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1:누구를 위한 안식일입니까?(마 12:1-2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1-08 00:00
조회
1156
마태복음 강해 31누구를 위한 안식일입니까?(마 12:1-21)2017. 1. 8. 프롤로그

-교회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유일한 구원자, 주일성수, 십일조 등이다.

-유일한 구원자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걸 지키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유일한 구원자 무너지면, 기독교는 무너진다.
아무 종교나 믿어도 되고, 아무 신이나 믿어도 된다면, 나부터도 예수 믿을 맘 없다.
예수 아니면 구원이 없으니까, 예수 믿는다.
예수 외에 구원의 다른 길이 없으니까, 외길 예수를 따른다.

-주일성수는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되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모든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신앙 고백하는 것이다.
주일만이 아닌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다.
주일만이 아닌 평일 육일도 주님의 날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니까 주일을 구별하지 않고 자기 날로 쓰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주일성수가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라면, 십일조는 물질을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릴 것과 나를 위해 쓸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줄 몰라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거 아닌가?
물질을 잘 구별해야 한다.
심지어 내 호주머니 안에 있어도,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가?눅 20: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쳐도 안 되고,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쳤다고 가이사에게 안 바치면 안 되고, 가이사에게 바쳤다고 하나님께 안 바쳐도 안 된다.

-또한 하나님께 바칠 때도, 용도를 바꾸면 안 된다.
십일조는 다른 헌금으로 대체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십일조는 십일조고, 감사헌금은 감사헌금이고, 선교헌금은 선교헌금이다.

-우리와 같은 뿌리인 가톨릭은, 이 세 가지 중 주일성수를 제외하고는 확고하지 않다.

-가톨릭에서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
그러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지는 미심쩍다.
성모 마리아 얘기는 접어두고라도,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불교와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스님이 교회에 와서 특강하는 것에 대해, 잘못 됐다고 보지 않는다.
교회 행사에 스님이 와서 축사하는 것 역시,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예배는 아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님이 성경 이야기를 한다고 설교가 될 수 없고, 기도문을 읽는다고 기도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구원관에 있어서만큼은, 가톨릭이 위험한 경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개신교 내에서도, 십일조에 대한 다른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들먹거리며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런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자신들이 십일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이러저러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오천남부교회 있을 때였으니, 꽤 지난 일이다.
갈평에 피정의집이 있다.
그곳에 거하는 수녀님 두 분을 태워드린 적이 있다.
이러저런 이야기 끝에 그들이 물었다.
“개신교는 지금도 십일조 하죠?”
“네” 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사실 우리들은 개신교가 십일조하는 것이 많이 부럽습니다” 하더라.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그들이 주일성수를 붙들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교육진흥국장 노재경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니, 제도적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첫 전조가,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에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나 교회 공동체의 혼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주일성수에 대한 급격한 쇠퇴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320명의 교인들을 상대로, ‘주일성수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밝혔는데...
주일에 결석하지 않는다 29.1%
자주 결석한다 34.7%
조금 한다 34.4%로 나타났다며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지 않는 경우가 69.1%였다고 했다.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못한 요인으로
영적 침체 13.1%
가족과 함께 함 14.0%
경조사 20%
학업 및 경제활동 19.2%
여가 및 취미생활 33.2%로 조사됐다며,
주일성수 개념이 신앙생활의 중심자리에 위치해 있기 보다는, 일상생활의 부수적인 위치에 처하게 됐다고 했다.

-같은 교단 총신대학교 박용규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문화의 발전에 발맞춰, 주일의 개념과 신앙생활이 변화돼야 한다면, 앞으로 주일오전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떠나던 이들이, 여행지 근처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가족들이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주일예배를 대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것도 신앙이 괜찮은 사람의 경우지 대부분은 주일예배를 한 두 번 빠질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주일예배 빠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현상이 생겨날 것이라며, 유럽처럼 1년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나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등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늘날 세속화의 도전, 주 5일제 근무 등 주일성수를 평가절하하는, 일련의 환경적 요인들이 점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에 대한 초대교회와 청교도적인 엄격한 태도는 변치 않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합동 총회는 교단적으로 주일성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어떤 목사님은 솔직히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부끄럽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면,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들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목사님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 주일성수를 말하고, 십일조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고 하니, 율법적으로 들릴 수 있다.
강제성을 띠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학생이 학교를 가야 하는 것과, 직장인이 직장에 가야 하는 것을 두고, 율법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대신 교회 오는 것이 즐겁고, 교회 생활이 재밌어야 한다.

