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2019):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요 20:11-2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4-21 00:00
조회
703
부활절(2019)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요 20:11-20)

2019. 4. 21.



프롤로그

-터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1700년 된 성 소피아 사원이 있다.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특별한 보고서가, <가이드 포스트>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보고서의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이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로서, 대단히 중요한 문서이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대체로 성경의 기록과 비슷하다.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무서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 본디오 빌라도”

-기독교는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을 왜곡해서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믿으라고 한다.

-초대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보고 들은 것”은 사실을 말한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은 명백한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 부활이 과거적인 사건이라면, 부활의 주님은 오늘의 사건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때 부활하셨던 예수님이, 지금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 곁에 살아계신다고 믿는 게 중요하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물로 빈 무덤을 든다.
빈 무덤도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빈 무덤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된다.
2000년 전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입술만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무덤에 가둬놓고 산다.
부활의 예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
예수님이 자기 삶을 다스리지 못하게 한다.
간섭하지도 못하게 한다.
헌신도 요구하지 못하게 한다.
그게 주님을 무덤에 가둬놓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그건 예수님을 죽은 자 취급하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호흡하기를 원하신다.
날마다 우리와 만나서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신다.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에게 평강을 선물하고 싶어 하신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여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그 사체는 서둘러 내려진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할 수 있는 시간은, 2~3시간 아니면 1~2시간 정도였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그리고 몇몇 여인들이,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품을 바르고 베옷을 갈아입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니 얼마나 서둘렀겠는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돌아가신 것이지만, 장례마저 서둘러 치렀기에, 너무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리아는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어쩌면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를 강권한 것이다.

-그런데 어둠 사이로 보니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져 있다.
예수님의 무덤 문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무덤 앞에 막아놓은 그 육중한 돌이, 한 쪽으로 밀쳐져 있는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에나!!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참이나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 오셔서 말을 거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기에, 애타는 심정으로 부탁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다.

“마리아야”
“여자여!” 할 때는 예수님을 몰라봤는데, “마리아야!” 하니 주님인줄 알아봤다.

-이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떠했을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른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에 한번 그려보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말자, 마리아의 슬픔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이런 은혜가 임한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슬픔이 아주 없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인생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도 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
겉으로는 웃지만 뒤에는 남모르는 눈물이 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슬퍼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으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슬픔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분을 만나지 않고는 눈물 젖은 인생을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병약한 가운데에서도 뜨거운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던 리디아 백스터(Lydia Baxter) 여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예수 이름을 믿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을 얻는다는, 리디아 백스터 여사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대학교수이다.
예수를 오래 전에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만큼 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성경의 내용을 비판하고 따지는 것을 능사로 알았던, 약간 교만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신 것을 과거형으로 알았다.
과거형으로 알고 있다는 말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로 관계가 없이 지냈다는 말이다.

-그러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1년 가까이 지났지만 남편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이렇게 고백했다.
"고난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외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울보가 된 축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직 남편은 의식도 안 돌아왔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만큼 슬픔에 젖어 있어야 할 상황에서, 슬픔을 딛고 기뻐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이 그를 만나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슬픔의 골짜기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슬픔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슬픔과 맞닥뜨려 싸워야 한다.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건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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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한다.
열 명의 제자들이다.

-왜 열 명의 제자들인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고, 도마는 어디 갔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열 명의 제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유대인들이 언제 들이닥쳐서, 자기들도 잡혀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이 허다한 무리에게 환영을 받을 때, 그들은 우쭐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할 때, 자기들이 뭐나 된 양 굉장히 흥분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숱한 기적을 행하실 때,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아주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믿었던 스승이, 그렇게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엄청난 기대를 했건만 너무나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자신감도 잃고 용기도 사라지고 없다.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두려움뿐이다.
밀려오는 공포감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杜門不出)할 수밖에 없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신다.
죽은 줄로만 알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서 계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봤다.
그들도 처음에는 미심쩍어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그랬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이 죽은 예수님이 유령으로 오신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신다.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주님이 일부러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허리에 있는 창 자국을 통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게 된다.
흔히들 의심의 대명사로 도마를 치지만, 사실 열 제자가 다 의심했음을 알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을 확인한 제자들의 반응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여기서 “기뻐하더라”의 원어 ‘카이로’는 ‘은은히 행복하다’는 뜻이다.
뛸 듯이 기뻐한 것과는 좀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표현했다.

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재미있게 표현하지 않았는가?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거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의 행복이 되셨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의 기쁨이 되셨다.
기운을 잃고 축 처져있는 그들의 어깨에 다시 힘이 생겼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다.

-누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다.
다시 어깨에 힘을 얻을 수 있다.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환경의 공포가 있을 수 있다.
현실의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천하의 욥에게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다.

욥 3: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은 부자이고 성공한 사람이다.
열 자녀를 다 잘 키워낸 사람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방의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무서워하던 것이, 어느 날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미국 주요 신문에 칼럼 리스트로서, 상담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어떤 분은 한 달에 만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
한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와서 그 만 통이 넘는 편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가?
공포였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을 보고 나면, 믿음의 눈이 열린다.
믿음의 눈은 긍정적인 눈이다.
믿음의 눈은 가능을 보는 눈이다.
불가능의 눈으로 보면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온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진다.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요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 있다.
예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믿는 부활의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사망이 왕노릇 하는 세상을 이기셨다.
그분이 죄가 관영한 세상을 이기셨다.
그분이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기셨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은,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아라’는 뜻이다.
‘나만 믿고 나만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너희들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임을 믿으라.
부활의 주님 대장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면 이길 수밖에 없다.

-바울은 자신 있게 고백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무슨 일에?

“이 모든 일에”

-이 모든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롬 8:35b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하나같이 고통스런 일이요, 두려운 일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곧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한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사람의 생각이 변한다.
사람의 생각이 변하면 환경은 따라서 변한다.
사람의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환경이 변해도 소용없다.
비록 마리아처럼, 열 명의 제자들처럼, 울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해도, 부활의 주님이 개입하시기만 하면, 울음이 웃음으로, 슬픔의 환경이 기쁨의 환경으로, 아픔의 현장이 축제의 현장으로 바뀔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