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2: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마 9:1-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902
마태복음 강해 22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마 9:1-8)
2016. 9. 25.


프롤로그

-지난 8월 25일 대전의 한 도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승객 2명을 태우고 택시를 몰던 택시기사가, 급성 심장마비 증세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택시가 도로를 표류하다, 다른 차와 추돌하면서 겨우 멈춰 섰다.
당시 탑승했던 승객들은 트렁크 안에서 골프가방을 꺼내, 다른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공항버스 출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장에 있던 시민의 신고로, 잠시 후 119구급대가 도착했지만, 택시기사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최소한의 구호 조치를 했거나, 아니면 신고라도 빨리했다면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 승객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사람들이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무책임한 승객을 처벌할 법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기회에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란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상황임에도 모른 체한다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후인 9월 1일 한 여론조사기관에 따르면, 이 법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53.8%, 개인의 윤리적·도덕적 행위를 법제화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이 39.1%로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 법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스탠퍼드 대학 정치학과의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하고 있다.
혈연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 관계가, 가족 내의 신뢰 관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통계에 따르면 '만약 당신이 곤경에 처했다면, 당신이 도움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사람의 비중은,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오늘 설교 제목이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 이다.
그 사람의 친구가 돼주는 것이 무엇인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돼 주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좋은 친구의 모델이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다.
가을 추수의 계절에, 내가 곤경에 빠져 도움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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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유명한 시가 떠오른다.
만리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불의의 사형장에서‘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저 하나 있으니’ 하며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찬성보다‘아니’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오늘 설교 제목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는, 함석헌 선생님이 말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묻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돼주자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그 사람을 갖지 못했다.
앞으로 노력을 해도 그 사람을 갖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내가 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쉽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아, 나는 그 사람을 갖지 못했는데...
그럼 내가 인생을 잘못 살 건가....하는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시를 다시 읽기로 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다시 읽어도 그 사람을 갖지 못한 건 사실이다.
더 잘 살아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내 남은 삶을 그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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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김수미 씨가 책을 냈다.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 안에 선배 탤런트 김혜자 씨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자기가 금전문제로 고통을 겪을 때를 이야기하면서였다.
그 잘난 남편은 돈 한 푼 구해오지 못했다고 한다.
돈 많은 친척도 모르는 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인들에게 몇 백 만원씩 꾸어 임시변통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김혜자 씨가 자기를 부르더니,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하니? 추접스럽게 몇 백 만원씩 꾸지 말고, 필요한 액수가 얼마나 되니?”

-그러면서 자기 통장을 꺼내더니...
“이게 내 전 재산이야. 나는 돈 쓸 일 없어. 다음 달에 아프리카에 가려고 했는데, 아프리카가 여기에 있네. 다 찾아서 해결해. 그리고 갚지 마. 혹시 돈이 넘쳐나면 그때 주든가...”

-김수미 씨는 염치없이 통장잔고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 모든 은행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김혜자 씨와 자기가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는 그렇게 못했을 거라고 했다.

-대신 김수미 씨는 이런 각오를 밝혔다.
‘언니가 아프리카에 간다고 하기에, 나는 언니가 혹시 납치되면, 내가 가서 포로교환하자고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나는 무조건 간다. 꼭 가고야 만다.’

-오늘 설교 제목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에서, 김혜자 씨는 김수미 씨에게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준 것이다.
김수미 씨는 자신은 그 사람을 갖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고개를 떨궜는데 김혜자 씨가 그에게 그 사람이 돼준 것이다.
김혜자 씨의 그런 엄청난 호의 앞에 김수미 씨는 자기 생명을 내놓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우리의 고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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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들은, 내가 최성수의 <동행>이란 노래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언제부터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안다.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나는 이 노래가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십팔번곡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개척을 경험한 목사님들은, “어, 정말 그렇네” 하며 맞장구를 친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지금도 가끔 이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목마름이 완전히 해갈되지 않아서인가 보다.

-오늘 설교 제목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합니다”에서, 어떻게 그 사람의 친구의 돼줄 수 있는가?
그와 같이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그와 따뜻한 동행이 되어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힘들 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힘들고, 자기보다 던 아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가 그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자기는 다른 사람을 차갑게 대하면서, 따뜻한 동행이 다가오길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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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호수 건너편의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쳐주셨다.
풍랑까지 헤치고 가서,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었는데, 감사는커녕 돼지 손실을 봤다며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구했다.
돼지값 물어달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예수님이 그런 마을에 뭐 하러 계시겠는가?

