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9:확신에 거하는 것이 복입니다.(마 11:1-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21 00:00
조회
1013
마태복음 강해 29
확신에 거하는 것이 복입니다.(마 11:1-19)
2016. 11. 20.


프롤로그

-플라시보 효과(Placeboeffect)라는 것이 있다.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말한다.

-어느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약을 주면서, “이 약을 마시면 구역질이 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약을 마신 자들이 모두 구토 증세를 보였고, 그 중 80%는 실제로 구토를 했다.
그래서 다시 “이 약은 구토를 중지 시키는 약이다”고 하면서 약을 주자, 참가자들은 그 약을 먹고 즉시 구토를 멈추었다.
두 가지 약 모두 색깔만 다를 뿐이지, 아무런 약 효과가 없는 거였다.

-플라시보 효과가 어떨 때 더 나타나는가를 실험해 본 결과다.
환자가 의사와 병원을 신임하면 신임할수록 효과가 좋았다.
한 번 약을 먹어서 그 약의 효과를 본 환자일수록 효과가 좋았다.
똑같은 약이라도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복용하면 효과가 더 컸다.
솔직하고 순진한 성격의 사람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므로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다.

-반면에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는 것이 있다.
진짜 약을 처방해도, 그 약이 해롭다고 생각하거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환자의 부정적인 믿음 때문에 약효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고는, 자기가 다시 조제를 한다.
“이것 먹어봤자고...이건 먹으면 속 버리고...이거 하나 쓸만하네....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이런 부정적인 믿음으로 먹는데, 약효가 나타나겠나?

-미국의 어느 철도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회사에서는 열차가 역에 정차하고 있는 동안에, 한 직원에게 냉동차 안을 청소하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냉동차 안에서 사람이 청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군가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떠나버렸다.
안에 갇힌 사람은 냉동차 안에서 탈출하려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강제로 문을 열려고 노력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그는 냉동차 안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당시 냉동차 안의 온도가 14도로 바깥 기온과 별 차이가 없었다.
냉동차의 스위치가 꺼져있어서, 냉동시설이 가동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 그가 하룻밤을 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산소가 충분히 있었다.
즉 아무리 냉동차 문이 밖에서 잠겼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물리적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스스로의 생각에 의한 쇼크 때문에 사망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 자기 확신이라고 한다.
이는 일정한 생각을 반복하면, 그 생각이 실제로 심리적, 신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한다.
냉동차를 청소하다 갇혔던 사람은, ‘여기는 냉동차 안이야, 추위 때문에 나는 결국 얼어 죽고 말거야’ 하는 생각을 반복했기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자기 확신은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부정적인 자기 확신의 다른 말이 ‘자기 비하’이다.
'자기비하'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이나 위상을 낮게 평가하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투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비하에 상반된 개념으로, 자기효능감이 있는데 스스로의 행동, 활동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념체계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난 부분과 못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난 부분은 잘 보지 못하고, 못난 부분만을 과장하여 반복해서 생각한다.
반대로 자기효능감이 강한 사람은, 잘난 부분에 구체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못난 부분이라도 차차 고칠 수 있다며 자기를 긍정적으로 본다.

-자기효능감을 키우고, 습관적 자기비하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자신이 잘 하는 일을 반복 실행하는 것이다.
둘째, 삶의 오답노트를 쓰는 것이다.
셋째,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기'다.

-성적이 떨어져 충분히 공부하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왔다.
그 학생의 얘기를 듣고 난 선생님이 물었다.
"만약에 너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후배가 있다면 너는 그 애한테도 '너는 안 돼',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할 거니?"
"아니오."
"그럼, 너는 그 후배한테 어떻게 말해줄까?"
"뭐...넌 할 수 있다, 잘 될 거니까 마음 편하게 먹어라, 이렇게 말하겠죠."
"그래? 그런데 가장 소중하고 귀한 너 스스로에게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데?"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나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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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전도훈련을 한 후 실습까지 마쳤다.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여러 동네로 다니셨다.
이유는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킨 후 실습하고, 실습 후 사역하고 해서, 제자다운 제자로 만들어가셨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할 수 있는 제자로 세워가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그거였다.
무리들을 만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때도 있었다.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다.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해주셨다.
그럼에도 주님의 깊은 관심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아닌, 열두 제자에게 있었다.

-예수님의 목회는 제자훈련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는 목회에, 지극 정성을 기울이셨다.
예수님이 가시면 교회가 남겨질 텐데, 이 교회를 제자들이 세워가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고, 제자들과 함께 떠날 때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행하셨다.
지역만 달라지고 대상만 바뀌었지, 매일 하는 일은 같았다.

