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2: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0-03-01 12:31
조회
221



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2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9)
2020. 3. 1.


프롤로그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어 복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아브람의 인간적 조건이 좋아서나, 무슨 훌륭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아브람이 복의 사람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보게 된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복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첫발을 내딛는 아브람이, 어떻게 하는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는 이제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루하루 살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흔히 ‘복을 받았다’ 하면, 생활이 안정된 상태를 생각하는데, 아브람은 오히려 모험을 선택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브람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간 것이다.

-믿음 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곤욕이다.
↳강연이나 강좌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설교는 아니다.
↳믿음 없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인내심 테스트다.
↳또 ‘뭘 하라’고 하지를 않나, ‘뭘 드리라’고 하지를 않나... 부담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이 복이다.
↳설교가 이 시간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믿음과 말씀과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언제 생긴다고 하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렇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이미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새로 ‘생긴다’는 의미보다는, ‘더해진다’ ‘자라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길 원한다면, 예배 때 말씀을 잘 듣기 바란다.
↳보다 믿음이 더해지길 원한다면,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잘 경청하기 바란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전파하는 자”를 꼭 설교자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설교자가 세워진 일차적인 목적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 안이라고 믿는 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분명히 있다.
↳그럼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세움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선교사인가? 그렇다.
↳“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면 그렇지, 나야 내 내 믿음 지키는 것도 벅찬데...”
↳혹시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는가?
↳생각이 너무 앞서 간 것이다.

-누가 선교사인지를 한 번 정리하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선교사이다.
↳그리스도인은 ‘가는 선교사’이든지, ‘보내는 선교사’이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
↳해외에 나가서 선교사로 살든지, 국내에서 선교사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

“나는 우리 가정의 선교사입니다.”
“나는 우리 일터의 선교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데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이다.
↳우리는 평생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빚을 갚아나가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한 사람은 아브람이고, 다른 사람은 롯이다.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갔다.
↳롯은 아브람과 함께 갔다. 즉 그는 사람을 따라간 것이다.

-두 사람이 가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는 신앙이었고, 롯은 사람을 따라가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혹 잠깐 흔들리다가도 자리로 돌아오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따라가는 신앙은, 인생의 위기가 닥치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자칫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다.

-아브람처럼 말씀을 따라가기 바란다.
↳말씀에 뿌리 내린 신앙생활을 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힘들어도 “아멘”하고 따라가기 바란다.

-롯처럼 사람 따라다니지 않기 바란다.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따르기 바란다.

-목회자는 말씀의 통로요 운반자이다.
↳교우들의 신앙을 말씀으로 안내하는 가이드이다.
↳교우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헬퍼요 소울메이트 soulmate 영혼의 동반자
소울메이트이다.

-사람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는 게 있다.
↳실망과 상처이다.
↳목회자도 불완전한 사람인지라 마찬가지다.

-목회자를 가까이 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목회자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예수를 따르지 않고 바울을 따랐다.
↳또한 아볼로를 따랐고, 베드로를 따랐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되었는가?
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교회 내에 분파가 생기고 분쟁이 터지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봐야 하는데, 자꾸 자기를 보는 거 같으니까, 바울이 답답한 심정으로 토로했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교회 안에 오죽 분파와 분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바울이 그런 편지를 보냈겠는가?

-유일한 구원자 예수만 바라보기 바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바란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미 늦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브람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칠십오 세에, 자기 삶의 터전을 훌쩍 떠나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점에 있어, 아브람의 자세는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로 하여금 모험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믿음의 힘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삶을 홍해에 수장했듯이, 예수를 만나기 전의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장사지냈다.
↳우리는 인생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넘긴 사람들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예수 길이 맞다.
↳우리가 붙잡은 예수 진리가 옳다.
↳우리가 얻은 예수 생명이 진짜이다.
↳그 길에서 끝까지 일탈하지 않기 바란다.
↳그 진리에서 마지막까지 붙들고 가기 바란다.
↳그 생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어있기 바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혹시 신앙 생활해오면서, 언제부터인가 중단하고 있는 것이 없는가?
↳새벽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심야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중보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성경 읽기를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간 기도를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십일조 생활을 중단하고 있지 않는가?
↳중단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기 바란다.

-아브람의 순종의 질을 살펴보겠다.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나 이 말씀에 비춰보면,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순종이었다.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순종이었는가?
① 아내 사래
❷ 조카 롯
③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

-아브람이 왜 롯을 데리고 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자기가 큰 아버지로서 아버지를 일찍 잃은 조카를 떼놓는 게 어려웠을지 모른다.
↳아니면 미지의 세계를 떠나면서, 아무래도 롯이 같이 있으면 의지가 될 것 같아서였을지 모른다.
↳어떤 이유였든지, 아브람의 순종이 완전함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그대로 본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아브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성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속성 신앙 같은 것은 없다.
↳속성 신앙은 부실 신앙이 될 뿐이다.
↳나는 비약적 발전보다 단계적 발전을 더 신뢰한다.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좋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듯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듯이, 믿음 생활도 비슷하다.

