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8: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건 없습니다.(마 10:34-42)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13 00:00
조회
1298
마태복음 강해 28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건 없습니다.(마 10:34-42)
2016. 11. 13.


프롤로그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호의 문제이니 탓해서도 비판할 필요도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낸다.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몸에 엔돌핀이 생성된다.

-뭐 하나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집착하면 문제가 되긴 한다.
또한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방해가 돼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적당히 좋아하는 것은, 일상의 반복된 생활에 좋은 활력소가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운동이 그렇다.
우리 노회에서 김성철 목사님과 나는 운동권으로 분류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다면, 운동선수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오십이 넘은 지금도 푸르른 운동장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하면 말 다했다.

-요즘은 주위 목사님들로부터, “류목사, 오십 넘어서는 축구같은 과격한 운동은 관둬. 위험해” 하는 말을 듣곤 한다.
실제로 다치는 횟수도 잦아지고, 한 번 다치면 회복 속도도 예전만 못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축구보다 재미있는 운동이 없다.

-축구는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수준 있는 리그의 경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내는 타박하기를 “어떻게 당신은 TV만 틀면 축구가 나와요. 신기하네” 한다.
시호도 “몇 시에 아빠 축구 봐야한다”고 하면, 자기 좋아하는 만화를 보다가도 채널을 양보해준다.

-축구란 운동이 좋지만 단점도 분명하다.
결정적인 단점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이 해서 더 재미있는지 모른다.
아침 운동은 한 주에 두 번 정도, 새벽기도 후 목사님들과 모여서 한다.
축구할 숫자가 안 되니, 미니 게임을 할 때가 많고, 땀 흘리는 것에 만족해하곤 한다.
그런 팀이 지난 영남지역목회자축구대회에서, 무패 우승을 했으니 내가 봐도 기적이다.

-축구 정식 경기는 주일 저녁에 한다.
그 때는 주일사역을 마치고 몸이 피곤한 시간이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그 시간에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주일에 기상청으로부터 비 예보가 있으면, ‘기상청 예보가 빗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경기 시작 전까지 웃비가 내리고 있어도, ‘오늘 경기는 정상으로 진행됩니다’ 하는 문자 오기를 기다린다.
유니폼을 입고 축구장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은 설명이 안 된다.

-넓은 축구장을 미친 듯이 2시간 남짓 뛰어다니며, 온 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후, 집에 와서 샤워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다.
그 시간에 축구하러 가다보니, 저녁 식사는 부실하다.
저녁 8시 이후에는 잘 안 먹는 편인지라, 운동 전에 미리 먹고 가는데, 배부르게 먹으면 운동에 방해가 되어, 빵 같은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간다.
운동 마치고 오면 배가 추출하지만, 그래도 운동했다는 것에 배부른 느낌이 든다.

-축구 다음으로 좋아하는 운동이 탁구다.
일반 탁구장에서 치지 않고, 목사님들과 어울려 치다보니, 실력이 크게 늘지는 않는 것 같다.
시합도 하지만 주로 즐기는 탁구를 한다.
월요일 오후 2시에 운동을 시작하여, 저녁까지 먹고 돌아온다.

-탁구는 지금도 재미있다.
지금보다 더 잘 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한테 탁구는 노후 보험용 운동 성격이 짙다.
축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십 이전부터 몸이 힘들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거친 운동인 축구에 비하면, 탁구는 60대는 물론이고 70대에도 할 수 있다.
그 때를 위해 미리 익혀두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도 탁구대가 있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유감이다.
하루에 한 시간만 쳐도 운동이 제법 되는데 아쉽다.
아내가 자기한테도 탁구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자신이 없어서 시작을 못한다.
마누라한테 운전 가르치다가 이혼할 뻔한 남자들이 있다고 해서, 나도 그럴까봐 탁구장에 가서 정식으로 배우라고 미룬다.
실제로 남을 체계적으로 레슨할 정도의 실력도 안 되긴 한다.

-함께 운동하는 목사님 두 분은, 사모님이랑 같이 와서 친다.
그들 부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치는 것을 보면 좋아 보인다.
두 분이 복식을 이뤄 치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다.
언젠가 나도 아내한테 탁구를 가르칠 날이 올 거 같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좋아하는 대신, 잡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배워볼까도 했는데 안 맞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어쩜 그게 다행이다.
운동을 좋아하는데 거기다 잡기까지 좋아하면, 시간과 돈이 감당이 되겠나...

