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1:사람이 소중합니다.(마 8:28-3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1310
마태복음 강해 21
사람이 소중합니다.(마 8:28-34)
2016. 9. 18.


프롤로그

-지난 8월 마지막 주일에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왔다.
그 전날 회복캠프를 했기에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주룩주룩 내리는 비로 기분은 상쾌했다.
목이 잠긴 채 주일예배와 헌신예배까지 인도하고 나니, 앉고 싶고 눕고 싶었다.
하지만 주일저녁에는 죽고 못 사는 것이 기다린다.
축구이다.
운동복 차려 입고 축구장에 도착하면, 그렇게 피곤했는데 언제 피곤했냐 싶다.

-그런데 그 날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축구는 비가 와도 웬만하면 할 수 있는데, 그 날은 축구를 하기에 무리다 싶을 정도의 비였다.
집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 영화보러 가자”고 했다.
며칠 전부터 영화 터널을 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미루고 미뤘는데, 아뿔싸 지금 가자는 것이다.

-터널이 재난 영화라고 해서 안 보려고 했다.
전에 재난을 다룬 영화 해운대를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터널은 보는 나까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영화를 보기로 한 결정적인 것은, 개가 그렇게 재미있게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 때문에 많이 웃긴 했다.

-영화마다 명 대사가 나온다.
추석날 본 고산자대동여지도에서는, 이런 명대사가 나오더라.
“제 나라 백성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습니까?”
“왜 그리 지도를 그리려 했소?”
“가슴이 뛰어서...”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 있을 뿐, 길 위에 있을 때 나는 늘 자유로웠고, 그 길을 지도에 옮겨 놓을 꿈에 평생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채우지 못할 꿈으로 그칠지라도,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꿈꾸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터널을 보고는 대사 세 개가 생각나더라.
“이 개새끼야”
“다 꺼져, 개새끼들아... 라고 합니다.”
“터널 안에는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 갇혔습니다.”

-사람이 터널에 갇히면 비상 식량이 필요하다.
차 안에 주유소에서 받은 생수 두병과 딸래미 생일에 쓸 생크림케익 한 개가 있었다.
터널 안에서는 바깥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없다.
구조대장의 안내대로 구조가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니까 아껴 먹어야 한다.
물을 마실 때는 눈금까지 그어가며 마셨다.
그런데 못생긴 개가 와서 생크림케익을 다 먹어버린 것이다.
그 때 주인공이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절규하며 외친 말이 그 말이다.
“이 개새끼야”
실제로 개한테 한 말이니까 욕이 아니다.

-모두가 구조를 포기했다.
처음엔 다들 의욕적으로 덤볐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아무 성과가 없다.
터널의 설계도를 가지고 산에서 터널로 구멍을 뚫는 작업을 17일에 거쳐 성공했지만, 부실시공으로 인해 주인공이 갇혀있는 곳과는 200미터의 차이가 났다.
누가 봐도 다시 그 일을 하기에는 무리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 밧데리도 방전되어 연락도 단절이다.
거기다 구조에 동원된 인부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기업가들은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압박했다.
전문가들도 그 정도면 생존해 있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린다.
국민 여론 65%도 이쯤해서 구조작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주인공의 아내와 구조대장 뿐이다.
구조대장의 포기하지 않은 집념과 끈질긴 노력으로, 주인공은 35일만에 극적으로 구출이 됐다.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헬기를 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장관과 관리들이 냄새를 맡고 사진 찍으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기자들도 신기록을 세운 사람을 취재하려고 눈에 불을 켰다.
기자들이 주인공이 뭐라고 하는지 구조대장에게 물어봐달라고 했다.
-구조대장이 그의 귀에 대고 듣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다 꺼져, 개새끼들아... 라고 합니다.”
그 소리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그렇게 말한 구조대장은 공무원 품위훼손죄로 시말서를 써야 했다.

