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4:우리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4:1-2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6-23 00:00
조회
908
고린도전서 강해 24
우리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4:1-25)
2019. 6. 23.

프롤로그

-신령한 것과 신성한 것은 다르다.
은사는 신령한 것이지 신성한 것이 되면 안 된다.
은사를 신성하게 여기면 은사주의자가 된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과 기도보다 은사를 앞세운다.
말씀이 은사를 위해 존재하고, 기도가 은사를 위해 사용된다.
은사주의자들의 눈에는, 은사가 많은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다.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별로인 사람인 것이다.
은사가 계급이 되고, 은사가 영적 질서로 통한다.
하지만 교회 안의 어떤 것도 신성시 되는 순간 우상이 되고 만다.

-또한 신령한 것과 신비한 것도 다르다.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자’라고 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의 상대 개념을 신령한 자라고 했지, 신비한 자라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를 ‘신령한 노래’라고 했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속적인 노래의 상대 개념을 신령한 노래라고 했지, 신비한 노래라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받는 복을 ‘신령한 복’이라고 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받는 복의 상대 개념을 신령한 복이라고 했지, 신비한 복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우리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비한 것이 아닌, 신령한 것들을 사모해야 한다.
신비한 현상을 좇아가지 않고, 신령한 말씀을 좇아가야 한다.
신비한 현상은 나타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
신비한 현상을 믿음의 근간으로 삼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언제라도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물론 기독교는 지적인 요소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요소가 있다.
이 땅의 논리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신비한 내용이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신비한 종교인가 신비를 추구하는 종교인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이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와서,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주신다.
우리가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게, 말씀을 모르면 광신이 되고 맹신이 되기 때문이다.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말씀에 대해 무지한 것을 본다.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일명 ‘교회학교 출신’인데,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도 본다.

-물론 성경 지식이 없다고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니다.
성경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만으로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을 아는 만큼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다.
사람은 딱 아는 만큼밖에 못 본다.
여행이 좋은 공부라고 하지만, 여행을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사전 학습을 하고 가면,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믿음의 세계도 그렇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고, 보는 만큼 살 수 있다.
나는 예수를 더 잘 믿고 싶어서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쓴다.
어성경도 그래서 시작했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좋아서 전문강사과정까지 마쳤고, 수요일에 교우들과도 나누고 있다.

-우리는 몇 주에 걸쳐서 은사에 대해 상고하고 있다.
바울이 12장부터 14장에 이르기까지, 은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준 덕분에, 은사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들 12장-14장까지를 은사장이라고 한다.
물론 13장을 따로 떼어내 사랑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난주에 사랑장을 “나는 사랑밖에 모르기로 했습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다.
은사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빠진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다시 한 번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추구하라고 한다.
일회성으로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계속해서 구하고, 반복적으로 구하라는 말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의 핵심은 자기 자랑에 있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은사 중에서도 방언을 최고로 쳤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교만했고, 방언을 못하는 자들은 그들을 시기했다.

-그러니 얼마나 예배가 무질서했겠는가?
공중예배가 아주 혼란스러웠다.
은사를 신성하게 여겨서,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난 것이다.

-예배가 큐시트대로 일분일초도 틀리지 않게 진행되는 것도 좀 그렇다.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작품을 올려드린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너무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제한될 수 있다.
그렇다고 틀도 없이 너무 자유분방하여,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예배도 바람직하지 않다.

-고린도교회는 후자에 속했다.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초대교회는 거의 그랬다.
그러니 사랑을 추구하지 않으면, 예배 때 마음이 상할 수 있다.
이미 성만찬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거룩해야 할 성만찬이, 빈부 간 파벌을 짓는 도구가 되었다.

-현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을 추구하지 않으면, 교회 안은 시험거리 투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일방적인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바울은 방언 문제로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한다.
예언이 특별한 은사이고, 방언은 평범한 은사라는 뜻이 아니다.
은사를 특별한 은사, 평범한 은사로 나누지 않는다.
은사는 좋고 나쁨이 없다.
은사는 높고 낮음이 없다.
모든 은사가 같은 성령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은, 예언이 방언보다 특출나다는 뜻이 아니다.
고린도교회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개인적인 교제를 목적으로 한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은, 개인기도를 할 때 방언으로 하면 된다.
그러면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방언은 특히 기도의 은사에 속한다.
크게 보면 그렇다.
하나님이 방언을 주신 것은 둘 중의 하나다.
더 깊은 기도를 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다.
방언을 줘서라도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특히 방언은 중보기도를 하기에 좋은 은사이다.
보통의 언어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듣게 되지만, 방언으로 하면 하나님만 들을 수 있다.
비밀이 보장된 기도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른 은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방언도 계속 써야 한다.
안 쓰고 묵혀두거나, 거둬 가 달라고 기도하면 거둬 가신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안 쓰고, 반납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바울이 왜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했을까?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방언의 은사가 평범하고, 예언의 은사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효용성면에서 그렇다.