-사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는가?
매일 매일이 별다른 삶이 아니다.
삶은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 부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내가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말이 있다.
“이날 평생 죽어라 일만하고...”

-건강한데 할 일 없어보라.
쉬는 것도 며칠이다.
여행하는 것도 며칠이다.
전에 성지순례 갔을 때 1주는 견딜만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집 생각밖에 안 나더라.

-성경은 노동을 축복이라고 한다.
수도원에서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라고 했다.
내가 속해 있는 교회가 있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사역이 있다는 게 감사할 일이다.
그게 주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감당하기 바란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한테 자기 제자들을 보내왔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당시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다.
무슨 잘못을 해서라기보다 통치자한테 밉보여서다.
예나 오늘이나 최고 통치자한테 밉보이면, 어려움이 따른다.
그걸 감수하고도 자신의 믿는 바를 지키며 사는 사람은 존경받아야 한다.

-당시 통치자가 헤롯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았다.
헤로디아가 예뻤던 모양이다.
자기 아내도 예쁠텐데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동생 아내를 취한 것이다.

-백성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종교지도자들은 비판적인 관점을 가졌다.
신하들도 대놓고 말은 못해도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헤롯 면전에서는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성질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 세례 요한이 헤롯 앞에 나섰다.
“그건 부당한 일이오.”
그러자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붙잡아다 옥에 가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탈출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는, 갇히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감옥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접견을 오는 제자들을 통해서, 어쩌다 바깥소식을 듣곤 했다.
세례 요한의 최고 관심은 예수님이었다.
자신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여겼고,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했던 그였다.
자기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자니, 예수님의 일이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거 같았다.
그래서 확신이 조금 흔들렸다.

-그 안에 갇혀 있으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묻기도 수차례 했을 것이다.
그래도 고민이 시원스레 풀리지 않았다.
더 이상 고민하다가는 병들 거 같아 직접 물어보려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기로 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기서 “오실 그이”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말한다.
“우리 스승님이 안부 전해달래요.”
“예수님, 너무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런 거 생략하고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아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례 요한에게 이보다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혀 내일을 알 수 없는 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헤롯이 정권에 부담이 되는 세례 요한을, 쉽게 내보내줄 리는 없다.
그럼 세례 요한은 살 소망은 일찌감치 접었을 수 있다.
그의 소망은 예수가 그리스도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다면, 자신은 사명 감당한 것이다.
만약에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인생 최대의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기분 나쁜 질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반응하셨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타작 마당에서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를 날려보내고, 도끼를 들어 나쁜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는 심판자이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은 이사야 35장, 61장에 나오는, 자신의 구원자 사역을 알리게 했다.

-구원자 사역을 여섯 가지로 소개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 중 다섯 가지는 육체의 치유와 회복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육체의 치유와 회복을 겸한다.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 구원만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다섯 가지 사역을 자연스럽게 행하셨지만, 그것들이 복음 전파사역에 비해 열등한 사역이 아니었다.
육체의 치유와 회복이 복음의 본질은 아닐지 몰라도, 복음의 현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게 복음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현상이 뜸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게 시들해져서 그럴 것이다.
복음의 현상은 복음을 전파할 때 나타나고, 나타나는 복음의 현상을 통해 복음이 더 힘 있게 전파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확신하는 것이 복 있다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다.
그들을 예수님께로 보낸 스승 세례요한이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이 생각해 온 메시야, 자신이 꿈꿔 온 그리스도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맘 같아서는 자기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맘과 달리 몸이 갇혀 있는 상태다.
자기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언제 자기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고민하다 제자들을 확인 차 보낸 것이다.
제자들이 확실한 답을 가져오면, 조금이라도 확신이 흔들렸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 요한에 대해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실은 제자들이 아닌 세례요한 들으라고 한 말씀 같다.
어차피 제자들이 가서 스승인 세례요한한테 전해줄 것 아닌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주님한테 실족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목회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나 때문에 신앙에 실족하는 것이다.
김집사 꼴보기 싫으면 다른 교회 가면 된다.
이권사 박장로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된다.
목회자에게 시험 들면 예수님을 떠날 수 있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음식점에서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때 사장님 내외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한테 참 잘해줬다.
몇 달이 지난 후 사실 고백을 하더라.
자신들도 전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고....
내가 짐짓 놀라며 “아니, 그런데 왜 지금은 교회를 안 나가세요”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어느 날 사택에 갈 일이 있어서 갔는데 사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처음엔 잘못 들었는가 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대판 싸우더라고....”
그 얘기를 듣는데 괜히 내 얼굴이 붉어졌다.

