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송년주일:성탄의 정신을 알고 지킵시다(막 10:4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1-01 00:00
조회
1097
성탄절(2016)성탄의 정신을 알고 지킵시다(막 10:45)2016. 12. 25 프롤로그

-올해는 묘하게 성탄절과 송년주일이 겹쳤다.
좋은 점은 설교를 한 번 덜해도 된다는 것이고 아쉬운 점은 새벽송을 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주일이 52개인데 주일예배에 올 출석하여 개근한 분들도 있고, 한 두 번 빠져 정근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종교개혁지 탐방으로 주일예배를 프랑스 현지교회에서 드림으로, 아쉽게 본 교회에서 주일예배는 개근하지 못했다.
그런 것 보면 1년 52주 본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개근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우등상을 탈 수는 없다.
개인의 능력차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차를 좁히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탈 수 있는 상이 있다.
바로 개근상이다.
개근상은 우등상보다 열등한 상이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어려울 때나 편안할 때나, 한결같이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파도 교회 와서 아프고, 죽어도 교회 와서 죽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없이는 개근상 타기 어렵다.

-올해 주일예배를 개근한 여러분 감사하다.
끝까지 달려온 것을 칭찬한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했다.
문제의 테블릿이 발견되고, 천만의 촛불이 광화문 광장과 전국 각지에서 들려지고, 대통령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탄핵소추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보수 여당이 분당되어, 개헌을 고리로 정계 개편이 급속도로 이루어질 것 같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 되었다.
최순실 이름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뉴스가 궁금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의혹이 불거지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아서, 대관절 그 여자가 어디까지 해먹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와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정말 우리나라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됐나 하는 부끄러움이 든다.
올해는 연말 분위기는 정말이지 영 아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즐거워해야 한다.

-영어의 Christmas란 단어는 ‘Christ’ 와 ‘Mas’ 의 합쳐진 말이다.
그리스도와 미사라는 말의 합성어인 것이다.
미사는 예배를 말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 미사(예배)라고 불러오다가, 중세 영국에 와서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크리스마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내야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는 것인가?
예배하며 보내는 것이다.
성탄전야제에 참여하고, 2부 3부 기분 내다가 늦잠자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면, 크리스마스 잘못 보내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정해진 유래에 대해 살펴보겠다.
로마교회는 4세기에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하고, 이어서 1월 7일을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현현일 (Epiphany)로 기념하였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해가 가장 짧았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보고, 이날을 축제일로 삼아 농업을 주관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주후 274년 Aurelian(아우렐리안) 로마황제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다.
북유럽에서는 이전부터 태양이 다시 소생하는 동지를 기념하는 축제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요 1:9)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빛"의 탄생인 셈이다.
로마에서 이교도들이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정한 것과, 기독교에서 "세상의 빛"이 탄생한날을 12월 25일로 결정한 것은, 이교도들의 "태양의 빛"과 기독교의 "세상의 빛"을 일치시킴으로,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더욱 의미있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부정해 오다가, 6세기 이후부터 1월 7일과 12월 25일로 분리하여 경축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크리스마스는 통일되지 않았다.
우리 개신교와 가톨릭은 12월 25일에, 동방정교회는 1월 7일에 지켜오고 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나로 통일될 수 있을까 싶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성탄의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다.
성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예배할 수 있다.
성탄의 정신과 무관하게 축제를 통해 웃고 떠들 수 있다.
성탄의 정신을 모르니까 자기가 선물 받는 날인줄 안다.
성탄절은 예수님한테 선물을 드리는 날이다.
동방박사가 주님께 나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처럼, 예수님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날이다.
다른 예배 때도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오면 안 되지만, 성탄절예배는 더욱 그렇다.

-성탄의 정신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다.첫째 섬김의 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섬김의 생애였다.
남을 위해 전적으로 사셨던 봉사의 삶이었다.
이 세상의 누가 예수 그리스도만큼 섬겼겠는가?
주님은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전적으로 이타적 삶을 사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예수님 자신의 사명선언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오셨고,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주님이 어쩌다 섬김의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봉사하는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섬김의 정신에 따라 사셨다.
섬김의 영성을 갖고 사셨다.
섬김을 자기 사명으로 아셨다.
주님의 의식 속에는 ‘나는 섬기기 위해 태어났고, 섬기는 삶을 살다가, 섬기는 자리에서 눈을 감겠다’는 의식이 분명하셨다.

-주님의 섬김에는 차별이 없었다.
당시는 신분제도가 분명하던 시대였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여자는 사람의 수에 들어가지 못했고, 어린아이도 사람으로 계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님은 여자를 존중해 주셨고, 어린 아이를 인정해 줌으로 섬김의 도를 행하셨다.

-특히 귀신이 들렸거나,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고,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여기는 사회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셨다.
이들을 고치는 데는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당시로서는 큰 일 날 소리였다.
안식일 문제로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혀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 자체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더 귀하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제자의 제자 됨은 스승을 따름에 있다.
가장 제자다운 제자는 스승을 본받는 제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전도자 무디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섬김이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저울이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섬김의 삶이다.

