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4: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마 9:18-2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983
마태복음 강해 24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마 9:18-26)
2016. 10. 9.


프롤로그

-이스라엘에는 오랫동안 왕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했다.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주세요” 했다.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웃 나라들에게 눈에 보이는 왕이 있는 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왕은 백성의 무슨 문제든지 척척 해결해주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왕 제도의 부작용이 심한데도, 그들은 그걸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암튼 보면 무식이 죄다.

-사무엘은 무척 마음이 상했다.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표현했다.
사실 사무엘 정도 위치에 있으면, 누구를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힘들다.
결국 하나님 밖에 없었다.

-사무엘의 말을 들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속상하기는 하나님이 사무엘보다 더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말을 들어줘” 하셨다.
사실 하나님이 혼낼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행동을 한 건가?
그러나 하나님은 혼내는 쪽이 아닌 달래는 쪽을 선택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백성들을 생각해 주셨다.
사무엘더러 백성들에게 왕의 제도가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고,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하셨다.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푸시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들은 왕 때문에 실컷 고생해봐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왕이었는지, 한 번 당해봐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잃지 않으셨다.
그것도 모르고 백성들은 신났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철부지였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무엘은 속이 썩어문드러졌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그의 종이 어떻게 하겠는가?
싫든 좋든 주인을 따라야 했다.
그게 종된 자세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다.
사울의 인물됨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그는 겸손했다.
거기에 외모까지 뛰어났다.

삼상 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울은 한 마디로 준수했다.
키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
그러니까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있었다는 말이다.
딱 봐도 외모가 왕감이었다.
그 때 사무엘이 생각했을 거 아닌가?
‘야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나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왕감은, 겸손한 내면 뿐 아니라, 준수한 외모도 갖춰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오래지 않아 불순종하여 버림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울의 대체자를 준비해 놓으셨다.
곧바로 사무엘을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다.
아직 사울이 멀쩡하게 왕으로 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사무엘의 동선은 사울이 다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게 하나님께 불순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종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셨다.
이새의 집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사무엘의 고유 영역인 만큼, 별 문제 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형식은 제사였지만, 실제로는 이새의 아들 중에서 사울의 뒤를 이을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다.

-이새의 일곱 아들이 쭉 서 있는데, 유독 사무엘의 눈에 들어오는 자가 있다.
그리고 한 아들씩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했다.
저만치서 엘리압이 오는데, 사무엘은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삼상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다른 아들들은 볼 필요도 없다.
내면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가 일단 장남이다.
장남은 마음 쓰는 게 다르긴 하다.
그렇담 외모인데, 일곱 아들 중에 가장 준수하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지를 학습했다.
그 학습효과로 인해, 엘리압을 왕감으로 미리 점찍었다.
하나님한테 “이 사람 맞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는 막 기름병을 꺼내려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급히 막으셨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분명히 사무엘이 보기에는 엘리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외모보다 중심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럼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신 것도,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만큼 더 커서가 아니라, 중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걸 놓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외모를 무시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삼상 17: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다윗도 한 외모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외모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기도 할 때는 상관없다.
속옷 바람으로 기도한들 문제될 게 있겠는가?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외모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주일예배의 자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분장이나 변장까지는 아니라도, 화장이나 치장 정도는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시험에 안 든다.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중심이 무엇인가?
중심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양한 뜻이 있다.
그 중에 3가지만 소개를 하면...
1. 사물의 한가운데.
2. 사물이나 행동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
3.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
그럼 하나님이 보신다는 중심은, 두 번째나 세 번째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물이나 행동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이 무엇인가?
믿음 아닌가?
-그리스도인에게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가 무엇인가?
역시 믿음 아닌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이 믿음이 아니라면 큰일 난다.
우리의 생활에서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가 믿음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문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믿음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여러분의 일상이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여러분의 여생이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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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일단 앞 문단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을 하셨다.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인정하기는 싫다.
그러면 판이 깨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굳이 고정관념을 깨고 싶지 않아서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았다.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관리는 회당장이었다.
회당장이 단순한 명예직이 아닌 관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회당은 재판이나 자녀를 위한 율법교육의 장소로,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곳으로, 지역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유대인 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회당이 세워졌다.
회당장이 유대 사회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회당장은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회당에 문제가 없었고, 가정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지라, 매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딸이 보통 딸이 아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외딸이다.
무남독녀였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겠는가?
전에는 한 타스 씩 낳던 시절이었는데, 외동딸이었으니 자기 생명처럼 소중했다.

