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6: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고전 15:1-1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7-21 00:00
조회
1906



고린도전서 강해 26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고전 15:1-11)
2019. 7. 21.

프롤로그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다.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다.

-미국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고 하는 청년이, 바턴이라고 하는 거상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워싱턴가에 소매상을 하나 차리고 싶은데, 2천 불을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담보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을 들은 바턴은 담보물이 없이는 돈을 빌려 줄 수 없다고 하자, 그 청년은 낙심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턴은 그 청년이 생각이 나서, 동료 사업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에게 담보도 없이 2천 불을 빌려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세계 대공황이 닥쳤을 때, 바턴의 사업도 도산하고 말았다.
그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스트로사였다.
찾아와서는 바턴의 부채를 갚아주려고 했다.
바턴은 놀란 눈으로... "아니, 그때 그 돈은 벌써 다 받았는데 뭘 또 준다는 거요?"
그러자 스트로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아닙니다. 빌렸던 돈은 모두 갚았지만, 도와주신 은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당하고 계신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했다.

-두 이야기는 주제가 같다.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인 거 같은가?
은혜이다.
그런데 내용이 다르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몰랐다.
그들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은혜를 알았다.
그는 은혜를 기억했고, 은혜를 빚으로 여기다 갚았다.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 부류의 사람을 예시한다.
사람들이 받은 은혜 앞에서 제각각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일찍이 킬론은 말했다.
“은혜를 베풀고는 그것을 기억하지 말고,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결코 잊지 말라.”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를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은혜를 베풀고는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은혜를 베풀고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를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자기가 베푼 은혜 생각이 난다.
자기가 그에게 괜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후회 막심함이 밀려온다.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베풀었다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받았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미국의 레만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다.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심지어 우리는 왜 내가 하나님이 은혜를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유명한 부흥사인 휘틀은 이렇게 고백했다.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그럼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 중에, 특히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선명하게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났다고 봤다.

-바울이 처음에 고린도에 갔을 때 영적인 슬럼프였다.
아테데에서 자신의 실력과 심혈을 기울여서 복음을 전했지만, 소수의 결신자를 얻었다.
한 영혼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의 영혼 추수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성적표였다.
그래서 아주 지친 상태로 고린도에 와서,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 전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가 타락의 도시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고린도교회가 세워졌다.
목회자이기보다 선교사에 가까웠던 바울은, 고린도교회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나 있을 때, 고린도교회에 다양한 문제가 생겼다.
고린도교회는 문제 종합세트였다.
그것들에 대해 기도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14장까지 지났다.

-15장에서는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린도교회 내에 부활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했지만, 같은 유대교 분파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부인했다.
헬라인들은 영혼 불멸을 믿었지만,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고린도교회가 헬라권에 있기 때문에, 부활을 육신을 벗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믿었을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도 문제지만, 부활에 대한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부활의 복음을 처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미 전했던 복음이다.

-하지만 전한 것을 들은 것하고 아는 것은 다르다.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바울은 전한 복음을 그들에게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재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고린도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 그 위에 섰다.“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하지만 교회가 다양한 문제로 분쟁을 겪으면서, 복음이 희석되고 말았던 거 같다.

-그들의 논쟁이 진리 문제가 아니었다.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말미에 부활의 복음을 재교육하고자 했다.
재교육, 반복교육, 계속교육이 필요하다.

-들어본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진짜로 아는 것이다.

-어성경 워크북 교재로 몇 번이나 들었다.
목회자 집중세미나 때 들었다.
전문강사가 되기 위한 스쿨에서 들었다.
실체성 시간에 학생들에게서 들었다.
팀티칭 시간에 또 들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강의를 하려고 하면 쉽지 않다.
재교육이 필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포항남노회에 훈련원이 있다.
올해는 장로계속교육이 있다.
장로님들 사정이 있어 교육 신청을 하지 않았더니, 의무교육인데 신청을 하지 않았다며 한 소리 들었다.
장로계속교육만 하는 게 아니다.
목사계속교육도 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반복학습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복음을 내 몸에 익히는 것 곧 체득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내 몸으로 살아내는 것 곧 체현할 수 있다.
복음을 체득하지 않으면, 복음을 체현할 수 없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소원은 단순했다.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이 복음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건 우리를 향한 성경의 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의 은혜를 주셨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은혜로 주셨다.
그런 게 있다고 소개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제대로 믿고 제대로 살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바울 자신이 피땀을 쏟아 세운 고린도교회다.
그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에게, 무슨 별다른 것을 바라겠는가?
구원...
오직 그들이 구원받기만을 바랐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했다.
그 사람을 향한 전도자의 소원이 뭐겠는가?
그 사람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게 가장 결정적이다.
교회에 봉사하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교회 봉사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교회 사역은 구원받은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은혜로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해야 기쁨이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나온다.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바울은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생명을 걸었다.
그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곧 은혜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사명이 왜 가치가 있는가?
사명은 자신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게 아니다.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위해 살아갈 때, 비로 거듭난 인생이 된다.

