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8: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마 7:13-2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915
마태복음 강해 18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마 7:13-29)
2016. 8. 28.


프롤로그

-“척 보면 압니다” 라는 개그맨의 말이, 한 때 전 국민의 유행어일 때가 있었다.
척 보면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특히 사람 속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라.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 꺼플 까보면 저런 사람 같고, 저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또 한 꺼플 까보면 이런 사람 같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이다.
사람에게 양면성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특히 사춘기 때는 그렇다.
입으로는 부모가 못 이긴다.
마치 어른이 다 된 것처럼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행동하는 거 보면 영 아니다.
입 따로 행동 따로 이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직 어린 애다.
아직 익으려고 하면 먼 풋 열매이다.
그런데 자기와 또래들은 익은 열매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익은 열매로 대우해 달라고 한다.
아니면 자기를 익은 열매로 믿어달라고 한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열매를 보면 안다.
풋 열매인지 익은 열매인지 보면 안다.
풋 열매가 어떻고 익은 열매가 어떻고,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보면 안다.
오히려 설명하면 더 어려울 수 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예수 믿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렇다.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예수 믿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내 안에 맺힌 열매를 보여주는 것이다.

-말로만 “예수 믿으면 너무 좋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가요” 하면 안 믿는다.
하도 많이 속아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열매가 영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열심히 나가는데 삶의 열매가 좋지 않다.
상품 가치가 있어야 담을 수 있는데 등외 급수이다.
그러니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빗장을 건 마음의 문은 웬만한 감동으로는 마음의 빗장을 벗겨낼 수 없다.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좁은 문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좁은 문으로 비유하셨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 아니다.
그럼 어떤 문인가?
유일한 문이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 중요하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성막에 보면 바깥에서 뜰로 들어오는 문이 하나 있다.
동쪽에 딱 하나의 문이 있다.
그런데 그 문을 보면 좁은 문이 아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큰 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가 중요하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
다른 것까지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 믿으면서 혹시 모르니까 보험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
그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성막의 동문은 통과하면 된다.
문을 지나 뜰 안으로 들어오면 된다.
구원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 중요하다.
공로 따지지 않는다.
단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
내가 문을 열기만 하면 구원은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이루신다.
구원은 거저먹기인 셈이다.
거저먹기를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은혜이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받는 자의 행위와 상태와 전혀 상관이 없다.
주는 자의 의도와 상관이 있다.
주고 싶으면 주는 것이다.
주는 사람이 줄 때 받으면 되는 것이다.

-좁은 문은 그 다음이다.
유일한 문을 통과한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다.
좁은 문을 통과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좁은 문을 통과한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문을 통과하면 구원을 받고 그 구원 받은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그가 유일한 문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물론이다. 척 보면 안다.
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곧 신앙생활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입체적이다.
신앙생활이 곧 교회생활은 아니다.
신앙생활은 그보다 폭 넓은 개념이다.
신앙생활은 교회 생활을 포함한다.
신앙생활은 가정 생활을 포함한다.
신앙생활은 직장 생활을 포함한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직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생활의 센터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와 동떨어진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교회에 지나치게 치중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교회가 신앙생활의 센터로서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심은 성막이었다.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은 텐트를 쳤다.
성막이 이동하면 그들은 뒤를 따라갔다.
그래서 어느 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교회생활이 신앙생활의 센터임에도 교회에 매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문을 거부하는 것이다.
-주일성수하는 것은 자기 시간 빼앗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십일조하는 것을 자기 돈 가지고 교회에 인심 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꺼리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밖에는, 중심도 없고 기본도 하지 않으면서, 말은 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교회 떠난 것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자기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자, 자기들이 교회 떠난 것을 종교개혁에 비유한다.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교회 떠난 것에 대해서는, 당당할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하다.
그곳에 속한 교인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소속되어 그들과 함께 믿음생활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일한 문을 통과했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좁은 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넓은 문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넓은 문으로 들어가 봤자 별 재미없다.
다들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일단 문이 크고 길이 넓으니, 그리로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좁은 문은 길이 협착하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당연히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생명이다.
열매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에 핑계할 수 없다.