-관리들이 장관 앞에서 기자간담회를 했다.
전문가들도 참석을 했고 기업가들도 참석을 했다.
그 중 기업가는 하루 15억씩 손실이 나서 지금까지 500억의 손실이 났다며, 한 사람 때문에 이게 뭐냐고 했다.
제2하도터널 공사를 하루 속히 재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터널 도룡뇽의 예를 들었다.
도룡뇽 몇 마리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어, 엄청난 손실을 봤다는 것이다.

-그 때 구조대장이 손을 들었다.
따가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발언을 했다.
“저 저 저기요, 터널 안에는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 갇혔습니다.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라구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작은 외침이 별 힘이 없지만, 그래도 감독은 이 사회를 향해, 정치판을 향해, 정부를 향해 외친다.
“사람이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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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의 귀가 복 있다.
팔복으로 시작된 말씀은 한 절 한 절이 보석 같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니, 눈앞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제자들은 정말 행복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산 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오자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 무리에 섞여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 나병환자였다.
그가 예수님께 단순한 믿음을 보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단순한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 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단순한 믿음으로 구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나환자나 백부장은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의술로 나병이나 중풍병 둘 다 치유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불치병을 고쳐주셨다.
사람에게 불치병이고 우리에게 불가능이다.
전능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결코 시시한 분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설사 믿음이 있다고 해도 믿음이 단순하지 못하다.
단순한 믿음에 역사가 일어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믿음,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는 단순한 믿음을 가져라.

-예수님이 갑자기 베드로의 집엘 가셨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따라갔다.
그런데 따라 가보니 예수님이 왜 그렇게 서둘러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는지 알 수 있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결혼을 하여 장모까지 모시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미혼자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를 수 있지만, 기혼자는 결코 쉽지 않다.
베드로는 12제자 중 유일한 기혼자로 보인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책임감 있게 주를 따랐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나 몰라라 하실 리가 없다.
친히 베드로의 집을 찾아 그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쳐주셨다.

-그 덕에 그날은 제자들이 저녁 대접을 잘 받았다.
모처럼 여유 있는 저녁이 되려나 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쉬도록 놔두지 않았다.
귀신들린 자,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왔고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던 예수님이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에워싸일 뻔한 상황에서 다행히 그 시간에 서기관이 나아오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서기관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 밤을 보냈을 것이다.
드디어 자기 인생을 건 결심을 실행으로 옮겼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달라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큰 결심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멋쩍게 돌아서는 서기관을 뒤로 하고,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가자고 해도, 예수님이 굳이 지금 가자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자는데 제자들이 어쩌겠는가?

-배가 어느 정도 이르렀을 때, 호수에 큰 파도가 일었다.
물결이 배를 덮으려고 하는데,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조차 감당이 안 됐다.
이러다가는 배가 침몰하여 다 죽게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태연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사역으로 얼마나 곤하셨으면 그랬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 하며 짐짓 기다리셨을 수도 있다.
배 위는 시끄러웠다.
물결이 배에 부딪치는 소리와 그와 맞선 제자들의 소리가 합쳐져 소란스러웠다.

-그 때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다급하게 깨우며 소리쳤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사실 제자들은 잘못이 없다.
호수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할 때 내일 가자고 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며 가자고 해서 갔다.
그러다 이런 끔찍한 일을 만났다.

-그런데 도리어 예수님한테 꾸중을 들어야 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리고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하라고 꾸짖으셨다.
그러자 상황은 종료되었다.

-예수님이 개입하시기 전까지는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았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나 비록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주님이 개입하시자 죽을 것 같은 환경에 샬롬이 찾아왔다.

-우리에게 죽을 것 같은 환경은 늘 있어 왔다.
어제는 없었다가 오늘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죽을 거 같은 환경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깨우지 않아서 죽는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깨우는 방법이 무엇인가?
기도다.
부르짖는 것이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기도를 쉬면 주님이 따분해 하신다.
그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일행이 호수 건너편에 도착했다.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자기들보다 가방끈이 긴 서기관은 예수님한테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서기관은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못 봤다.
상대적인 우월감마저 살짝 들었다.