-예수님은 다시 본 동네로 오셨다.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여기서 본 동네란 가버나움을 가리킨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이다.
하루는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든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금도 꽉 차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오는 사람을 바리게이트를 치고 막을 수도 없고, 안내하는 제자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안내 위원이 죽을 지경인 교회가 되면 좋겠다.

-예수님이 건너편 가다라 마을에서 군대귀신이 들렸던 사람을 고친 소문도 파다했다.
그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게 또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가 누워 있다.

-늘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중풍으로 꼼짝없이 침상에 누워 지내는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처음에 쓰러졌을 때는 금방 회복되리라 생각했지만, 그래서 자주 찾아갔고,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말을 했지만, 친구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다.
건강한 친구들끼리만 어울려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렇다고 늘 아픈 친구 집에서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됐고, 그 길로 한 달음에 아픈 친구한테 갔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든지 숨이 턱밑까지 찼다.
누워 있는 친구는 무슨 난리라도 났는가 싶어,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한 친구가 흥분하여 말했다.
“친구야, 됐다.”
-중풍병자는 다짜고짜 “됐다”는 친구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뭐가 됐는데?”

-“이제 너 살았어....”
“아니, 무슨 일인데?... 야, 내가 언제 죽었니? 하긴 이게 죽은 거지... 산 거라고 할 수 있겠나?”

-“놀라지 마. 우리가 소문을 들었는데, 예수라는 분이 대단한 능력이 있대...못 고치는 병이 없대....”
“그래? 그럼 내 병도 고칠 수 있는 거야?”

-“그야 물론이지...”
“에이, 내 병이 지금 몇 년째인데...난 지금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무슨 말이야...예수라는 분이 나병환자도 고쳤대...나병을 고쳤다면 중풍병을 못 고치겠어....”
“에이, 그게 정말이야?”

-“아니, 우리가 너한테 왜 거짓말 하겠어?”
“그럼 나도 그분 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수고롭겠지만 나를 예수라는 분에게 데려다줄래?”

-“그럼, 우리가 그러려고 이렇게 급히 왔잖아.”
“그래 너무 고맙다.”

-“무슨...우리는 친구잖아. 아니 친구 좋다는 게 뭔데...”
“ㅎㅎ 아무튼 내가 나으면 크게 한턱 쏠 게...

-같이 간 친구들은 서둘러 병든 친구를 들 것에 옮겼다.
친구들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했다.
들 것에 실려 있는 친구가 “좀 천천히 가자”고 할 정도였다.
친구들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숨소리도 가빠지면서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는 속도도 누워서 느껴질 정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병든 친구는 미안한 마음에 “너희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나으면 내 꼭 은혜를 갚을 게.”
“야, 그런 소리하지 마. 우리가 그런 거 바라고 하는 줄 알아. 우리는 네가 나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어...”

-드디어 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도착했다.
제법 큰 집이었는데, 집에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집 저 안쪽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람 혼자 들어가는 것도 힘들데, 더구나 병든 친구를 들 것에 싣고 들어가야 한다.

-병든 친구에게 잔뜩 희망을 불어넣었다.
금방이라도 나아서 함께 뛰어다닐 꿈을 꾸게 했다.
그런데 장애물을 만났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병든 자들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치유받기 위해 왔을 게 뻔하다.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밤새도 안 된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포기할 수도 없다.
얼마 전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던 모습은 간 데 없고, 누워 퀭한 눈만 껌벅거리는 친구를 보니,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병든 친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아무래도 힘들겠지” 묻는다.
친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해” 하고,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사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때 평소 엉뚱한 말을 잘하던 친구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야, 우리 지붕에 올라가 천정에서 달아 내리면 되겠다.”

-엉뚱한 친구의 말에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튼 엉뚱한 소리를 잘해요...”
“왜? 불가능할 것도 없지...”
“그래,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누워 있는 친구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를 안심시키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책임을 질 거야” 했다.