-그리고 딸의 나이가 12살이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예뻤겠는가?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운 딸이다.
자는 모습이 천사 같고, 먹는 모습이 공주 같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아빠” 하고 달려와 안긴다.
그럼 피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행복의 기운이 넘친다.
예쁜 딸이 있어 회당장의 가정은 천국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딸이 앓기 시작했다.
특별한 병명도 모른다.
며칠 앓다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병이 예사롭지 않다.
자기의 전부인 무남독녀 외딸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회당장은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집안에 있어도 집밖에 나가 있어도 아픈 딸이 눈에 밟힌다.
회당장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덮였다.
회당 내에서도 걱정이 생겼다.
회당장이 저렇게 표정이 어두우니, 회당의 분위기도 밝지 못하다.

-회당장은 관심은 오직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간절함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그가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예수님에 대해 얼핏 듣긴 했다.
그러나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흘려들었다.
사실 자기와 무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자기에게 절박한 문제가 생겼다.
자기 인생에 있어 최고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기로 했다.
문제는 자기가 회당장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유대 사회에 미칠 파급 효과가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찾아가면 된다.
회당장은 관리다.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잠시 멈칫하다가,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 심지어 자기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를 했다.

-그는 급히 예수님을 찾아갔다.
예수님께 나아가 절까지 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는데,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을 때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방금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회당장은 하늘이 무너졌다.
자기가 조금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딸을 살릴 수 있었는데, 자책감이 들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회당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예수님한테 매달렸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그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셨다.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을 따라갔다.
회당장은 혹시나 하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회당장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자 예수님의 걸음은 더뎌졌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지체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진 것이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질 수 있었나 싶다.
혈루증이면 하혈하는 병인데, 그 여인은 한 두 해도 아닌 열두 해 동안이나 이 병을 앓았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막 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 정도면 살아 있는 송장이나 마찬가지다.
그 병에 걸렸을 때, 많은 의사를 찾았을 정도면, 가진 게 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만나는 의사마다 “자기한테 치료를 받으면 틀림없이 나을 거라”고 희망 고문을 줬다
순진하게 의사 말만 믿고, 가진 거 다 줬지만 효험이 없었다.
오히려 병만 더 깊어졌다.
이제는 어디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해도, 가진 게 없어서 못 간다.

-매일 하혈을 하다 보니, 빈혈 증상이 잦았다.
누워있으면 죽을 거 같아서,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면, 어지럼증으로 인해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이 있는 곳에 와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다.
보통 다짐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을 건 결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여인은 매일 밤 잠 자리에 들 때마다 죽음을 생각했다.
자기가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그래서 예수님 한 번 만나보고 죽기로 했다.
그 여인은 이를 악물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자기도 알 수 없는 힘이 어디서 나오긴 한다.

-자리를 잡고 예수님이 오기는 기다리는 동안 확신이 생겼다.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기다렸던 예수님이 지나가자, 죽을힘을 다해 예수님 뒤로 가서 겉옷 가를 만졌다.
회당장처럼 전면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출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 사람이 성한 사람과 접촉하면, 성한 사람 역시 부정해진다.

-인생의 고통스런 문제가 있음에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당시에는 몇몇 병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에 제약을 받았다.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기도하지 않는 게 문제다.
문제를 자기 혼자 안고 끙끙 대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이 문제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문제에 눌려 죽으라고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사람은 문제 때문에 죽지 않는다.
문제에 잘못 반응해서 죽는다.
사람은 문제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반응을 잘못 해서 망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문제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믿음의 반응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문제 앞에서 보이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같은 믿음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하신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믿음에 완전히 감동하셨다.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이 여인에게 감동하신 것은 딱 하나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다.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감동하신 게 무엇인가?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네 친구에게 감동하신 게 무엇인가?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믿음이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감동하실 것도 다른 것 없다.
믿음이다.
우리가 믿음 외의 무엇으로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주님께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다.
주일성수, 믿음의 표현이다.
예배 드림, 믿음의 표현이다.
헌금, 믿음의 표현이다.
십일조, 믿음의 표현이다.
직분 감당, 믿음의 표현이다.
봉사와 헌신,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은 어떻게든 무슨 방식으로든 표현된다.
그러니 주님이 복잡하게 다른 거 볼 필요가 없다.