-한 왕자가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 딸의 손을 곱게 하기 위하여, 손으로 해야 할 일은 도무지 시키지 않았고, 예쁘게 가꾸기만 했다.
어느 날 한 아름다운 소녀가, 무엇 때문인지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애쓰는 불쌍한 말을 보았다.
말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부드럽고 흠 없는 자기의 고운 손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고운 마음씨는 고운 손을 생각하지 않고, 발버둥치는 말을 살핀 다음 발에서 가시를 빼 주었다.
그러다 소녀의 손이 그만 긁혀서 상처를 입고 말았다.
왕자는 이 소녀의 손을 보고, 그리고 이 소녀가 했던 이야기를 들은 후, 두말없이 그 소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우리 주님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님 앞에 제일 고운 손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꾼 손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일도 해보지 않아, 부드럽고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손 역시 아닐 것이다.
섬김과 봉사의 흔적이 있는 손이다.
교회 안팎에서 봉사하느라고 닳고 거칠어진 손이,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은 건강이다.
그러나 건강이 우상시 되고 있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용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다.
외모를 뜯어고치는데 거액을 지불한다.
몸을 지나치게 아낀다.
혹 닳아질까 겁낸다.
약간의 상처라도 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안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인생은 이 땅에 한 번 왔다가 가게 된다.
아무리 아끼고 가꾸고 다듬어도 못쓰게 될 날이 온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자기 몸을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요즘에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내가 자랄 때만해도 시골에서 논밭을 갈 때에 소가 끄는 쟁기가 흔했다.
쟁기에는 보습이 달려있다.
보습은 쇠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고 장기간 놔두면 녹이 슬어 못쓰게 된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까지는 보습이 스텐처럼 빛이 난다.
쓰지 않아 녹슨 보습도, 열심히 일해 빛난 보습도, 어느 정도 지나면 수명이 다한다.
그러면 애들이 그것 가지고 엿 사 먹었다.
논밭을 갈았던 보습은 많은 일을 하고 빛나는 기간을 가졌지만, 녹슨 보습은 그냥 고물로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서 일정 기간을 살다가 죽는다.
여러분은 녹슨 보습 같이 살겠는가?
빛나는 보습 같이 살겠는가?
우리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앞에 서야할 날이 온다.
그때 녹슬어 없어진 삶을 산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예비되어 있다.
그러나 주를 위해 닳아 없어진 삶을 산 사람에게는 빛나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족만을 위해 살다가, 녹슬어 없어지는 것을 택하겠는가?
그리스도를 섬기고, 교회 안팎에서 봉사하다가, 닳아 없어지는 것을 택하겠는가?

-성탄의 정신 첫째는 섬김의 정신이다.

------------------------------------------------------- 둘째 희생의 정신이다.

-보냄받은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같지 않다.
아니 같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세상에 보내졌는지를 분명히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여느 보통 사람의 삶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살아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을 섬기고, 죽을 때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무나 또렷이 알고 계셨다.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생을 섬기며 살기도 어렵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 어렵다.
보통 때는 희생을 장담하던 사람도, 희생해야 할 결정적인 때가 되면 뒤로 물러나기 쉽다.
이게 사람이다.
그래서 희생정신을 발휘한 사람은 오늘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영국 중부 코벤트리에는 행인의 눈길을 끄는 여인의 동상이 하나 있다.
11세기 무렵 이 지역의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영주의 부인은 영주에게 세금을 감해 줄 것을 간곡하게 탄원했다.
영주는 그럴 수 없다고 단번에 거절하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만일 당신이 알몸으로 이 마을을 한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소"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영주의 부인은 말없이 긴 머리를 풀어 내린 채 알몸으로 말에 올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 커튼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도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은, 알몸으로 말을 탄 이 여인의 동상 앞에,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자신의 체면이나 위신은 아랑곳없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치른 이 여인의 희생 때문이다.
희생이 감동을 주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면 우리를 자신이 달려야 할 그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셨다.
지고 가다 넘어지면 여지없이 군화발로 걷어차였다.
옷이 다 벗겨진 채 희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
온갖 욕설과 침 뱉음을 당하셨다.
녹슨 세 개의 못으로 십자가에 박히셨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리셨다.
생명의 불꽃을 태워 희생의 제사를 드리셨다.
주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희생정신을 발휘하셨다.

-이건 주님 자신의 희생일 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희생정신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 입장에서는 기쁨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픈 날이다.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해야 했던 고통스런 날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원수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 던져야 했던 가슴에 피멍든 날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한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관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이다.
승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고개를 막 넘어가려던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하였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눈에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커브길이 보였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승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 채고는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 났다.
하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게 커브길을 한 개 두 개 잘 운전해 나갔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커브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승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이젠 마을길을 지나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 차가 자연적으로 서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운전사의 눈에 저 멀리 아이들이 길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울려 피하라고 경고를 하였다.
모든 어린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순간 운전사는 승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승객의 안전을 택하고 그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다.
그리고 버스는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하며 운전사에게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품에 고개를 묻고는 아이를 안은 채 흐느끼며 옆의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쫓아가면서까지 "살인자~!" 하며 야유를 하였다.

-그 순간 어떤 젊은이가 말했다.
"모두들 그만둬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하지 말아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기껏 살려놓으니까, 운전사를 향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승객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무능한 하나님으로 여기려고 하는 우리 아닌가?
또 한 번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무례한 요구를 하는 우리 아닌가?

-이제 우리 차례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희생해야 할 차례란 말이다.
자녀가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도움을 받아 자라고 성장했으면, 이제 늙으신 부모를 자녀가 봉양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해야 할 차례이다.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애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