-우리교회는 주일예배를 축제예배로 드리고자 애쓴다.

-첫째 주에는 생일축하 시간을 갖는다.
진행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차이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생일축하 시간이 나는 참 재미있는데, 앞에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에게는, 그게 축제가 아닌 부담의 자리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게 너무 부담이 돼서 안 올 수는 없고, 생일축하 시간 끝나고 오는 분도 있다.
그래서 올해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살짝 고민이 되긴 한다.

-둘째 주에는 성찬식을 갖는다.
본래 주일예배는 예전적인 예배로서, 매주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이 있어야 한다.
매주는 못해 보고, 격주로 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여의치 않아서 매달 둘째 주에 실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찬식 분위기에 있어서는 가톨릭적이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강조점을 두고, 정교회는 부활에 강조점을 둔다.
가톨릭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정교회는 누룩 있는 빵을 사용한다.
가톨릭에서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정교회에서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셋째 주에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린다.
맡은 기관에서 예배위원으로 참여하고 특순을 진행한다.
그것 역시 축제여야 한다.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우리교회 같이 규모가 작은 교회는, 매주 세대통합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회가 나면 이 분야에 먼저 눈을 뜬 교회를 찾아서 배우고, 우리교회에 맞게 적용을 하려고 한다.

-넷째 주에는 치유예배를 드린다.
교단 <예배. 예식서>에 폼이 있어서 실시하고 있다.
시간적 제약이 있어서, 안수기도는 셀프로 한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기도를 한다.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치유, 더 나아가 환경의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
주일예배 시간에 그런 광경을 접해보지 않았기에, 우리교회를 처음 방문한 분들은 낯설어 한다.

-나는 치유예배도 축제로 생각한다.
치유받은 사람의 축제가 아닌, 치유예배 자체를 축제로 본다.

-안식일은 율법과 관련 있지만, 주일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 있다.
주일의 또 다른 이름은 작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에 축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신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고, 더 큰 축제가 어디 있겠는가?
주일예배만 축제가 아니고, 주일이 축제일이고, 주일성수하는 것이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일이 기다려진다.
축제를 기다리는 어린애마냥 기다려진다.
내 고민은 예배에 흥이 안 날 때이다.
회중들의 아멘 없이 입을 꾹 닫고 있을 때 숨이 막힌다.
그러면 예배 후 얼마나 허하고 피곤한지 모른다.

-우리가가 흥에 겨워 찬양하면, 하나님도 흥겨워하실 줄 믿는다.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우리의 찬양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흥겹게 찬양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시지 않겠는가?
그걸 기대하면서 찬양하기 바란다.
마지못해서 입만 벌리면, 보시는 하나님 속 불편해진다.
‘내가 자기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나를 찬양하는 걸 저렇게 힘들어 하나,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이 됐나’ 자괴감이 들지 않겠는가?

-주일성수라고 하면, 날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그럴 거 같으면 유대인들만큼 안식일 잘 지킨 사람들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예루살렘 박물관 안식일 전시관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더니, 안식일은 유대 민족을 역사에서 구했다.”
역사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곤경에 처했든,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나치의 유대인 게토에서도, 심지어 대학살 중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만약 날이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의 전부라면, 그렇게 날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뭐라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게다.
안식일 자체가 아닌, 그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한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고 계셨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성전으로 가는 길에 밀밭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가 1.8km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밀밭이 성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음으로 문제가 됐다.
밀밭 사이로 다니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당시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도 문제될 것은 없다. 신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율법적으로도 용인되었다.
시장한 경우에 한해서라고 전제를 달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배부른 사람이 남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따겠는가?
이건 나그네를 배려한 율법 규정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린 배는 달래야 한다는, 하나님의 긍휼이 배어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했다.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를 초과한 것도 아니고,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것도 문제가 없고, 밀 이삭을 따먹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면, 그럼 뭐가 문제인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제자들에 대한 잘못을 지적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밀 이삭을 먹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도 함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로 향한다.
제자들한테 직접 말한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지적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 같았다.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픈 열심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 조상들의 유전을 정했다.
안식일에 하지 않아야 할 규정이 있었다.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 단을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 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꿰매는 일 24) 두 조각을 꿰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제자들이 이 규정 중의 일부를 어겼다는 것이다.
3)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 5)타작, 6)곡식 등을 까부는 일, 7)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이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평일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면 끝이다.
그렇게 했다고 예수님의 권위가 깎이는 것도 아니고, 랍비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를 들고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가, 놉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진설병을 먹고 배고픔을 면했다.
본래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바꾼다.
그리고 물려낸 떡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
다윗이 받은 떡은, 물려낸 떡이지만, 그래도 다윗은 제사장도 그 가족도 아니기에, 먹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 누구도 그것으로 다윗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그 행위도 정죄보다는 관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주일을 성수하는 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일에 빠진 사람에게, “왜 주일 성수를 안 하느냐” “신앙생활 똑바로 해라” “그러고도 집사냐” 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힘들다.
관용 없는 정죄는 안식일 정신이 아니다.