-예언은 타인에게 덕을 세운다.
또 교회의 덕을 세운다.
우리는 예언하면 앞날을 맞추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말한다.
앞날을 예고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것이 예언의 전부는 아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도, 예언에 포함된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의 덕,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 예언의 목적이다.

-방언도 덕을 세우기는 한다.
그런데 교회의 덕이 아닌 자기의 덕을 세운다.
자기 신앙에 유익이 있다는 말이다.
자기 신앙에 유익이 안 되는 것들이, 사실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니, 분명히 좋은 은사요, 필요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이다.
분파와 분쟁으로 마음이 찢겨져 있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로 나눠져 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은사지만,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중보기도사역팀에 헌신하면 된다.
그럼 자기의 덕도 세우고 교회의 덕도 세울 수 있게 된다.

-바울은 결코 방언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오히려 다 방언 말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 것은 이유가 있다.
방언으로 인해 예배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이 낫다는 것이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서, 또 하나의 은사인 통역이 등장한다.

-통역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소개된 9가지 은사 중 하나다.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좋다.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를 하기는 한데,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모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증이 필요하다.
본인의 통역과 타인의 통역이 일치해야 진짜다.
항상 두 세 사람의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방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방언은 신비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전하는 예언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와서, 설교를 방언으로 하고, 양육을 방언으로 한다면, 교회에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통역하는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은, 그 약간의 차이가 약간이 아니다.

-사실 이단이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니다.
처음에 들을 때는 맞는 소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정말 수긍이 된다.
그러다 끝이 다르다.
결론을 다르게 내린다.
그게 이단이다.

-지금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약간의 차이가 부풀려져 편이 갈리고 당이 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확실한 가르침 즉 예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할 수 있지만, 그들은 굳이 방언으로 하려고 했다.
그 정도로 방언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 소음이다.
요즘 기타를 배워본다고 코드잡는 연습을 하며 씨름하고 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신이 노래를 안 부르면 무엇을 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맞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환갑 전에는 잘 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타로 소음 수준의 소리를 내고 있다.

-당시 전쟁의 신호는 나팔로 했다.
성경을 보면 나팔로 다양한 전쟁 신호를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나팔 소리가 분명하지 않다면, 전투를 준비할 수 없다.
모이라는 말인지 도망가라는 말인지, 공격하라는 말인지 기다리라는 말인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면, 전쟁에서 패배는 불을 보는 뻔하다.

-바울은 너도 나도 방언을 하고,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절제되지 않은 방언이 뜻 없는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역이 없이 뿜어내는 방언으로 인해, 외국어 경연장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공간, 같은 문화적 공간에 있어도, 언어가 다르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외국인이 된다.
얼마나 어색한 관계이겠는가?
이게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을 우선한 결과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한다.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의 덕이 되는 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한다.
교회의 덕이 되는 것은 풍성할수록 좋다.
교회 안에 바나바 같은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재덕을 겸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은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가 힘들다.
그들은 필연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자기 덕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면 조용한가 싶으면 또 소리가 나고, 조용한가 싶으면 또 소리가 나고, 그렇게 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잘 다듬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교회에도 자기에게도 덕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도 자기도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고 있다.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여기서 바울은 영과 마음을 구분하고 있다.
영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사람과 교제하는 것으로 쓴 거 같다.
보통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굳이 구분한다면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

-14, 15절 새번역이다.14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이어서 공동번역이다. 14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15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헬라어 ‘누스’를 개역개정에서는 마음으로, 새번역에서는 깨친 마음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이성으로 번역했다.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는 공동번역이 와 닿는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이성을 잃고, 무아지경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찬양도 그렇고 축복도 그렇다.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영으로 하는 게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 없다.
축복을 받는 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축복할 때 아멘으로 받아야 하는데, 못 알아들으니 아멘을 할 수 없다.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감사의 내용에 동의가 돼야 아멘이 된다.
그런데 못 알아듣는 말로 감사기도를 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

-축복도 그렇고 감사도 그렇다.
그냥 축복하고 그냥 감사하면 된다.
꼭 방언으로 축복해야 신령하고, 방언으로 감사해야 신령한가?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건 서로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다.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는 각종 방언을 말했다.
언어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가르칠 때는 이성을 활용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사실 설교도 그렇다.
신학교 다닐 때는, 한경직 목사님 설교가 시시해보였다.
너무 쉽고 평이해서다.
어쩌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설교하는 것은 쉽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나열해서 설교하는 것도 쉽다.
쉽게 풀어서 하는 설교가 더 어렵다.
일상어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가르치는 자는 어떻게든 진리를 쉽게 가르쳐야 한다.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방언으로 가르치는 것을 자제시키고 있다.
방언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르치는 자는 들리는 말로 가르쳐야 한다.
만일 교수가 자기 지식에 취해, 학생들이 못 알아먹는 말로 떠들어댄다면, 수업시간이 괴로워진다.
배우려는 열망이 있어도, 알아듣지 못하면 열망이 식게 된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하고 있다.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나 초신자는 방언하는 것을 보면, 혹시 이 사람이 미친 거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언을 들으면 양심의 책망을 듣게 되어 회개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게 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방언보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해야 한다.
거기에 서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자기 자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