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2:신앙은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마 12:22-3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1-15 00:00
조회
1446
마태복음 강해 32신앙은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마 12:22-37)2017. 1. 15. 프롤로그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지고 연못을 지나고 있었다.
가다가 그만 앞발이 미끄러져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나귀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며 발버둥을 쳤다.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 물에 빠져 일어날 수가 없어 신음하고 있었다.

-그 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원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네. 물에 약간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치다니...우리는 항상 물속에 사는데 말이야.”

-우리도 살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그런데 판단 기준이 객관적이질 않다.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니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데이빗 클링크라는 의사가 신경과민증 환자 1천명을 조사했다.
그들 중 95%가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모였다 하면 남을 흉보고 욕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판단받는 사람도 힘들지만, 그보다 자기 정신건강에 더 나쁘다.
타인을 비판하려면 자기 정신 건강을 포기하고 해야 한다.

-보면 비판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도 비판한다.
비판이 습관이어서 그렇다.
비판하는 게 몸에 배서 그렇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꼭 짚고 한 소리하고 넘어가야 후련하다.
그래야 자기 존재감이 드러나는 줄 안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한 축하객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더니, 총장에게 악수도 하지 않는 거였다.
그 축하객은 잔뜩 불만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참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이 있다니... 아니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족을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장애를 가진 졸업생을 비난했던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을 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분명히 자기 두 눈으로 봤다.
졸업장을 한 손으로 받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자기가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졸업장을 한 손으로 받고, 총장에게 악수도 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그걸 보며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비판한 사람은 사실 관계를 알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기 눈을 너무 믿지 말라.

-제주도에 일명 도깨비 도로가 있다.
분명히 내리막길에 세워 둔 차가 위로 올라가는 신기한 도로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지금도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은 한 번쯤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이 도깨비 도로의 실체는 무엇일까?
도깨비 도로의 진실은 착시 현상에 있다.
사물의 크기나 색깔 같은 성질은 눈으로 보았을 때,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나는 것을 착시라고 한다.
도깨비 도로의 경사도를 실제로 조사해 보면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주변 지형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눈에는 오르막길로 보이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봤는데도 사실이 아닐 수 있는데, 되게는 들은 소문만으로 판단한다.
보지도 않고, 지레 짐작하여 판단하고 비난한다.

-모간 블레이즈라는 사람이 쓴 글이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나는 바다보다 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으며,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한 수도사가 젊은 과부 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며, 수도사를 비난했다.
얼마 후, 그 과부가 세상을 떠났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수도사가 암에 걸린 젊은 과부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두 여인이, 어느 날 수도사를 찾아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수도사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닭털을 날리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다시 그 닭털을 주워오라고 하였다.
여인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닭털을 무슨 수로 줍겠느냐”며 울상을 지었다.

-수도사는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야말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 잘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다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을 것을 두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며, 예수님께 따져 물었다.
안식일에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데, 예수가 어떻게 하나보자 하고 지켜보다가,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다.

-참 도움 안 되는 사람이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자기 뜻대로 돼야 정의다.
자기와 다른 의견이 결정되면, ‘어떻게 되나 보자’ 지켜보다가,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거보라”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겉으로 보기엔 잘 믿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신앙은 있는데 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있고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생활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했다.
교회와 함께하지 않는 신앙은 허상에 불과하다.

-나는 예배 때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된다.
하나님이 은혜 주실 날로 주일을 주셨다.
주일에 믿음의 가족을 한 자리에 모으신다.
그리고 말씀의 잔치를 여신다.
말씀에 기도와 찬양과 봉헌을 곁들이신다.
겸손함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는다.
감사함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는데, 왜 은혜가 안 되겠는가?

-다른 사람이 받는 은혜를 자기는 못 받는다면, 자기 귀가 높아서가 아니다.
자기 신앙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다.
입맛이 없어서다.
혹은 속이 안 좋아서다.
입맛이 없으면 산해진미가 소용없다.
속이 안 좋으면 한 상 가득해도 먹을 게 없다.

-종교개혁지 탐방을 위해 유럽에 갔을 때, 일행 중 한 권사님이 속이 안 좋았다.
몇 끼를 현지식 먹다가, 그날은 한식을 먹게 됐다.
비교적 현지식을 잘 먹는 나도, 그날 한식이 참 맛있었다.

-그런데 내 옆 테이블에 있던 권사님이, 영 먹는 게 시원찮아 보였다.
밥을 서너 숫가락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왜 입에 안 맞으세요” 물어도 “아니예요”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속이 많이 안 좋았었다.

-다들 맛있게 먹는 한식이었지만, 입맛이 없고, 속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 권사님이 음식을 탓했다면, 누구 한 사람 동의했을까?

-은혜의 자리에서 은혜 받지 못한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할 일이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골방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일이다.