-여기서 시간과 돈이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잘 보러 가지 않는다.
시간을 내는 게 아깝기 때문이다.
자주 보러가기에 돈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혼자 가는 게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영화를 좋아한다면, 어떻게라도 시간을 내서 갈 거다.
다른 데 들어갈 돈을 아껴서라도, 기어이 영화를 보고 말 거다.
정말 마니아는 혼자서도 보고, 좋은 영화는 몇 번이고 본다.
그러니까 나는 그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카일 아이들먼인데, 그는 어린 시절 마이클 조던 사진 옆에, 예수님의 사진을 붙여놓았었다고 한다.
즉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자라서 목회자가 되어 이렇게 말한다.
“팬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항복하고 헌신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팬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와서 환호하라”이다.
제자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와서 죽으라”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이 1, 2, 3부로 되어 있는데, 3부 제목이 “가장 충격적인 부르심, 와서 죽으라”이다.
3부가 세 장으로 되어 있는데, 장 제목이 이렇게 달려있다.

12. 나는 ‘어디든지’ 간다.
예수님이 지시하면 어디든지 따라나선다.
13. 나는 ‘언제든지’ 행한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꾸물대지 않는다.
14. 나는 ‘무엇이든지’ 드린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자리에 나와 있기 힘들다.
일단 현대인의 최고 가치인 돈과 무관한 일이다.
예배는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써야 한다.
예배 시간도 최소 2시간이다.
황금같은 주일 오전 시간을 통째로 날려야 한다.
예배에 빠지면, 편하게 늦잠을 잘 수도 있고, 취미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만,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의 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축구 관람을 위해 포항스틸러스축구장에 다녀오려면, 오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3시간은 내야 한다.
축구장에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티켓팅을 해야 하고, 그럼 비용이 들어간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집중해서 봐야 한다.
TV는 리플레이라도 보여주지만, 현장에서는 한 번 놓치면 그만이다.

-또 응원도 해야 한다.
골을 넣으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고, 골을 먹으면 탄식을 하고,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는 박수를 친다.

-그것 뿐 아니다.
하프 타임에는 군것질하는 재미도 있다.
그곳에서 먹으면 안 맛있는 것이 없다.

-생각해보면 교회 생활과 닮은 면이 있지 않는가?
혹시 자신이 예수님의 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오늘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제자됨을 점검하고 돌아볼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 말씀 내용이 무겁고 진지하다.
뭐 10장 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재미있고 달콤한 말씀만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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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삶이 아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때 샬롬을 생각했다.
샬롬은 화평, 평강을 말한다.
신령한 복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번영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메시야를 대망했다.
그렇게도 대망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를 연상시켰다.
종교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백성들이 보기에는 메시야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향한, 그런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메시야 환상을 깨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이 단순한 랍비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메시야가 아닌듯한 말씀을 하신다.
아무리 제자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헷갈릴 수밖에 없다.

-우리도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하신다.
여기서 검이 무엇인가?
검은 무기 아닌가?
무기는 싸움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는 나라가 아님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그게 하나님 나라였다면,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힐 일이 없었을 게다.
그들의 신앙 방식을 이해해주고 공존하면 됐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 문제로, 안식일 문제로 다투셨다.
자칫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든 일에 트러블메이커를 지지하셨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피스메이커가 복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이 불화를 선택하신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화평하게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가정 평화를 원한다.
가정의 화목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터와 같은 가정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와 담쌓고 살던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면 그 가정에 화평이 찾아올까? 불화가 찾아올까?
물론 신앙을 숨기고 사는 동안에는 화평이 있다.
언젠가 예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기도하며 화평하게 산다.
그러나 그런 화평은 계속 될 수 없다.
때가 되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화가 생긴다.
어쩌다 쉽게 교회를 따라나서는 경우도, 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오래 갈 수도 있다.
어느 한 쪽이 항복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나?
집안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면, 가정 천국은 먼 나라 얘기다.
기도 응답이 늦어짐으로 인해, 살짝 힘이 빠지기도 한다.
‘혹시 저 인간은 택함받은 백성이 아닌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란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 살면서, 집안 식구가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라.
집안 식구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원수 노릇하겠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은 부담스러워하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싫어할만한 말씀이 나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제자는 가족이냐 예수님이냐를 놓고,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게 신앙인 것이다.
요즘은 항존직 직분자도 교회를 옮겨다니는 시대지만, 항존직 직분자 쯤 되면 자기 집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가 와서 물이 찰 정도다면, 자기 집보다 교회를 먼저 돌아봐야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전번에 비 많이 왔을 때, 교회 오는 사람 아무도 없더라.