-평소에도 관용 없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하다.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똑똑한 사람도 좋지만, 편한 사람이 되라.
계산이 분명한 사람도 좋지만,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라.
관용 없는 정죄를 일삼는 사람은, 하나님도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예외 규정이 있다.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그것은 제사장이 직무상 하는 일이다.
제사장은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일을 한다.
진설병을 교체하는 것도 일이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도 일이다.
하지만 그건 안식일 규정에 저촉된다고 하지 않는다. 민 28: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10 이는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매 안식일의 번제니라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위법과 하위법이 충돌하면, 상위법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나타났다.
그러면 당연히 그를 따라야 한다.

-성전보다 큰 이가 누구인가?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성전보다 큰 이가 원하는 것은, 안식일 자체보다 자비이다.
안식일을 칼 같이 지키고, 제사를 잘 드려도, 그 안에 자비가 없고 정죄로 가득해 있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율법을 받은 모세도 할 수 없다.
안식일의 주인만이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없다.
모세보다 큰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 받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논리에 수긍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안식일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던 중, 바리새인들과 논쟁 1라운드를 있었고, 논쟁 2라운드는 장소를 회당으로 옮겨서 진행되었다.
1라운드에서 논쟁의 매개가 제자들이었다면, 2라운드는 논쟁의 매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논쟁의 주제는 동일했다.
바로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물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이 왜 물었는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뭐라고 물었는가?“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까”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데려다 회당에 둔 것이다.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회당에 왔다.
종교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회당에 왔다.
회당 밖 1라운드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고, 회당에서 2라운드 승부를 걸었다.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천하의 예수라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준비했다.
미끼를 던지면 덥석 물 수밖에 없도록 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중하게 접근하여 즉답을 피하셨다.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 바리새인들의 보호규정은 이랬다.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준다.
이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낸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대한 그 규정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또한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라면, 안식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규정도 있었다.
그건 안식일 법의 예외 규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법의 일반 규정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고, 예수님은 안식일 법의 예외 규정으로 그들과 맞서고 있다.
실제로 안식일 법의 예외 규정이 되려면, 회당에 있는 아픈 사람이 응급 환자여야 한다.
바로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언제 한쪽 손이 그렇게 됐는지 몰라도, 확실한 건 당장 죽을 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시커먼 속을 모르실리 없는 주님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향해 말씀하셨다.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가 손을 내밀자 손이 회복이 되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운 좋은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세상에 그런 행운이 어디 있나?
가만히 있는 누군가가 와서, 자기를 회당으로 데려다주고, 예수님과 대면하였고 마른 손까지 회복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출발은 불쌍했다.
예수님을 올가미 씌우는데, 종교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도구로 쓰이니 불행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오히려 인생의 복을 만났다.
이게 중요하다.
인생에 역경을 만났다.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이상하게 꼬인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면, 그거야말로 축복이다.

-당시 회당 분위기는 싸늘했다.
전 민정수석 우씨가 질문하는 기자를 쏘아볼 때,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왔다고 했었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종교지도자들의 눈이 그랬을 거 같다.
그런 싸늘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한 쪽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할 때, 선뜻 내미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체하지 않고 내밀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치유에 대한 불타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환경 탓하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만 바라본다.
불타는 소원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 결과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게 되었다.“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판 함정에, 예수님을 빠뜨렸다.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그런데 이상하게 승리한 것 같지 않았다.
2라운드에서도 사실상 승부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 길을 가셨다.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기어이 승부를 내겠다며 승부욕을 불태우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피하셨다.
자신 없어서가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자기 사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였다.
그 정도 문제제기를 했으면 되지, 목숨을 걸 것까지는 없어서였다.

-예수님 소식을 듣고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다.
그래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바라는 존재가 되었다.

-올 한해 행복한 주일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