-당시 자기들은 목사님은 화장실도 안 가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 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뒤로는 교회를 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그 부부가 왜 교회를 떠났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게 꼭 남의 얘기겠는가?
나 때문에 실족하여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나중에라도 다시 교회를 나가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
실족하려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실족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설교를 듣고도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이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늘 분별력과 통찰력과 창의력과 선견력을 구하고, 교우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하긴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말 다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실족하는 일이 없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 역시 실족하는 일이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실족했는가?
종교지도자 같은 사람들이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곤 했다.
자기들이 맞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이 틀린 것이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니 예수님이 삐딱하게 보인다.
거꾸로 된 시선으로 보니 예수님이 거꾸로 보인다.
그리고는 예수님더러 왜 삐딱하냐고 왜 거꾸로냐고 한다.

-너무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다가 포장지가 찢어지면 여러 사람 실족시킬 수 있다.
가능한 본 모습을 보이려고 하라.
그리고 더러우면 씻고,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라.
완벽하기를 포기하라.
그러면 실족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은 확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군가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사람을 확신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다.
확신의 대상은 오직 예수 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확신할 수 있다.

-교회 다닌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다.
심지어 예수님한테 세례를 주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확신이 흔들린 것 아닌가?
삶이 너무 팍팍하니까... 환경이 너무 암울하니까....
확신에 거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확신하는 것이 신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다.
예수님 시대와는 2천년의 간격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확신한다.
그럼 그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최고의 기적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이다.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은 예수 믿은 그날부터 매일 매일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예수님이 무리에게 입을 여셨다.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얘기 내용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좀 깎였다.
그게 마음에 좀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말씀을 하셨다.
그걸 위해 세례 요한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사역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뭘 해도 목이 중요한데 세례 요한은 거친 땅 광야에서 사역을 했다.
그런데도 허다한 무리가 그에게 나아왔다.

마 3: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주위 사람들만 나아온 게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왔다.
민중들만 나아온 게 아니다.
종교지도자들, 종교엘리트들도 왔다.

마 3:7a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지금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도, 다수는 광야의 요한에게 갔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물으신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예수님은 무리에게 질문을 연달아 한 후에, 잠시 기다리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무리들이 광야를 찾았던 것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굳이 광야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세례 요한은 메시야도 몰라보고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경계하며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로 높여주셨다.

-그냥 립서비스한 것이 아니다.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성경 아래에 표기되어 있듯이 말라기 3:1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다.
여기 세례 요한의 사명이 나온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세례 요한은 메시야보다 앞선 사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사명을 감당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고 사역도 그렇게 했다.
그는 자기가 주연이 아니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주연임을 전했다.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예수님은 그런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께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이다.
그렇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적으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가 되어 도시복음화 민족복음화 민족복음화를 이루는 예수 생명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이 큰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다른 욕심은 몰라도 그런 욕심은 좀 내기 바란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다시 말하면 천국은 용기있는 자의 것이다.
누가 천국 가는가?
용기 있는 자가 간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너무 소심하여 “나 같은 죄인은 그걸 받아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하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아직 천국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때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소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천국문이 닫힐 날이 온다는 말이다.
우리가 끝까지 견뎌야 할 이유이다.
우리가 너무 느긋하게 전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갈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이다.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피리를 불면 ‘부나보다’ 한다.
슬피 울면 ‘슬픈 일이 있나보다’ 한다.
바로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관심없다.
이사를 와도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가 끝이다.
공동체로 살아야 할 사람이 개인으로 산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하셨다.

-그런데 기껏 자기 가족밖에 모른다.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쓰는 것 귀찮다는 것이다.
남한테 간섭받기도 싫고 나도 간섭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건 자기 성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그러다 자기가 쌓은 성에 자기가 갇히고 마는 날이 온다.
그래서 일인가족시대를 마냥 반길 수 없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삶의 방식이 확연히 달랐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요한은 금식과 절제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자 별 관심없던 사람들이 말했다.
“귀신이 들렸다”
예수님은 잘 먹고 즐기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남에게 무관심해도 안 되지만, 남의 말에 지나치게 민감해도 문제다.
그런 사람이 꼭 들어야 할 말은 안 듣고,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듣는다.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확신에 거하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확신하는가?
남은 삶을 그 확신에 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