-그 시간에 호수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없는데, 왜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든다.
단순히 사람들이 에워싸니까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너무 피곤하여 쉬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런 날이 오늘만은 아니었다.

-그 궁금증은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자 풀렸다.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예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귀신 들린 지 하루 이틀 된 거 같지는 않다.
그들은 가족이 없다.
가족에게서 버림받았을 수 있다.
아니면 스스로 박차고 나왔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강제로 격리시켰을 수도 있다.

-그들이 지금 사는 곳은 무덤 사이다.
무덤은 죽음의 영인 귀신에게 친숙한 곳이다.
귀신들린 자들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잘 닿지 않는 무덤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좋은 거처였다.

-그들이 어쩌다가 그처럼 고약한 귀신이 들렸는지는 모른다.
다만 누구도 그들을 사람으로 봐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을 사람이 아닌 괴물 취급을 했다.
물론 그들은 몹시 사나웠다.
말과 행동이 무척 거칠었다.
쇠고랑으로 묶어놔도 끊어버릴 정도였다.
그들이 거하는 곳으로 가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주위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괴성에 귀를 막아야 했다.
그들은 밤낮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 더 활발했다.
그 지역 사람들의 소원은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면 자기들이 이사라도 가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불안에 떨고,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더 이상을 못 살 것 같다.
사실 어떻게 살겠는가?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자, 예수님을 마중 나오는 사람이 그들이었다.
좀 어색한 장면이긴 하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 왜 어색한 장면이라고 했는가?
그 전에 예수님께 나아왔던 귀신들린 자들은 가족이 데리고 왔다.
그리고 상태도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나아왔다.
자기들의 나우바리인 무덤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다.
자기들의 영역이자 가장 안전한 곳을 나와서, 예수님을 맞이했다.

-자기들이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서가 아니다.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하나님의 아들이여”
그들이 예수님을 배워서 안 게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오늘 처음 봤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알까?
그들 안에 귀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귀신 같이 아는 게 당연하고 모르면 가짜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모른다.
모르는 게 정상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정확히 모른다.
말씀 한 마디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지자 그들은 겁나게 놀란 표정이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영은 영끼리 통한다.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으나, 성령을 받은 후 확실히 깨달았다.
그 깨달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숨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에 목숨 걸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신앙의 기본인 예배에도 목숨을 안 거는데, 말씀 기도 증거 섬김 교제에 목숨을 걸겠는가?

-신앙은 취미 생활이 아니다.
취미 생활엔 목숨 걸 필요가 없다.
취미 생활에 목숨 거는 사람은, 목숨이 여러 개인 사람이다.
신앙은 인생을 거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전 인생을 거는 것이다.
신앙은 되돌아올 수 없는 자기의 전 인생을 거는 것이다.

-예전의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상담을 하자고 했다.
자기가 종교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믿어봤냐고 물었다.
먼저 예수부터 믿어보겠다고 했다.
속에서 부하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았다.
그래도 초면이고 해서, 애써 웃는 얼굴로 말해서 보냈다.
“그럼 다른 종교부터 믿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오세요.”

-신앙은 인생의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신앙은 퇴로를 차단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내 생명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게 신앙이다.

-귀신 들린 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쫓아낼 것을 알았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참 희한한 장면이다.
자기들을 쫓아낼 게 뻔한데,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이 자연세계와 영적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제 바람과 바다를 말씀 한 마디로 꾸짖어 잔잔하게 하심으로, 자연계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셨다.
오늘 귀신들린 자를 스스로 나오게 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통해, 영계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셨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결코 시시한 분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리가 받은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 키이다.
예수 이름 앞에 귀신이 떤다.
예수 이름을 부를 때, 악한 영이 묶임을 받고 떠나간다.

