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14: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창 17:15-2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0-06-21 12:43
조회
860



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14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창 17:15-27)
2020. 6. 21.


프롤로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하시며 요구하신 것이 있다.
↳그게 다름 아닌 할례이다.
↳그러니까 할례는 언약의 표징인 것이다.

-그럼 할례의 대상은 누구인가?
↳남자이다.
↳그럼 여자는 언약의 대상에서 제외된 건가?
↳그렇지 않다. 그건 대표성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스라엘 남자는 되고, 이방인 남자는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방인 남자도 된다.
↳대신 조건이 있다.
↳그건 아브라함의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아브라함의 집안에 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신자도 사랑하시고,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도 사랑하시지만..., 구원은 교회 안에 있는 신자에게만 해당된다.

-언약의 표징을 왜 하필 그곳에 하라고 했는가?
↳언약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히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말 중요한 것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새로 난다는 의미이다.
↳새로워지는 것이고, 속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위로부터 거듭남이고, 속사람의 변화인 것이다.
↳속사람의 변화 없는 종교 의식은, 심하게 말하면 껍데기 신자들의 종교 놀음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꿔주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내의 이름도 바꾸라고 하신다.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본래 사래였는데 사라로 바꿔주신다.
↳사래와 사라의 차이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뜻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사래라는 이름은 ‘나의 사라’란 뜻이다.
↳사라라는 이름은 ‘여주인’ ‘공주’이라는 뜻이다.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었다는 말은, ‘나의 여주인’에서 그냥 ‘여주인’으로, ‘나의 공주’에서 그냥 ‘공주’로 바뀐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게 그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까지 사라는 오직 아브라함의 여주인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공주 같은 존재였다.
↳참으로 사라를 존귀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사라는 어떤 존재였는가?
↳불임 여성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요즘에야, 결혼도 선택이고, 결혼하고도 아이를 갖지 않기도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자식 없는 것이 한이 됐으면, 자기 몸종을 들여보내서라도, 자식을 낳으려고 했겠는가?
↳사라는 뛰어난 덕성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존대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미모와 덕을 겸비한 사라를 낮추셨다.
↳왜 그렇게까지 초라하고 비참하게 낮추셨을까?
↳아마 사래가 이름처럼 공주병에 걸려있었던 거 같다.

-하나님은 ‘공주병’에 걸린 여자를, ‘믿음의 어머니’로 ‘만인의 여주인’으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병’에 걸린 여자를 아닌 ‘진짜 공주’로 만드시려고, 그 동안 철저히 낮추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라를 낮추신 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참으로 그녀를 높여주기 위해서이다.
↳높아지기 전에 반드시 낮아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공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많은 무리의 여주인으로 높이시려고, 몸종에게 괄시를 받게까지 낮추셨다.
↳몸종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게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계속 그렇게 방치해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그녀를 높이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전조로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바꿔주신 것이다.
↳높여주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사라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전에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해도, 꼭 사라에게서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분명하게, 사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좋아서 웃고 있는 게 아니다.
↳무척 감격해서 웃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웃음은 어디까지나 불신에서 나온 웃음이다.

-그가 속으로 한 말이 그걸 말해준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속마음과 겉으로 표현되는 말이, 좀 다를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말 바꾸는, 정치인들의 말은 더 그렇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말을 내던지고, 주어 담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항상 진실인 말이 있다.
↳그 사람이 속으로 하는 말이다.
↳심중에 하는 말은, 항상 진실하다.
↳아브라함의 진심은, 그가 엎드려 마음속으로 한 말에 드러난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나님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누가 봐도 웃을 얘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다면, 이제 환상을 깨야 한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지적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부터, 아들을 번제로 드릴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인내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오래 참음의 소산이다.
↳우리가 이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 역시 하나님의 인내의 작품임을 인정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자식 문제로 더 이상 고통을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마엘로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사실상 끝내버렸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브라함은 끝내버린 문제였지만, 하나님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이런 일이 있다.
↳‘잊고 싶은 문제’, ‘깊이 묻어두고 싶은 문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문제가, 한두 가지 정도는 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잊고 살아간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자식 문제가 그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또 자식 문제를 들추어내신 거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 다 끝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문제를 다시 들추어내어 뭘 어쩌자는 겁니까? 이제 그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잘 봐주십시오.”
↳살을 붙여서 풀면 뭐 이런 뜻이다.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의 현주소이다.
↳아브라함은 지난 20여 년 동안 수없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했다.
↳겉으로는 진실로 믿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믿음의 사람으로 보였지만, 지금 그의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를 표면적으로 뭐라 내세우는가?
↳나이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아내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꼭 ‘그냥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자신의 상속자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스마엘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으로 주어진 아들이 가득 차 있으니,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믿음의 아들이 눈에 보일 리 만무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원 뜻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당돌하게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
↳나름대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기도했지만, 기도한 것과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크게 실망한다.
↳깊은 좌절과 낙담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확신한 것이 하나님의 원뜻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목매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아닐 수 있다.

-간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차선책을 허용하시기도 한다.
↳자녀가 하도 조르니까, 좋으신 아버지께서 우선 허락하신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에는 최선책을 적용할 시점을 찾고 있다.
↳그런데 못난 아들은 차선책에 만족하고, 막상 최선책이 제시되었을 때 거부한다.
↳자기가 우긴 거 생각은 안 하고, 아버지가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불평을 터뜨리곤 한다.
↳어쩌면 이게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한 마디로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니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만은 “아니라” 하신다.
↳우리는 “아니라”를 기도 응답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고집이 있다.
↳때로는 말도 안 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기도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기도인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 기도인가?

