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6:제자는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마 10:1-1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1426
마태복음 강해 26
제자는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마 10:1-15)
2016. 10. 23.


프롤로그

-나에게 세 자녀를 위한 소원이 있다.
물론 그들이 잘 되면 좋겠다.
제 때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이혼하지 않고 살면 좋겠다.
우리 부부가 언제라도 방문했을 때, 부담 갖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가정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일반적인 소원이다.

-내 진정 소원은 내가 모태신앙으로 믿음의 경주를 했듯이, 그들도 모태신앙으로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좋아하고 교회에서 자랐듯이 그들도 그랬으면 좋겠고, 내가 교회에서 사역자로 살았듯이 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나보다는 주님께 더 충성하면 좋겠고, 나보다 주의 몸된 교회에 더 크게 쓰임받으면 좋겠다.

-모태신앙은 우리 부모님이 내게 물려준 최고의 가치다.
나는 이걸 다시 세 자녀에게 물려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들이 나에게 물려받은 모태신앙을, 자기 자녀에게 물려주기를 바란다.
그게 주님 오실 때까지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어지기를 바란다.

-모태신앙을 다시 정의하면 모태로부터 주님께 부름받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태신앙은 최고의 복이다.
물론 죽을 날을 며칠 앞두고 구원받는 것도 복이다.
요양원에서, 병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복이다.
그러나 그건 모태신앙에 비할 복은 아니다.
모태로부터 부름받아,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학교를 거쳐, 16살에 입교한 후, 한 평생 주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복이다.

-나는 중간에 예수 믿게 된 분들을 존경한다.
중간에 믿었음에도 모태신앙인보다 더 잘 믿는 분들은 배나 존경한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길, 나 같은 사람은 중간에 부르면 힘들 것 같으니까, 아예 모태에서 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와 비슷한 성향의 예준이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부르심을 받고도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 부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다 교회 밖에 있다.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이요, 부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낙심자들이다.

-낙심을 국어사전에서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상함’이라고 풀이했다.
한자사전에서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이라고 풀이했다.

-신앙을 가질 때,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음이 상하거나 풀어져서 교회를 떠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라는 것이다.
누가 바라는 것이냐이다.
누구를 위해서 바라는 것이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낙심하는 것이다.

-신앙의 중심을 주님께 둬야 하는데, 나에게 둬서 문제가 생긴다.
내가 바라는 것과 주님이 바라는 것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신앙의 기본은 주님이 바라는 것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계까지 안 간다.
앞의 과정을 생략하고, 신앙을 소원성취로 오해했다.
기독교를 믿어서 소원성취에 실패하니, 다른 종교를 찾는다.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다가, 그래도 안 되니 지금은 반종교인이 되어 있다.
종교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 말이다.

-모태에서 부름 받아, 지금까지 몇 십 년을 믿음의 경주하는 분들은 대단하다.
또한 중간에 부름을 받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도 더 대단하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자기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음이 상해 중도에 탈락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옆 사람을 서로 격려하자.
“당신 대단한 겁니다.”
“우리 끝까지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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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드디어 12제자를 부르셨다.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현역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다.
지금까지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아온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이다.
하루에 4명의 제자를 부르셨으니까, 꽤 소득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다른 제자를 얻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나 제자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리야 주위에 널려 있다.
예수님에게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제자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짤막함을 아신 주님이었기에, 제자를 찾는 데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서둘지 않으셨다.
한 번 택한 제자와는 끝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좀 시원찮다고 “야 아무래도 너는 안 되겠다”며, 중간에 하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종하기만 하면 만들어서 쓰실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다.
신자로 불러 성도가 되게 하고, 양육훈련하여 제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자와 성도 그리고 제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신자가 성도였고, 신자가 곧 제자였다.
성도 아닌 신자가 없었고, 제자 아닌 신자가 없었다.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다.
“나는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 받았는데 제자훈련이 필요한가?
제자훈련은 훈련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훈련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데 교육하여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 교육하는 원리와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면서부터 사람이다.
하지만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아 교육에 들어간다.
무려 이십 몇 년을 교육한다.
Post Dr. 과정까지 하면, 교육을 삼십년 받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요즘엔 평생교육과정을 통해 평생 교육 받는다.

