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9 00:00
조회
1276
추수감사주일(2016)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2016. 11. 6.


프롤로그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우산 장사를 했고, 작은 아들은 소금 장사를 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매일 두 아들 걱정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우산 장사하는 큰 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오는 날은 소금 장사하는 작은 아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아까운 세월을 걱정하다 다 보내고 말았다.

-이 할머니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 할머니의 문제가 환경에 있었는가?
아니면 할머니 자신에게 있었는가?
일차적으로 할머니 자신에게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웃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생각을 바꾸면 된다.
날씨가 좋은 날은, 소금 장사하는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소금이 잘 팔리겠구나” 하고 생각만 바꾸면 된다.
반대로 비오는 날은, 우산 장사하는 큰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하고 생각만 바꾸면 된다.

-감사하면서 한 해를 살아왔는가, 원망하면서 살아왔는가?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불평하며 살고 있는가?
환경은 그대로이다.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감사의 환경으로 바뀌면 좋겠지만 어디 환경이 쉽게 바뀌는가?
환경이 바뀔 때까지 감사를 미룬다면, 그 때까지 불행하게 살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환경을 보는 눈이 바뀐다.
시간이 더 지나면 환경마저도 바뀌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불평하는 사람들과 환경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결정적인 차이는 환경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이다.
환경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환경은 보는 시각에 따라, 감사의 환경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불평의 환경으로 보일 수도 있다.

-주일예배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오,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길은 온통 빙판이 되어,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천후의 주일을 맞이했다.

-겨우 모인 20여명의 교우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 예배 때도 목사님이 날씨에 대해 감사기도를 하실까?”

-그 날도 목사님은 날씨에 대해 감사기도를 했다.
“하나님, 오늘 같은 나쁜 날씨의 주일을, 1년에 겨우 몇 번만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았고, 그 옆에서는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빨래를 헹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광객이 가이드에게 물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네요?”

-그러자 가이드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아니, 왜요?”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빨래 비누는 나오지 않느냐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건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한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제목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거리를 찾아낸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어떤 사람이 불행할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사하는 사람치고 불행한 사람을 보지 못했고, 불평하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혹시 여러분은 한 사람이라도 봤는가?
감사와 행복은 정비례하고, 불평과 행복은 반비례한다.
감사지수를 높이면, 행복지수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불평지수를 높이면, 행복지수는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이게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행복하게 살기를 정말 원한다면 감사하기 바란다.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속히 되찾기 바란다.

-추수감사주일을 통해, 우리가 그 동안 감사를 잊고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번 추수감사주일을 불평을 극소화하고 감사를 극대화하는 터닝 포인트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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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있었다.
아홉 사람은 유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마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갔다.
가는 도중에, 열 명 모두가 나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열 명의 행동이 똑같다.
그런데 그 뒤는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졌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러나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켰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되돌아왔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했다.

-예수님은 열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드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셨다.
‘왜 그러지’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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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감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오늘 본문에도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내가 아직도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 없다.
사실 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간다.
나병보다 더 몹쓸 병인 죄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겨지지 않는, 죄 짐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

-그것으로 끝났는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우리를 천국의 상속자로 삼아주셨다.

-그것으로 끝인가?
이 땅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하셨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욕심이 충만해서 그렇지, 주님은 오늘도 선한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신다.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약속하였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기만 하면, 풍성한 꼴을 얻고 더 넘치도록 얻을 수 있다.

-그럼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나병에서 고침받고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다.
나병에서 고침받고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치유받은 아홉 사람보다 더 큰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인과는 견줄 수도 없는 은혜를 입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떤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눈을 뜬다면... 나는 제일 먼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맘만 먹으면, 하루에 자기 얼굴을 백 번도 더 볼 수 있다.
우리는 시간만 내면,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아내의 얼굴을 자식들의 얼굴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우리는 고개만 들면, 언제라도 높고 푸른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다.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감사해 봤는가?
자고 있는 자녀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감사해 봤는가?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감사해 봤는가?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 봤는가?
새벽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빛을 받으며, 새벽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 봤는가?

-우리는 너무 감사를 잊고서 살아간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많은 축복 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한 가지만 해도, 감사의 조건으로 충분하다.

-감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본명은 손영준이었다.
그가 나환자들이 모여 있는 여수 애양원교회에 청빙되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내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리라!”
그리고 자기 이름을 애양원을 따서 양원으로 바꿨다.
그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했던 것이다.