-“기도란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설득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 사항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최선책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니라”고 하신다.
↳이때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아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보여주시고, 더 유익한 길을 열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잘못 되어서, 이삭을 택한 것이 아니다.
↳사람 차별하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하여 태어날 이삭으로, 언약의 자손을 삼으실 뜻을 일찍 세워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도 미리 지어놓으셨다.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름부터 지어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토록 철저히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더 이상 고집부리지 못하도록,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사라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아들이고, 그 아들의 이름은 이삭이고, 이삭을 통하여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엔 언제나 “아멘”할 수 있다.
↳그분의 약속은 언제나 “예”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아멘”할 것인지를 준비하고 말씀을 듣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차이가 난다.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교회가, 참으로 은혜로운 교회이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사랑하신다.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그가 비록 언약의 아들이 아니긴 했지만, 그에게도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스마엘도 이삭 차원으로 대우하시겠다고 말씀이다.
↳이삭에게 주는 복과 별다를 게 없지 않는가?
↳아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수긍을 하면서도,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었나 본다.
↳‘그럼 이스마엘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결코 이스마엘을 잘못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네 말을 듣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기만 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삭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나와 다른 편에 있는 사람도 사랑하신다.
↳그 사람들에게도 햇볕과 공기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편만 사랑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편도 사랑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독점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좀 더 구체적인 약속을 하신다.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아들 이삭이 태어나는 시기까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 시기가 언제인가?
“내년 이 시기에”
↳즉 내년 이맘때이다.
↳내년 이맘때에 출산하기 위해서는, 사라가 언제쯤 임신해야 하는가?
↳약 2개월 후에 임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밤 당장’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이삼일내로 사라에게 태기가 있고, 바로 입덧을 시작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짜인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끝까지 믿는 것이 믿음이다.
↳중간에 돌아서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이 인내이다.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참 인내가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믿어야 한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만 붙들기 바란다.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주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기 바란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실했다.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아브라함을 붙잡고 24년을 씨름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내년 이 시기란 말씀을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셨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남아 있다.
↳공이 아브라함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이 하기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이 믿으면 언약이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아브라함이 포기하면 언약이 무효가 되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분명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껍게 쌓여진 아집이 깨졌다.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이에”는 “바로 그 날”을 가리킨다.
↳바로 그 날이 언제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포피를 베라고 말씀하신 날이다.
↳동시에 내년 이 시기에, 아들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날에” 자신을 따라 살았던 부끄러운 과거를, 단호히 제거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이 아닌 이스마엘을 바라보고 살았던 잘못을, 과감하게 잘라낸 것이다.

-내 생각대로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믿는 것도 위로부터 난 믿음이 아니다.
↳참 믿음이란 “말씀하신 대로” 믿는 것이다.
↳바로 믿기 위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으려면 “말씀하신 대로” 믿어야 한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말씀 위에 신앙의 기초를 쌓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하루하루를 말씀과 동행해야 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말씀의 조명과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에서 “아니라” 해도 “아멘”해야 한다.
↳그럼 말씀에서 “명년 이 기한에” 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아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3절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갖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
↳자기 식으로 믿고, 자기 식으로 주장하고, 자기 식으로 행동하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제는 하나님 방식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는 고백이다.
↳그 결단의 의미로,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가?
↳할례를 했다.
↳자기 혼자 했는가?
↳아니다. “말씀하신 대로” 자기 집에 거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행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라고 했다.
↳또한 할례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표요, 헌신의 표시였다.

-할례를 행할 때, 포피를 베어내는 것은 아픔이다.
↳특히 99세에 변변한 수술 도구도 없이, 성기의 포피를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도 수술하고 나면, 삼일 정도는 무척 힘들다.
↳아브라함은 포피를 자르면서,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결심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말씀을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결단했을 것이다.

-그렇다. 믿음은 결단이다.
↳몇 가지 시험해 보고 비교해서,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험이다.
↳확인하고 나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한 가지씩 확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 포기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붙잡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인정하고, 자기를 비우고 예수로 채우는 것이다.

-우리 일생에 이런 결단이 꼭 한 번은 있어야 한다.
↳눈물 코물 쏟아가며,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 한 목숨 기꺼이 드리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내게 있는 그 무엇보다 심지어 내 목숨보다 주님이 귀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이런 헌신의 기도가 있었는가?
↳이런 울음 섞인 고백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말씀하신 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아버지와 아들이 한 날 한 시에 할례를 받았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할례를 먼저 행함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약속의 자녀를 받을 준비를 시키신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고 은혜 받는 것을 급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더 급한 것은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다.
↳더럽고 수치스러운 옛 생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준비만 되어 있으면 채우시는 것은 금방이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준비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혼을 보내주셨을 때,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도록 힘써 준비하는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다.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할례는 다른 신체 부위를 베어서는 안 된다.
↳꼭 그 부위, 성기의 포피를 베야 한다.
↳반드시 난지 팔 일만에, 그 자리에 칼을 대어야 한다.
↳이게 “말씀하신 대로”의 신앙이다.

-우리의 과거에 불신의 웃음이 있었을 수 있다.
↳지금도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간혹 불신의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불신의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신의 웃음”의 신앙에서 “말씀하신 대로”의 신앙으로, 과감하게 탈바꿈하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