-군인도 그렇다.
영장을 받고 훈련소에 입소하는 순간 군인이 된다.
훈련하여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니까 훈련을 받는 것이다.
훈련소에 들어가 기초훈련을 받는 사람을 훈병이라고 부른다.
훈병은 아직 계급도 없다.
해병대는 명찰 색깔도 다르다.
그래도 군인이다.
훈병이 비록 계급장이 없어도 명찰 색깔이 달라도, 그는 엄연한 군인이다.

-군인에게 훈련은 숙명과 같다.
장군도 훈련을 받는다.
장군도 군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훈련이 언제 끝나는가?
제대할 때 끝난다.
제대하면 더 이상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을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셨다.
어떤 권능을 주셨는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럼 제자들에게만 이런 권능을 주셨는가?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셨다.
권능의 원천이 신자냐 제자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권능을 주셨다고 했는데, 권능이 있다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권능을 사용하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다.

-설교 때나 성경 공부시간 때는, 그걸 다룰 수 없다.
특별한 훈련시간을 내야 한다.
그래서 제자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은 직접 부르신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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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열두 제자의 이름이 나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보면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종교적으로 유력한 사람은 없다.
하나같이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보다 못한 세리 출신도 있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이어가고, 자신의 삶을 재현할 제자들을, 그런 평범한 사람들로 세우셨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

-성 프란시스에게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불결한 사람이 누군지, 고통 가운데 고민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어.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 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거야.”

-일찍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셨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을 은혜로 받게 하신 이유도 동일하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굳이 자랑하고자 하면,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누구를 자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

-정 자기를 자랑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해야 한다.

-<말씀의 징검다리>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한다.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하여 컴퓨터 분석을 의뢰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났는가?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세상적 판단으로 실격자들이었다.
가장 유능하단 판정을 받은 가룟 유다는 배신자요 탈락자가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겉모습으로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얼마인가?
우리나라만 해도 인구가 얼마인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더구나 한꿈교회 믿음의 식구로 부르심을 받았다.

-부르심을 귀히 여기라.
주의 부르심이 헛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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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신 게 전부가 아니었다.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제자를 자기 곁에 두실 목적으로만 부르시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으로 무장시킬 목적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그럼 주님이 그들을 왜 부르셨는가?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신학자 호켄다이크는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썼다.
모두가 모이는 교회를 말할 때, 그는 흩어지는 교회를 말했다.
실제로 교회는 모이는 교회여야 하고,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여야 한다.
모이는 교회여서만도 안 되고, 그렇다고 흩어지는 교회여서만도 안 된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여야 한다.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져서 전도하는 교회가 이상적이다.
모여서 예배하는 열정과 에너지가, 흩어져서 전도하는 열정과 에너지로 분출되어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것은 은혜이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것은 소명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은혜와 그리스도의 제자된 소명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게 바른 교회상이요, 바람직한 제자의 모습이다.

-제자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이다.
그렇다고 제 맘대로 가면 안 된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주님이 가라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방인의 길로 가고 싶어도 가라고 할 때 가야 하고, 아무리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고 싶어도 가라는 명령이 없이는 가면 안 된다.
주님은 우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잘 아는 사람한테 가라는 말이다.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한테 가라는 말이다.
잘 아는 사람들,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 전도했다, 그러면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면, 이방인의 길로도 가야 하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갓 출발했다.
그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야 한다.
처음부터 이방인의 길로 가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갔다가는, 잘 안 되면 출발부터 삐끗할 수 있다.
국내에서 전도를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국외에서 선교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국외에서도 무리없이 선교를 할 수 있다.
나중에 나이 더 들면 선교 나가겠다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먼저 교회에서 전도에 힘써야 한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고, 바울이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이방 지역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회당을 찾았고, 회당을 거점으로 선교했다.
그러다 이방인 선교로 사역의 지경이 넓혀져 갔다.
그게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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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메시지를 주셨다.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주님이 세례를 받고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신 후,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 때 주님의 첫 메시지가 그거였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보다 한 발 앞서,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메시지도 그거였다.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건 오늘 우리가 전파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최권능 목사님은 그 메시지를 요약하여, “예수 천당”이라고 했다.
“예수 천당”이란 말 한 마디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자신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요즘 수많은 전도 방법이 개발되고, 전도 내용도 진화했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천국이다.