-목사님은 그곳에서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나환자들에게, 예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환부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냈다고 하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몇 년 후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 목사님은 두 아들을 잃었다.
붉은 물 든 학생들에게 총살을 당한 것이다.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 때 10가지 감사의 답사를 했다고 한다.
①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②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③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④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⑤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했으니 감사합니다.
⑥ 미국에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에 안심이 되어 감사합니다.
⑦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⑧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⑨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답사를 이렇게 끝맺음 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 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단번에 손양원 목사님 같은 감사는 힘들지 모른다.
사실 손양원 목사님도 처음부터 그런 차원 높은 감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것부터 감사할 때,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결정적인 감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사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작은 일부터 감사해보기 바란다.
일상에서 감사거리를 찾아서 해보기 바란다.
본래 감사는 찾아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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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신다.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어느 마을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나란히 담을 하고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만나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밥을 먹기 전에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우리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게 어떻겠소?”

-그랬더니 불신자가 한 마디 했다.
“믿고 안 믿고야 당신 자유지만 기도하는 것을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인은 혼자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불신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사실은 우리 집에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는 놈이 하나 있소.”

-그 불신자는 내심 반가웠다.
그놈이란 다름 아닌 대학에 다니는 그 집 아들 녀석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리스도인에게 물었다.
“그 집에도 제법 똑똑한 친구가 한 명 있구먼. 누구인가? 대학 다니는 자네 아들 녀석인가?”

-그리스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닐세, 우리 아들은 나보다 신앙이 더 좋다네. 내가 아까 말한 놈이란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돼지일세."

-하나님은 돼지한테 감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감사를 요구하신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병환자 열 명이 다 나았다.
당시 나병은 불치병이었다.
한 번 걸렸다하면 그렇게 살다 죽어야 했다.
그러나 병에 걸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건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잠시 격리되는 것이 아니다.
아예 버림받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어떤 보조를 받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의 면회가 허락되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운명으로 살아야 했다.
정말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지, 삶에 대한 애착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나병을 고쳤다.
예수님이 제사장한테 가라고 하니까 가고 있는데,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일이 생겨났다.
그 몹쓸 나병이 깨끗하게 고쳐진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 어떤 것으로 사례를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에게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돌아왔다.

-그걸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적어도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놀라셨을 것이다.
먼저는, 마땅히 돌아와야 할 유대인들이,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이다.

-열 사람이 다 예수님을 놀라게 하긴 했다.
그러나 놀라게 한 내용은 다르다.
유대인들은 부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다.
사마리아인은 긍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다.
우리 역시 유대인들처럼 부정적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사마리아인처럼 긍정적인인 면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유대인 아홉과 같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할 줄 안다면,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실지 모른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 때 여러분은 그 아홉에 속하지 않을 자신 있는가?
그 한 사람에게 속할 자신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신다.
감사를 기대하고 계신다.
감사를 표현하면서 살기 바란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억지로라도 받으실지 모른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일백 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들인가?
75세에 아들 약속을 받고, 무려 25년 만에 아들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감사한 흔적이 없다.
늦둥이 이삭한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때의 하나님의 심정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며 허탈해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 같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마 아브라함은 그 때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던 자신을 크게 뉘우쳤을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감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자.
감사는 남보다 앞서 하자.
감사는 남보다 후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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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서 감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욕심이 많으셔서, 자기 몫을 챙겨가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다.
감사하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다.
감사는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감사 그 자체가 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감사에 서툴다.
감사해도 넉넉하게 하지 못한다.
감사의 시늉만 내다가 만다.
하긴 감사의 시늉만 내도 아홉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그게 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못한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다.
감사는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억지로는 할 수 없다.
기쁨이 빠진 감사는 참된 감사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때로는 감사에 부담이 따르기도 한다.
부담 없는 감사는 어쩌면 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적선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주신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영예를 보존해주셨다.
분문 말씀은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졌다.
그 때마다 사마리아 사람은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불명예를 입었다.

-사마리아 사람이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높여주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의 귀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영예가 보존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께 높임받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감사도 크게 하기 바란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더니, 예수님이 그에게 구원을 선물로 사례하셨다.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인은 돌아와 감사하고 너무나 큰 것을 얻었다.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너무나 값진 구원의 선물을 얻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어떤 것도 아끼시지 않는 분이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시지 않았던 분이, 그 어떤 것을 아끼시겠는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당신의 속마음을 살짝 털어놓으셨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감동되시면 막 주신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감사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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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돼 있다’, ‘승무원도 불친절하다’는 등 불평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변호사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필 박사는 그렇게 불평을 하는 사람이 무엇을 제조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실례지만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십니까?”

-그러자 남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 아내는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제조업에 종사하는가?
불평 제조업인가? 감사 제조업인가?

-이번 추수감사주일을 통해,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감사를 다시 회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