-아브람의 가나안까지의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마침내” 라는 단어를 통해서다.
↳아브람 일행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하란에서 남쪽인 가나안으로 내려오는 길은, 크게 두 길이 있었다고 한다.
↳해변 길이 있었고, 왕의 대로가 있었다.
↳이 두 길 다 넓고 잘 다듬어진 길이었다.
↳고대로부터 이 길들은 약대상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각 지역의 토산품을 비롯한 값진 물건들을 낙타에 싣고,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길이었다.
↳자연히 도로 주위에 많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이 길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운이 나빠 길을 가다가 군인들이라도 만나면, 영락없이 ‘거지’를 낮잡아 이르는 말.
비렁뱅이가 되기 십상인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아브람은 이 두 길을 피하고, 당시 약대상들이 유사시에 비상 통로로 이용하는 길을 택했다.
↳요단 강 서편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샛길을 따라 내려온 것이다.
↳낙타나 나귀를 타기보다는 걸어야만 되는 길이었다.
↳숨도 차고 발도 부르텄을 것이다.
↳아브람이 혼자 오는 것이 아니고, 식솔들과 딸린 것이 많기에, 아마 위험한 길보다 힘들어도 안전한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람 일행은 멀고 먼 길을 지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대해, 아마 기대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예비군 훈련장에도 걸려있는 현수막 한 장도 걸려있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있는가?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마침내’ 도착했더니, 가나안 원주민들이 먼저 진치고 있었다.
↳그들은 아브람을 향해, “야, 너희는 어디서 굴러먹던 인간이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험한 뜨네기들’로 보였을 뿐이다.
↳하나님께 속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브람이 처한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상수리나무를 신성시했다.
↳날씨가 더운 지방에서, 그런 나무가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모레”는 ‘선생’, ‘예언자’라는 뜻이 있다.
↳모레 상수리나무를 ‘예언을 하는 신성한 나무’로 볼 수 있겠다.

-가나안 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제사를 드리곤 했다.
호 4: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가나안 제사의 특성상, 음행과 간음이 나무 아래서 행해졌고, 그를 본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세아가 책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하란보다 나을 게 없어보였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지만, 뭐 크게 달라보이지도 않았다.
↳이게 아브람의 딜레마였다.
↳‘내가 과연 이곳으로 온 것이 바른 결정이었는가?’
↳아브람의 머릿속은 다소 복잡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라.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갈등의 소지가 항상 있고, 언젠가는 폭발할 여지가 있다.
↳이래저래 아브람은 고민이 깊어졌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다.
↳아브람한테 네 자손이 생길 것이고, 그 자손들이 이 땅을 자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람한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평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시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완제품을 주시지 않고, 원자재를 주신다.
↳하나님은 조각품을 주시지 않고 원석을 주신다.
↳하나님은 도자기를 주시지 않고 흙을 주신다.
↳하나님은 밥을 주시지 않고 쌀을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원자재를 가지고 완제품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석을 가지고 조각을 새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이 주신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빚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이 주신 쌀을 가지고 밥을 짓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은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쌈을 해서 교회로 밀어 넣는 분이 아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신 분이다.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 방식은, 십자가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스타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확인시켜 주실 때, 아브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자.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인하여 제단을 쌓았다.
↳아브람이 지금 좋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맘 편히 예배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예배드린 것이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 가운데 머물기를 좋아한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만은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가 있다. 그게 예배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가 있다. 그게 예배이다.
↳우리가 하는 사역의 정신이 예배에서 나온다.
↳우리가 하는 선교의 힘이 예배에서 나온다.

-어떻게든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기 바란다.
↳주일축제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바란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기 바란다.

-가나안의 종교는 자기중심적이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을 위해 예배드렸다는 의미다.
↳우리의 예배가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자기중심적인 예배자에겐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 마음 편하고, 자기 가족 건강하고, 자기 사업 잘되고 그러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하면 할 말이 없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하면, 한 2-3분하면 할 말이 없다.

-흔히 예배가 회복돼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회복하자는 말인가?
↳회복이라는 말이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자기중심적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드리는 예배가, 자기중심적 예배인가, 하나님 중심적 예배인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자.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을, 기도한 것으로 보면 된다.
↳아브람이 거기서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
↳먼저는 자기를 복으로 불러주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까지 도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가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딛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불편한 게 어디 한 두 가지였겠나?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게 신앙인의 자세 아니겠는가?

-노아와 비슷하지 않는가?
↳그가 방주에서 내렸을 때, 세상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폐허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최초로 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다.
↳이게 부름 받은 복의 사람의 태도이다.
↳축복의 통로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한다.

-아브람은 비록 지금은 조그만 땅에다 장막을 치고, 어찌 보면 난민 비슷한 신세지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 자손에게 주실 것을 확신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창 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보통은 죽으면 고향에 묻는데,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람은 결정적일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런 아브람에게도 믿음의 고비가 찾아왔다.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결국 애굽까지 가고 말았다.
↳애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다.


에필로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자.
↳하다가 중단한 거 있으면, 다시 시작하자.
↳자기중심적 예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자.
↳좀 부족해도 감사하고, 좀 힘들어도 믿음의 반응을 보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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