-천국이 없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나을 게 없다.
천국을 믿지 못하는 기독교인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이 땅이 전부라면 기독교는 매력 없다.
뭐 하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는가?
천국이 없다면 굳이 그렇게 살 필요 없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제명에 죽으면 그만이다.
사는 게 힘들면, 중간에라도 목숨 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천국을 믿으면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어쩌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주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다.
그걸 믿으면 함부로 이혼 소리 안 한다.
가정을 지상 천국으로 만들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나는 가정 행복 설계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터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다.
그걸 믿으면 일터에서 보다 성실할 수 있다.
일터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일터 선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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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국을 ‘이미’와 ‘아직’으로 이해해야 한다.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임했다.
하지만 아직 영원한 천국은 임하지 않았다.
주님은 영원하여 까마득하기만 한 천국을 보여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하게 하셨다.

-여기서 눈에 띠는 말씀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이다.
치유 은사를 받은 분들이, 한 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있다.
돈을 받고 안수기도를 해줬던 것이다.

-기도를 받으러 갈 때, 감사헌금을 준비해 갈 수 있다.
그건 그 사람의 믿음이다.
그러나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은, 돈부터 받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받고 치유가 되었다면, 응당 사례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 감사헌금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역자에게도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먼저 요구를 하는 것은, 사역자로서 보여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거저 받았다고 거저 주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는가?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갚아주신다.
그러나 사람에게 탐욕 부리면, 하나님은 안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것 거둬가실 수 있다.
그거야말로 소탐대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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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보냄을 받은 자의 복장에 대해 말씀하셨다.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간단한 복장이다.
그래도 너무 간단하다.
며칠만 지나면 거지될 복장이다.

-황성주 박사에 의하면 C.C.C.에서 이렇게 전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명 거지 전도대였다고 한다.
말씀 믿고 그대로 했더니,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더라고 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대책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대책 없이 나가니까, 하나님이 당황스러워서 책임져주신 것 같다.

-주님이 보냄을 받은 자의 복장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전도 나갈 때, 지갑 빼놓고 가라는 말이 아니다.
전도하다가 더우면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냉커피도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추우면 호빵도 사먹고, 뜨거운 차도 마실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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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보냄을 받은 자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라는 것이다.
전도자로 고생한다고 잘 대접해 주는 집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집도 있을 수 있다.
마을 인심이 좋아서, 서로 자기 집에 머물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때 좀 나은 집에서 초청한다고, 그 집으로 옮겨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처음에 영접했던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영혼을 살리러 갔는데, 영혼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제자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가 방문했을 때, 모든 집이 환영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무조건 평안을 빌라고 했다.
평안을 빌어서 받아들이면 좋고, 안 받아들이면 되돌아오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게 일명 메아리법칙이다.

-내가 평안을 빌면 평안이 돌아오고, 악평을 하면 악평이 돌아온다.
내가 축복하면 복이 돌아오고, 저주를 하면 저주가 돌아온다.
그가 지금 복음을 거부한다고 영원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죽어라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 나중에 직분자가 되고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끝까지 영접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다.
그 집을 찾아가느라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다.
그 먼지를 떨어 버리는 것은, 내 할 일은 다했다는 의미다.
내 할 일은 다 했고, 당신이 끝까지 안 받아들였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우리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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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게 은혜다.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이게 소명이다.
세상 한 복판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주어진 소명을, 묵묵히 잘 감당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