-지금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일분 일초가 급하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끼어들어 지체되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깨끗하게 치유받았으니 마땅히 축하해 줄 일이다.
그런데 축하가 나오지 않는다.
회당장의 가슴은 시커먼 숯검정이 되었다.

-회당장이 제자들에게 눈치를 줬다.
한 제자가 눈치를 채고, 예수님을 재촉했다.
“예수님, 회당장 숨 넘어가요. 회당장 집에부터 먼저 가십시다.”

-예수님 일행이 회당장 집에 도착하자, 장례 분위기가 났다.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슬픔을 북돋우기 위해 피리 부는 자들, 곡하는 자들이 와 있었다.
살만큼 살다간 사람의 장례와 달랐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회당장의 외딸이다.
어차피 죽은 딸이다.
차라리 회당장이 예수님을 안 찾아갔으면 나을 뻔 했다.
자존심을 구기고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딸 하나 살려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갔지만 딸은 죽고 말았다.
떠드는 무리가 꼭 그런 자기를 흉보는 것 같았다.

-회당장이 예견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집에 들어서자 맥이 탁 풀렸다.
회당장은 초점을 잃은 눈, 눈물 글썽거리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다.
그건 절망에 사로잡힌 눈빛이었다.

-예수님은 분위기를 돌려야 필요를 느꼈다.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물러가라”
예수님은 장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다.
회당장에게 ‘괜히 예수님한테 갔다왔다’고 흉보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다.
천하의 예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을 거라는 믿음 없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강력하게 선포하셨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아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지금 회당장의 딸이 이미 숨이 멎은 채 죽어 있다.
얼마 전까지 미지근하던 체온도 이제는 식어 싸늘해졌다.
그런데 잔다니...
아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것과 자는 것도 구분 못할 정도로 바보란 말인가?
순간 술렁거렸다.

-예수님이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회당장이 입장이 곤란해졌다.
회당장이 무리에게 양해를 구하며, “잠시 물러가 있다가 부르면 들어오게나” 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 어쩌겠는가?
“아무래도 회당장이 딸 잃은 충격에 어떻게 된 거 아녀?”
“아휴 그럴 만도 하지...무남독녀 아닌가?”
그들은 중얼거리면서 잠시 물러갔다.

-예수님은 부모와 제자 몇 사람만 데리고, 회당장의 딸이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이 들어가서 죽은 딸의 손을 잡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딸이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깬 것처럼 일어났다.
눈물범벅이 된 채 딸을 끌어안는 아빠를 향해... “아빠,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딸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물었다.
“아빠, 이분들은 누구예요?”
“바깥에서는 왜 저리 시끄러운 소리가 나요?”

-회당장은 상기된 얼굴로 “그래 딸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네가 죽었다가 살아났어. 예수님이 너를 살려주셨어.”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넙죽 절을 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 딸을 살려주신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얘야, 너는 뭐해. 너도 예수님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딸도 “예수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회당장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외쳐댔다.
“우리 딸이 살아났다.”
“우리 딸이 살아났어.”
“예수님이 우리 딸을 살려주셨어.”

-물러가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회당장이 제정신인 것을 확인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죽어 있던 딸이, 일어나 예수님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기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를 않았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해외토픽 감이야...”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어.”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원래 믿음 없는 사람들이 반응은 격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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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장이 자기 삶에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아왔을까?
여인이 자기 삶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나아왔을까?
정답 : 나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문제는 인생의 악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이다.
문제는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해준다.

-문제는 숨겨진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준다.
주님은 문제를 허락하여,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곤 한다.
그 때 주님은 다른 것 안 보고, 오직 우리의 믿음만 보신다.
주님께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인정받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