-교회 안에는 거짓 선지자도 있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거짓 교인도 있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전도대상자가 있다.
교회 나오는 것과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서 전도설교가 필요하다.
그런데 보면 잘 안 듣는다.
교회 나오면 된 거 아니냐는 생각이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설교를 경청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주요 직분자가 된다.
그나마 훌륭한 인격이라도 있으면 문제가 덜 하겠지만 인격마저 부족하다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는다.
거짓 교인 한 사람도 교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들어오면 치명타를 입는다.

-우리나라에는 자칭 하나님, 자치 예수님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지역에도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이단 사이비들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
특히 신천지는 교회 안에 숨어들어와 활동을 한다.
몇 십명 많게는 몇 백명이 활동하기도 한다.
심지어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활동을 하기도 한다.
신분이 탄로가 나도 종교 문제로 퇴학을 시킬 수가 없다.
아무리 신학교라지만 교육부의 지휘 감독을 받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분이 들통 나면 견제를 하고 조심할 수 있겠지만, 무사히 졸업을 하고 정상적인 교회에 목회자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처음에는 양의 옷을 입고 있다가 점차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는 것이다.
이리가 작심하고 노략질을 하면 교회는 밥이다.
그들을 대하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윤리성도 도덕성도 없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이단에 대해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깨어 있는 교인이 있고 그들은 안다.
문제는 깨어 있는 교인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 시대에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분별력이다.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도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위장을 잘해도 허점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 사이비가 이제는 노골적인 경향을 띤다.
어떤 광고회사 블로그 내용을 그대로 퍼왔다.
2016년 6월16일 촬영한 신천지 대전 전광판 광고입니다.
대전 옥외광고 중 최고의 광고 매체 서대전네거리 전광판 광고입니다.
가시거리 1km 이상, 교통정체로 인하여 옥외광고 효과가 탁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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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신천지가 숨어서 활동을 했다.
자신이 신천지 교인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이제는 꼭 그렇지 않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이고 또한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몰래 침투하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여전히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인 것이다.

-이리는 아무리 양의 옷을 입어도 양이 될 수 없다.
주님 말씀처럼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
그것은 본성 때문이다.
본성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본성이 바뀌지 않아서였다.

-본성이 바뀌지 않은 채 종교지도자가 됐다.
종교지도자에게는 백성들과는 차별된 요구가 있다.
그러다보니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우리도 좋은 열매를 원한다.
좋은 열매는 내가 원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거름을 많이 준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순지르기를 잘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가지치기를 잘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햇볕을 잘 들게 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많은 시간이 지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 그냥 맺히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히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맺힌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성의 변화를 말한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나무로, 엉겅퀴에서 무화과나무로 바뀌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거듭남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은 우리의 생각이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질적인 변화요, 가치관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건 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자아가 될 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열심으로 그걸 덮어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그걸 덮어보려고 한다.
우선은 덮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매는 속일 수 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한 때가 되면 열매가 맺힌다.
좋은 나무도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도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이 땅에서 맺는다.
열매는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교회 소그룹에서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정이나 일터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때의 열매가 나다.
나한테 이런 열매가 맺혔지만 열매와 나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면 혹시 사람은 믿어줄 수 있어도 하나님이 안 믿어준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누구를 위해서인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것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마음이 좋으시다.
특별히 오래 기다려주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기다려주시지는 않는다.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농부가 도끼를 들 때가 멀지 않다.
그 때 가서 우겨도 소용없다.

-그럼 주님이 긴 말씀하지 않는다.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 때 가서는 아무리 사정해도 봐주지 않는다.
주님의 자비는 못된 나무에게까지 무한하지 않다.
그만큼 기다려줬으면 되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주님이 우리의 일생동안을 기다려주셨다.

-시늉만으로는 안 된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효도는 시늉만내도 칭찬받을지 몰라도 신앙은 그렇지 않다.
좋은 나무 시늉할 수 없다.
좋은 나무 아니면 못된 나무이다.
아름다운 열매 시늉할 수 없다.
아름다운 열매 아니면 나쁜 열매이다.