-귀신은 알았다.
자신들에게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이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귀신들은 자기들이 괴로움 당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들을 영원히 가두기 위해 준비된 무저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곳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그 말이 나온다.
눅 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들은 때가 이르기 전이라고 봤고,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다고 보셨다.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때는 내일이다.
큰 맘 먹고 기도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속삭인다.
“기도 좋지. 기도 해야지. 그런데 내일부터 하렴.”
더 큰맘 먹고 말씀 일독하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일 년에 성경 한 번은 읽어야지. 적어도 성경을 나이만큼은 읽어야지. 그런데 내년부터 읽어.”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때는 곧이다.
예수님이 최초의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날이 새면 집 지으리 하다가 날 샌 새 이야기 있잖은가?
히말리야에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노래하며 놀다가, 밤이 되면 잠 잘 둥지가 없어서 극심한 추위에 못 견뎌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구걸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다고 한다.
그 새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추위에 떨면서 우는 소리가, 이렇게 들린다고 합니다.“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집 지으리”
그러다 아침이 되어 히말라야 산 중턱에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이면, 어제 밤의 추위를 잊고서 또 신나게 논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 밤이 되면 구슬피 운다.
“날이 새면 집 지으리”, “날이 새면 집 지으리”
그 새는 자기의 일생이 다가도록 집을 짓지 못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얘기인가?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다.
만약 그게 자신의 얘기라면, 삶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와 얘기하고 있을 때, 저 멀리 돼지 떼가 보였다.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그곳이 유대지역이 아님을 알려주는 정보이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불결하다고 하여, 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가다라 지방에 돼지를 많이 치는지, 아님 어떤 특정인이 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돼지 떼가, 예수님과 귀신들린 자의 눈에 동시에 들어왔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간구했다.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예수님이 별 뜻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자 기막힌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그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로 뛰어들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땅에 나와 있던 많은 개구리가, 한꺼번에 물속에 뛰어드는 장면은 아름답다.
퐁당하고 뛰어들어 평형으로 쫙 헤엄치는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금 물에 뛰어드는 것은 돼지다.
실제로 돼지가 수영을 할 줄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뛰어든 돼지는 입수 후 익사했다.
“물에서 몰사하거늘”
한 마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돼지도 귀신이 씌면 뵈는 게 없나보다.
대신에 귀신 들렸던 두 사람은 멀쩡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왜 살다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딱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기절초풍했다.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시내에 들어가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이 나가 고침을 받은 일과, 그들에게서 나갔던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호수에 뛰어들어 몰사한 일을,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시내 사람들에게 대단한 볼거리가 생겼다.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 말로만 들었던 예수님을 볼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 현장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생각해 보라. ‘호수에 수많은 돼지가 죽어 둥둥 떠 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그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예수 이 야반 우리 지방에 더 있다간 큰 일 내겠다’ 싶었다.
그래서 예수님더러 자기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의 눈에 귀신들렸다가 고침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서 놓임 받아 살아난 사람은 보이지 않고, 호수에 둥둥 떠 있는 죽은 돼지 떼만 보인 것이다.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
사람의 가치를 무엇에 비할 수 없다.

-다시 영화 터널 얘기를 한다.
‘터널에 갇힌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예산을 써야 합니까?’
‘구조 노력을 할 만큼 했는데, 갇힌 사람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구조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하루에 15억씩 지금까지 500억의 손실이 났는데, 이쯤 해서 구조작업을 중단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런 자본의 논리 앞에, 우리도 65%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에 세뇌되어 있고, 황금숭배사상에 절여 있다.
자본주의가 절대가치가 아니고, 황금이 다가 아닌데 말이다.
사람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사람보다 소중한 것이 보이면 ‘아, 내가 문제가 있구나’ ‘내 신앙이 잘못 됐구나’ 생각하면 틀림없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눅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