때 숨기고 싶다...? 그러면 친구 아니다.
↳설령 친구라고 해도, 가까운 친구 이른바 절친은 아니다.

-모든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 친구를 둔 덕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좋은 예수님을 소개할,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확신이 묻어나는 말이다.
↳얼마나 확신이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었을까?
↳빌립은 신중한 사람이다.
↳쉽게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계산이 딱 맞아 떨어질 때, 그 때 가서야 믿는 사람이다.

-그런 빌립이 흥분하여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도 차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사람이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의 말에, 베드로가 보인 반응과 상반된다.
↳베드로는 바로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여기서 분명한 성격 차가 드러난다.

-또한 메시지를 전할 때, 단순명료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단순명료 했다.
↳빌립은 같은 내용인데, 설명이 길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말 중, 나다나엘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
↳나사렛이란 말이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잘 안다.
↳가나와 나사렛이 거리 상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가나는 나사렛 북동쪽 7-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럼 20리 남짓한 거리이다.

-사람들은 자기 옆 동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옆 동네는 자기 동네보다 어딘지 좀 못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나나 나사렛이나 거기서 거기인 거 같은데, 나다나엘은 달리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했다.
↳심지어 갈릴리 지역 내에서도, 편견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은근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빌립이 만났다고 하는 예수가 예루살렘 출신이라고 했으면, 나다나엘의 반응이 달랐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인물은 예루살렘에서 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베들레헴이라고 했다면 반응이 달랐을지 모른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니까...
↳그런데 갈릴리라고 했다.
↳자기 동네보다 별반 나을 거 없는 옆 동네 사람이라고 하니, 나다나엘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자신의 평소 생각을 말했을 것이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그렇게 평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기엔 그건 명백한 편견이다.

-편견의 사전적 정의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유의어로 “색안경”이 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편견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아무리 자세히 봐도 편견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편견이다.
↳색안경을 끼고 있는 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 색안경 벗으면 되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색안경을 벗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평생을 끼고 살았던 색안경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벗겨졌다.
↳맞다. 자기가 벗은 것이 아니라 벗겨진 것이다.
↳색안경을 자기가 벗어던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도 모르게 벗겨진 것이다.

-편견을 가진 친구의 말에, 빌립은 한 마디로 답했다.
“와서 보라”
↳이번에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와서 보라” 외마디 외침이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있었다.
↳나다나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물론 빌립의 확신에 찬 초청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행 16장에 바울이 루디아를 전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게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공식이다.
↳우리가 말한다고,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마음부터 열어주시는 법은 없다.

-나다나엘이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왔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를 알아보셨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를, 다른 번역 성경으로도 읽겠다.
↳새번역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공동번역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진실하다이다.
↳예수님은 그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신 것이다.

-좀 의아한 면이 있다.
↳분명히 나다나엘은 나사렛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공동번역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런 편견을 가진 나다나엘인데,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해주셨다.

-물론 편견을 가진 것 자체를 칭찬하신 건 아닐 것이다.
↳또한 편견을 가진들 문제될 게 없다는 말도 아닐 것이다.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주님이,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이다.
↳그의 속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의 속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속마음까지 읽어내시는, 예수님 앞에 무너졌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자신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분이, 자기의 심령까지 꿰뚫어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처음 만나자말자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다.
↳나다나엘이라고 왜 꾸중 들을 일이 없었겠는가?
↳다른 마을도 아닌 예수님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동네를 편견을 가지고 비하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칭찬해 주셨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예수님의 칭찬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예수님께 과분한 칭찬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앞에서 나다나엘의 편견이 녹아 내렸다.

-그럼에도 나다나엘은 정말이지 궁금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충격이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이 이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다.
↳절친인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에도, 나사렛 예수란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쭉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초면에, 과한 립서비스를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무화과나무는 잎이 커서 그 아래는 시원한 그늘이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 묵상을 즐겼다.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으며, 개인 기도를 했던 것이다.
↳나다나엘의 이런 모습을, 예수님이 매 번 목격하셨던 것이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씀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네가 교회 오기 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았노라.”
↳“네가 예배 드리러 오기 전에,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았노라.”

-오늘 우리가 다 나다나엘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럼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 예배는 이미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이 기다려왔던 분임을 고백한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 임금으로 고백했다.
↳그렇게도 대망해온 메시야로 인정한 것이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대꾸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빌립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한 게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다나엘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도 기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만큼이나 기뻐한 사람이 있었으니,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친구 빌립이었다.
↳빌립은 평소 나다나엘이 경건하고 영적 센스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예수님과 말 몇 마디 나누더니,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게 아닌가?
↳그러니 빌립은 더 없이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씀하셨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 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예수님이 그만큼 기뻐하는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보다 부족하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기쁨의 표현을 자제하시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놀라느냐’는 것이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씀인 것이다.

-살아오면서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으로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하셨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한 말씀을 더하셨다.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편견으로 마음이 닫혀있을 때는, 하늘문도 닫혀 있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예수님을 몰라봤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만났을 때, 편견이 녹아 내렸고,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닫혀 있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는지부터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다.
↳편견으로 내 마음이 닫혀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자.
↳내 마음을 닫고 있으면, 무슨 말도 귀에 안 들어온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왜 하늘이 닫혀 있는지 불평하지 말고, 어떻게 하늘 문을 열 수 있을까 고민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마음 문을 열어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문 밖에서 노크하고 계신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온갖 좋은 것이 예수님께 있다.
↳진짜 좋은 것은, 다 위로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돌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을 향해, 교회를 향해, 가족을 향해,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자.

-나다나엘은 어떤 사역을 했는지, 성경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또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대부분의 제자들처럼 알기 어렵다.
↳다만 전해져 내려오는 교회의 전승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로 가서, 부르기아,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 주변에서 복음을 전했다.

-히에라볼리에 머무는 동안, 빌립과 함께, 그 지역 로마 총독의 부인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 부인이 그리스도인 되었다.
↳그러자 남편인 로마 총독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일로 빌립은 순교하였고, 나다나엘은 특별사면을 받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인도를 거쳐, 아르메니아에까지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다나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기도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말씀묵상의 사람이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끝까지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기도와 말씀이 기본이다.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 시대이다.
↳위기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다시 기도의 자리를 찾고, 말씀의 자리를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