-친구들은 다시 바빠졌다.
친구를 들 것에 싣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붕을 뚫기 위한 작업을 했다.
오늘날의 콘크리트 지붕을 생각하면 안 된다.
큰 장비가 없어도 지붕을 뚫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멍을 작게 뚫을 수도 없었던 게 들 것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다들 집중했다.
그런데 지붕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잠시 후 지붕에 구멍이 났다.
예수님은 개의치 않았지만, 사람들이 잠시 웅성거렸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붕 위에서 들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들 것에 사람이 실려 있었다.

-예수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천정에서 내려오는 들 것을 바라보셨다.
사람들은 천정에서 내려오는 들 것을 바라봤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
아무 소망없이 지내던 친구를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 소문을 들려주고, 그를 설득해 들 것에 싣고 현장에 왔지만, 큰 장애물을 만났고, 그럼에도 친구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친구를 들 것에 달아 내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친구들의 눈물겨운 행위를 주님은 아셨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셨다.
사실 그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믿음은 내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
믿음에는 반드시 실행이 뒤따른다.
오죽 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 했을까.

-중풍병자의 친구들에게 행함이 없었다면,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
그들에게 실행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믿음을 지적 동의쯤으로 여기면 안 된다.
믿음은 철저히 생활이다.
믿음은 생활 속에서 증명된다.
교회 생활 속에서, 가정 생활 속에서, 직장 생활 속에서 증명된다.

-오늘 말씀 보면서 또 한 번 느낀다.
나 혼자 잘 믿어서 되는 게 아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믿었어도, 주위에 친구가 없었다면 치유 받지 못했다.

-주위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를 도와줄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내 사정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와 함께 울어주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그런 친구가 되어줘야 한다.
중풍병자에게 예수 소문을 들려줬던 친구가 돼야 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친구가 돼야 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만나게 했던 친구가 돼야 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게 했던 친구가 돼야 한다.

-친구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는가?
친구 잘 만난 줄 알아라.
혹 그 친구가 자기는 지금 절에 다닌다고 해도, 결코 고마움을 잊지 말라.
다른 사람은 구원받게 하고, 자기는 실족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바울도 그 점을 두려워하여 깨어 있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도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졌지만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들 것에 실려 예수님 앞에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사람의 중풍병이 죄 때문에 들렸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중풍병이 죄 때문에 들렸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앞에 두고 자신이 병을 치유하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단순히 병만 고쳐주셨다면 3~6절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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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이상의 적극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얼마 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도 있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부탁을 아뢰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참 보기 드문 서기관이다.
여태껏 그런 서기관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 서기관에게 완곡히 거절한 것이다.
서기관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따랐을 거 같지 않다.
안정된 서기관의 자리에 비해, 예수님처럼 떠돌이로 생활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였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서기관이다.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고, 율법으로 예수님을 걸려들 게 만드는 서기관이다.
예수님이 이런 서기관의 올무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 서기관은 한 건 한 셈이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를 치켜뜨며, 예수님께 속으로 대적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당시 죄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죄가 신성모독죄이다.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렇게 반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다.
그러니 서기관이 속에 반발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

-예수님이 그런 생각을 아셨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서기관은 속으로 뜨끔 했을 것이다.
나쁜 생각을 들켰을 때 왜 뜨끔하지 않는가?
하지만 서기관은 애써 태연한 척, 예수님을 바라봤다.

-예수님은 작심 발언을 하셨다.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런 식의 질문은 너무 뻔하여,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다.
말로만 놓고 보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훨씬 쉽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까?

-예수님의 대답에 다들 입을 닫고 있었다.
묻는 의도가 너무 뻔하기도 했지만, 대답하면 예수님의 의도에 말려들 수 있어서였다.

-아무 대답이 없자 예수님이 말씀을 이어갔다.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자신이 치유자 이상의 존재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건 유대교 지도자들의 벌집을 쑤셔놓을 만한 말씀이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못 마땅했는데 자초하여 걸려든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입장이 곤란한 사람이 누굴까?
들 것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이다.
일어나라고 하지도 않으니 일어날 수도 없다.
자기 병이 나았다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면,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명령이 떨어졌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말자 바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놀랐다.
아니 놀라는 정도를 넘어 두려워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모든 일이 중풍병자 그 사람의 네 친구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에 그 사람이 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이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돼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