-평생 교회 다니며 “주여” “주여” 그리스도인 시늉만 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들어갈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천국이 아무리 크고 넓어도, 그런 사람까지 받아줄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곧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성이 변화된 사람,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있다.
올 줄 알았던 김집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못 와도 김 집사는 꼭 올 줄 알았는데 그 김집사가 못 왔다.
못 올 줄 알았던 이집사가 있다.
믿음이 영 신통찮아 보였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도 않던 이집사가 와 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겠는가?

-어느 장로님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
하늘나라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아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문을 받지 않자 “왜 주문을 안 받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자 종업원이 다가와서 하는 말~
“장로님, 여기는 셀프입니다.”
-그런데 저 쪽에 보니까, 사람들이 주문도 받고 서빙도 해주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장로님이 “아니 그럼 왜 저 사람들은 해주냐”고 물었더니,
“저분들은 집사들입니다. 장로님은 교회에서 대접을 많이 받았으니 여기선 셀프이고, 집사들은 많이 봉사했으니 여기선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종업원이 장로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나도 장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이 낯이 뜨거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원로 목사님 생각이 나서 “우리 목사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종업원 왈~
“예, 목사님은 아까 배달 가셨습니다.”

-웃자고 누가 지어낸 얘기지만, 꼭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자기가 집사라고 안심하지 말라.
우리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더 봉사를 많이 한다.

-직분자라고 안심하면 안 된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직분을 받아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복이다.
직분자로 쓰임 받는 것이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복이 아니다.
그럼에도 직분이 곧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분으로 주의 일을 했다.
그 일을 할 때 많은 권능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직분자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 직분으로 불법을 행할 수 있다.
그가 그 직분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불법을 행하지 않았다.
그런 것 보면 직분 자체만 놓고 복이라고 하기 어렵다.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할 때, 충성된 직분자가 될 때, 그것이 복이 된다.

-천국에서 대접받는 직분자가 다 되기 바란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산상수훈의 결론에 이르렀다.
주님은 결론을 비유로 내리셨다.
우리가 하도 많이 접해서 신선한 감이 없지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론보다 가슴에 꽂혔을 것이다.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말씀을 듣는 것은 동일하다.
차이는 듣고 행하느냐 듣고도 행하지 않느냐이다.
그 게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는 몇 종류의 사람이 있을까?
말씀을 듣는 자와 말씀을 듣지 않는 자 두 종류가 있다.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하는가 하면, 설교 시간에 왔다갔다 한다.
휴대폰을 만진다.
잘 있는 성경을 뒤적인다.
보통 때는 덮어놓고 믿는데, 그 때만 성경과 친한 척 한다.

-또한 말씀을 귀로 듣는 자와 마음으로 듣는 자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귀로 듣는 자인지 마음으로 듣는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귀로 듣는 자는 시간이 지나면 말씀을 잊어버린다.
마음으로 듣는 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에 붙잡힌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한 다음 주에는, 기도회에 모인 수가 더 적을 때가 있다.
그럼 한숨 쉴 힘도 없다.
낙심의 영에 붙들릴 것만 같다.
나 좋자고 기도하자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 두 종류가 있다.
말씀을 잘 듣고 있다는 약속된 표시가 있다.
그게 아멘이다.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맞장구치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오래갈 수 없다.
아멘은 설교에 맞장구치는 것이다.
아멘은 설교자를 신나게 한다.
아멘은 설교를 듣는 자신의 영혼을 신나게 한다.
말씀은 아멘이란 숟가락으로 먹는 것임을 기억하라.

-말씀을 들었으면 행하기에 힘쓰라.
‘말씀을 행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런 생각은 마귀가 심어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다.
내 능력만 가지고는 말씀대로 사는 것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의 원저자이자, 말씀의 영인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말씀을 받았으면,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 인생의 집,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라.
그래서 주님께 지혜로운 사람으로 칭찬받기 바란다.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자, 무리들의 반응이 나왔다.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건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교자로서 너무나 부러운 장면이다.

-말씀 사역자를 위해 하루에 한 번은 기도해주라.
“우리 목사님, 말씀에 권세가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우리 목사님, 기도에 능력이 나타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