-37절은 교회 안 다니는 가족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 믿는 것들은 부모도 없고 남편도 처자식도 없냐”며, 항의를 받을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런 것을 모르실 리 없지만, 그 말씀을 하셔야 했다.
신앙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악세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37절 말씀에 비추어, 주일예배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가족 일로 주일에 출타하는 것 지양해야 한다.
“목사님, 그곳에 가서도 예배는 드려요.”
글쎄, 그게 제대로 된 예배일까....???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행사를 핑계로 예배 빼먹을 것 같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매 주일을 52주 중에 한 주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늘 예배가 내가 예수 믿고 드리는 첫 예배라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오늘 이 예배가 내 인생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해야 한다.
첫 예배니 얼마나 설레고, 또한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마지막 예배니 얼마나 집중하고, 또한 얼마나 잘 드리고 싶겠는가?
분이 아깝고, 초가 아깝지 않겠는가?
조는 게 어디 있겠는가?
스마트폰 만지는 게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예배 드림으로 증명돼야 한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 자세가 불량할 수 없다.
사랑은 태도가 중요하다.
불량한 태도로 사랑한다면, 불량한 사랑이 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진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꿋꿋이 진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지기 싫어한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남한테 떠넘기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주셨다.
그게 사명의 십자가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십자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꿈교회의 직분과 사역의 십자가이다.
교회 밖에서의 일에 비하면, 그게 빛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교회 내에서도, 크게 알아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그 직분을 주님께 받았고, 그 사역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면 되지 않는가?

-우리의 어떤 직분이나 사역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해서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사역하는 것이다.
그럴 때 행복한 직분자, 행복한 사역자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불평이 나온다.
불평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불평한 자리가 만들어지고, 불평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면 그 다짐이 수포로 돌아간다.

-십자가는 내가 만들어서 지는 것이 아니다.
지워지는 것이다.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는 것이다.
누가 직분자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그 사역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 지워진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살린다.
단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이다.
그런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된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다.
이성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다.
합리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다.
주님의 평가 기준이다.
주님의 평가 기준에 맞아야 합격이다.

-대학입학사정관제라는 게 있다.
입학사정관을 활용해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으로, 원래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였다.
입학사정관 전형에서는 수능, 내신과 같은 객관적인 점수는 최소한으로 반영되고, 학생의 가능성과 같은 입학사정관의 주관적인 판단이, 합격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 요인이 된다.

-여기서 ‘주관적인 판단’이란 말이 중요하다.
대학이 입학사정관에게 위임을 하고, 입학사정관은 그 대학에 적합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직분자가 되었다.
직분에 따른 사역도 맡게 되었다.
평가 기준도 주님의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자신의 기준을 밝히셨다.
확실한 것은 실적 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동일하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셨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한테 내 목숨을 맡긴다는 말이다.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 목숨은 하나다.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하는가?
그럼 진지하게 묻겠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숨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가?
저승사자가 데리러 왔을 때, “뭐 벌써 왔어요? 돌아갔다가 십 년 후에 오세요” 하며, 설득하여 돌려보낼 자신이 있는가?
“백세 인생”을 불러 전국민에게 ‘백세 환상’을 심어준 가수 이애란 씨도, 꼼짝 못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 목숨은 주님께 달려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예수님께 목숨을 맡기고 산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박해 상황에서, 예수님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육체적 생명을 포기하고라도, 영원한 생명 얻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한다.

-그러려면 포기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아주 작은 것부터 포기하는 것이다.
작은 권리부터 포기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뛰어난 인격을 갖춘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하여”
곧 주님을 위하여서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이다.

-주님 앞에 나아간 여인의 손은 빈손이었다.
12년 동안의 혈루증으로 인해, 가진 것 하나 없는 빈손이었다.
그래서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었다.
주님의 옷자락은 빈손이 아니고는 잡을 수 없다.
빈손 곧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 주님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제자에게는 상이 있다.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큰 복을 받았다.
그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최고의 복을 받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상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늘 상급이다.

-바울처럼 우리도 상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은혜는 손 벌린 자에게 주어지지만, 상은 달려간 자에게 주어진다.
달리되 끝까지 달려야 한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달려가야 한다.
그날에 우리를 맞아주실 주님 기대하며 달려가자.
주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자.

-그리고 이왕이면 큰 상을 기대하며 달려가자.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큰 상을 얻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에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저 같이 소심한 A형인 경우,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에도 담대함이 필요하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식사 대접 한 번 하려고 해도, 담대함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선교사님이 방문했을 때도, 담대함이 없이는 선뜻 영접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에 익숙하다.
그래서 냉수 들고 작은 자 찾아다녀야 하는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말씀을 잘 보면 주님이 영접하라는 사람은 ...
40절 예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41절 선지자, 의인이다.
42절 제자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복음 전하는 자이다.

-그들을 영접하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밥 사주라는 말이다.
자기 생업이 없이 전도하는 평신도에게 밥 사주라는 말이다.
선교사 귀국하면 밥 사주라는 말이고, 또한 목회자에게 밥 사주라는 말이다.

-영접의 기본은 밥 사는 것이다.
그리고 애환을 들어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격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도와 물질로,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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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자.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혹시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하고 살피면서 살자.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우리의 남은 삶을 하늘의 상을 위해 달려가자.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착하고 충성된 제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