-<말씀 앞에서>라는 찬양이 있다.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주께 홀로 섭니다생명의 말씀 읽고 순종해주를 예배합니다
기록 된 말씀 힘이 있어서진리로 우릴 거룩케 하며거룩한 말씀 세세 영원히복음이 되어 말씀하시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한 사람 찾으시는주님의 약속을 믿어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순종하며 주 따라가는 자영원한 하나님 나라이뤄갈 주의 교회여 일어나라

-그렇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이다.
하나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이다.
어떤 사람이 사명자인가?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이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을 부활의 증인을 통해 말하고 있다.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첫 번째 증인으로 게바를 앞세우고 있다.
이어서 열두 제자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만으로는 확실성이 부족하다.
증인이 두 세 사람보다 훨씬 많지만, 한 통속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증인의 폭을 넓히고 있다.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일을 들고 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증인이 있어도, 증인이 살아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
죽은 자는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두 사람은 증인으로 매수할 수 있다.
십여 명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증언을 막을 수 있다.
오백여명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증인이 있다.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바로 야고보이다.
주의 동생 야고보로 보인다.
한 사람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본래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손아래 동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부모님 다음으로 잘 알았다.
어떤 것은 부모님보다 더 잘 아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집을 나갔고 한 동안 잠잠하더니,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야고보가 예수님이 믿어지겠는가?
그러다 3년쯤 지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것을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자기를 만나주셨다.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천하의 야고보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으로 나온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야고보가 예수님을 만난 것 못지 않게 극적으로 만난 사람이 있다.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린도전서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다.
그는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그런 자신을 부활의 예수님이 만나주셨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는 예수님을 몰랐다.
아니 예수님한테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조용해질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 의해 예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실력 있고 의협심이 강한 자신이 전면에 나섰다.
그래서 교회를 박해하였다.
성도들을 잡아들이고 죽이기까지 했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출발했다.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호기롭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떠났다가, 그만 예수님한테 붙잡히고 말았다.
곱게 잡히지 않고 완전히 떡이 되고 말았다.
그가 받은 심적 영적 종교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눈을 뜬 그날부터 생명을 걸고 부활의 예수를 전했다.
그렇게 그는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지금까지 외길 인생을 달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자신의 교회를 박해했던 과거 행적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다.
바울은 내면에 이런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들어서 사도로 써주신 것을 은혜로 여겼다.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누구보다 사도로서 많이 수고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랑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목회를 은퇴할 때의 고백이고 싶다.
더 나아가 인생을 졸업할 때의 고백이고 싶다.

-1725년 런던에서 부유한 선장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엄마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그를 무릎에 누이고 성경을 읽어 주곤 했다.
엄마는 자기 아들이 나중에 목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6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엄마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공부를 배우다가, 열한 살에 아버지를 따라 선원이 되었다.
그 후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다.
그는 노예선 선장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끔직한 많은 죄를 지었다.

-1748년 아프리카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을 지나 런던으로 돌아오는 중에, 큰 폭풍을 만났다.
폭풍은 열하루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와 선원들은 흔들리는 배위에서 사투를 벌이던 중, 배가 거의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지난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었던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예상인으로서 지었던 추악한 죄들을 떠 올리면서,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의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오게 해 주셨다.

-그 때 이후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일이 있고는 6년이 지나서, 그는 선장을 그만 두고,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779년에 자신의 노예선장 때의 죄를 회개하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 썼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바로 존 뉴톤이다.
그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쇠약한 몸으로,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나는 옛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기억합니다. 내가 큰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존 뉴톤 역시, 어떤 목회자보다 더 많이 수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가지만 기억했다.
내가 큰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위대한 구세주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다.

-그건 바울의 고백이요, 존 뉴톤의 고백이요, 동시에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나나 그들이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이거 알면 된다.
그러면 말씀에 생명을 걸 수 있다.
그러면 주저함 없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다.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