-예수님은 판단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떠나셨다.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그런 삐딱한 마음을 가진 자들과 말씨름할 여유가 없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한테 힘을 빼겠는가?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시자,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많이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이, 다 은혜 받으면 좋겠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할 수 있다.
모두가 은혜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받는 사람만 소수가 아니고, 은혜 받는 사람도 소수라는 말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애끓는 심정으로 부탁한다.
예배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들라.
예배 때마다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라.
예배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라.

-우리 예수님은 은혜 베풀 준비를 하고 계신다.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기다리신다.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은혜는 주님이 주시지만 통로가 있다.
성경을 통해 주신다.
교회를 통해 주신다.
예배를 통해 주신다.
사모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네 입을 열라”가 아니고,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다.
은혜를 애타게 사모하라는 말이다.
은혜를 열렬히 사모하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주일을 기다린다.
한 주간 내 주일예배를 손꼽아 기다린다.
주일예배 때 은혜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주일예배 때 은혜 받을 심령의 준비를 한다.
그러고도 은혜 받지 못하면 기적도 그런 기적이 없다.

-눈 멀고 말 못한 사람이, 말을 하고 보게 되자, 격한 반응이 일어났다.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무리가 다 놀랐다.
눈 먼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도 놀랄 일이다.
말 못한 사람이 말을 하게 된 것도 놀랄 일이다.
그런데 두 가지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다 놀랄 법도 하다.

-무리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이게 은혜 받은 사람의 외침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본문에서는 무리의 반응과, 이어서 바리새인들의 반응만 나오지만, 말 하게 되고 보게 된 당사자의 반응은 어땠을까?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이 자기 인생 최고의 날이 되지 않았을까?
오늘 이 예배가 우리 인생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축복한다.

-평생을 캄캄한 인생길을 걸었던 사람, 평생을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던 사람이, 눈이 열리고 입이 열렸다.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열린다.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린다.
전에는 땅만 바라보며 살았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리고는, 사방이 가로막혀도 하늘을 바라보게 됐다.

-또한 시야가 넓어졌다.
전에는 시야가 자기 집, 자기 가족, 자기 직장이 전부였다.
기도를 해도, 기도의 지경이 자기 집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시야가 넓어지고는, 먼저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었다.
도시복음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나면 입이 열린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전에는 좋은 말을 못했다.
다른 사람 칭찬 한 마디 못해봤다.
윗사람을 향해 “존경합니다”는 말 못해봤다.
그런 말을 하면 혓바늘이라도 돋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입이 열리고는 먼저 예배 때 아멘부터 나온다.
예배 후 “오늘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는 인사가 나온다.
일상생활에서 긍정의 말, 믿음의 말, 축복의 말이 나온다.
윗사람뿐만 아니라 아랫사람한테도 “존경합니다”가 나온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가 나온다.
불신자를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나온다.

-오늘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라.
내 눈이 열려 하늘을 바라보는가?
내 시야가 확장되고 기도의 지경이 넓어졌는가?
내 입이 열려 예배 때 “아멘”이 나오고, 예배 후 “은혜 받았습니다”가 나오는가?
내 일상생활에서 복음이 나오고 축복이 나오고 칭찬이 나오는가?

-남 잘 된 것을 다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라.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고생하더니 합격했구나 잘 됐다.”
“노력하더니 성공했구나 축하한다.”
이게 잘 안 된다.
진심으로 그렇게 축하하고 축복할 수 있어야 가족이다.

-어떤 목사님한테 들었는데, 목회자 아들이 S대 가는 것보다 대학에 떨어졌을 때, 교인들이 더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고 하더라.
자기 집 애는 떨어져 재수하게 생겼는데, 목회자 애가 S대 장학생으로 들어가면, “목사님이 어떻게 내 속을 알아주겠느냐” 푸념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여야 질 좋은 그리스도인 아닐까?
“목사님 축하합니다.”
“목사님 너무 잘 됐네요.”
“하나님이 목사님 가정을 위로해 주셨네요.”
“목사님은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예준이가 수능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 나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능력도 믿고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여, “대학은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데 가고, 공무원시험 봐서 공무원 하라”고 했다.
그런데 예상 밖에 “싫어” 하더라.
학원 다니면서 나이 30이 넘어 공무원시험 준비하느라, 고생 고생하는 사람들을 봤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어려운 시험을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걸 보라고 하냐”며, “지금 성적으로 괜찮은 대학 갈 수 있는데...(침묵)...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며 눈물을 쏟더라.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애 손을 잡아줘야 할지...눈물을 닦아줘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당황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나는 그 애가 우는 것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보고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애가 눈물도 없는 독한 놈인 줄 알았다.

-목사도 가정을 가졌기에 돈 문제 앞에 힘들 때가 있다.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당신은 돈 못 버는 것 빼고는 다 좋다”고 할 때, 다 좋다는 말은 기억에 안 남고 돈 못 버는 사람이란 말에 상처가 된다.
애초에 돈 벌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돈에서 마냥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애 교육문제로, 다 큰 애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때, 나 역시 울컥하여 눈물이 글썽거려졌다.
그래서 얼른 창쪽으로 고개를 돌려,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애 얼굴을 보는데 애비로서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어, “그럼 네가 고민해 봐라”며 헤어졌다.

-서로에게 축하를 잘해야 한다.
진심을 담아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바리새인들은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예수님을 공격하는 도구로 봤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고, 사람이 돈으로 보이면 불행해진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은 기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똑똑한 사람은 행복하기 어렵다.
날카로운 사람, 예민한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산들, 얼마나 살겠는가?
너무 정확하다 못해, 인색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든 사람 앞에서든 마찬가지다.
어떻게든지 마음을 후하게 쓰려고 하자.
준만큼 받고, 뿌린만큼 거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축하하고 축복할 일에, 도리어 이상한 논리로 어거지(억지)를 쓰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이 논리적으로 반박하셨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의 결국은 황폐하여진다.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한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 아닌가?
어디 이게 나라나 동네, 집에만 해당되겠는가?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분쟁하는 교회는 결국 황폐해지고 만다.

-그런데 의외로 분쟁하는 교회들이 많다.
대외적으로 분쟁이 드러난 교회는 심한 수준이고, 여진처럼 분쟁이 계속되는 교회들이 많다.
포항만 해도 하도 여진이 자주 와서, 이제는 와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사실 여진도 무시할 것은 아니다.
복싱에서 잽과 같은 것이다.
잽은 한 대 맞으면 별 것 아니다.
그러나 잽을 계속 맞으면, 몸에 충격이 쌓이게 된다.
여진도 그런 것이다.
여진이 계속 되다가, 갑자기 큰 지진이 한 번 오면 크게 무너진다.

-사탄은 분쟁의 영이다.
그런데 이 분쟁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사탄의 나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힘쓰라.
교회의 화평을 위해 서로 힘쓰라.
처음엔 작은 구멍만한 분쟁이지만, 사탄이 틈을 타면 가정의 댐이 교회의 댐이 터지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좀 더 공세를 펴셨다.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했다.
그들이 율법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그걸 지적하시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말씀하셨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음을 밝히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임하였다고 선포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어디에? 우리 안에...
어디에? 우리 교회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게 확장이 필요하다.
이게 전도요 선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센터가 교회이다.
교회는 베이스캠프이다.
베이스캠프엔 양식과 안식이 있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 분쟁이 있다면 죽음이다.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일 제곱미터도 확장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셨다.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1, 32 두 절의 구조가 같다.
“사하심을 얻되”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사하심을 얻지 못한 죄로 들고 있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모독이나 거역은 비슷한 의미로 쓰인 것 같다.
사람에게 지은 모든 죄, 인자를 거역한 죄도 사하심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성령 모독죄, 성령 거역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성령께서 양심의 가책을 통해 책망하신다.
인자를 거역한 죄를 지었을 때도 마찬 가지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닭울음소리를 통해 찾아가셔서, 그를 회개하게 하셨다.
성령님이 회개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님을 거부하면 회개할 길이 통째로 막히고 만다.

-성령님은 여러 가지 통로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깨어 있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성령님이 힘들어하신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기 생각이 확고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리더가 말을 해도 자기 생각만 붙들고 있다.
가르침을 줘도 자기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런 사람도 구원을 받는 데는 문제없을 거다.
문제는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것이다.
신앙의 기쁨은 없고, 예배의 은혜는 없이, 교회 문턱만 넘나들게 된다.

-열매는 없고, 혹 있어도 어디 내놓기 어려운 볼품없는 열매다.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런데도 자기는 좋은 나무인줄 안다.
물론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신앙의 기준인줄 알아서다.
그러다보니 너무나 확신을 가지고, 생각 없이 말을 해댄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선한 말은 찾아볼 수 없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선한 말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쌓아 온 선에서 나온다.
그가 살아오면서 쌓은 덕에서 나오는 것이다.
덕 없는 사람이 덕 있는 말을 한다고, 덕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평소 덕 있게 살아온 사람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던져도 그게 덕이 된다.

-어떤 말을 할 거냐를 고민하기보다, 어떤 사람이 될 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어떤 말을 했다고, 어떤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에 힘이 있다.

-주님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심문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겁이 덜컥 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한 말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찰스 스윈돌의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들며 마치겠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다.
2. 우리는 그 동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3.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4. 우리가 그 상황에 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5.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6. 우리에게 편견이 있고,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7. 우리는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