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7: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마 10:16-3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460
마태복음 강해 27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마 10:16-33)
2016. 10. 30.


프롤로그

-제자는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다.
신자로 부르신 후, 훈련을 시켜서 제자를 삼으신 것이 아니다.
제자훈련이란 훈련을 시켜서 제자를 만든다는 의미보다, 제자를 훈련을 시킨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주님은 제자로 부르신 후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어도,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권능을 함부로 써도 안 되지만, 잘못 써도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부르신 자들을 다시 보내셨다.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이 아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셨다.
가서 전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도 주셨다.
그 외 전도여행 시 필요한 여러 가지 지침들을 주셨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했으며,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게 하셨다.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는 그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책임을 져야할 테니, 제자들은 복음 전하는 일만 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했을 때 꼭 거부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거부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거부 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주님 당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와 맞선 초대교회 때도 그랬고, 복음이 이방세계로 뻗어나갈 때도 그랬다.

-국교가 되어 교회가 국가의 비호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 때는 기독교 자체가 생명력이 약해졌다.
본래 평안하여 복음이 고여 있으면 부패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가끔 교회에 자극을 주어, 복음에 깨어 있게 만든다.
우리는 무사태평하면 서서히 신앙이 나태해진다.
기도를 해도 절박함이 묻어난 기도를 하지 않는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선택이다.

-가끔은 우리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은 두고 보신다.
그게 우리의 성장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보면, 성장통과 함께 성장한다.
성장통의 특징은 치료 없이 괜찮아 진다는 것이다.
성장통이 심하면 우는 아이들도 있지만, 병원에 가서 통증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시험 든 사람들을 보면 안 그렇다.
통증주사로는 효험도 없다.
원자력병원에 가서 항암주사를 맞아야 겨우 진정된다.
그것도 모자라서 상속시킨다.

-시험을 무엇으로 보라고? 성장통

“시험에 들려고 그래.”
“어, 좋지. 성장통인 거 같으니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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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특별한 말씀을 하셨다.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동시에 굴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 어떤 대상인가?
변화의 대상이다.

-굴복하는 것은 쉽다.
정복하는 것은 힘만 있으면 쉽다.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짧은 시간에 금방 일어날 수도 없다.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알아야 한다.
대상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전하는 뉴스만 들으면, 세상이 너무 무섭다.
요즘 뉴스를 들어도 욕이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즐길 것이 많은 흥미진진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 잔뜩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 대해 겁을 먹으면, 피하고 싶은 생각부터 든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세상에 대해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셨는가?
핵심이 지혜와 순결이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은 간교하면서도 신중한 동물이다.
위험에서도 곧잘 벗어난다.
다리도 없으면서 신속하게 빠져나간다.
애굽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자들이 가는 세상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제자들에게, 세상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때 뱀처럼 위험에서 잘 벗어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미리 가지 말라는 것이다.
너무 쉽게 순교할 생각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도 공생애를 사실 때, 자주 위험에 노출되셨다.
어떨 때는 함정에 빠져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하셨다.
그 때 주님은 지혜를 발휘하여 빠져나왔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순교하는 것만이 믿음은 아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나에게 맡겨진 영혼을 건지는 일에 힘써야 한다.
죽는 길도 있고 사는 길도 있다면, 살아야 한다.
죽는 것은 서둘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주님 앞에 설 준비는, 늘 하고 살아야 한다.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을 상징한다.
문제는 비둘기가 어리석어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순결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된다.
지혜로움이 순결함을 잃으면 교활함이 되는 것과 같다.

-랍비들의 가르침에 이런 표현이 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

-세상을 모르면 순결이라는 무기만 들고 나간다.
그러면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세상으로 향할 때는, 반드시 지혜와 순결로 무장해야 한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서도 그래야 하고,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그래야 한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선교사들의 지침이요, 전도자들의 지침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는 지침이다.

-17, 18절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 같았다.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시대와는 상관없는 말씀인 줄 알았다.
사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전도의 큰 장애물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장애요소가 있었다.
주로 조상 제사 문제였고, 집안 내 종교 갈등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예수 믿는다고, 공회에 넘기는 일은 없었다.
복음 전한다고 채찍질을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기독교의 차별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다양한 종교가 있고, 자기 종교의 차별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엄격히 금지된다.
노방전도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예배 중에 하는 설교도 문제 삼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예배 중 순사가 지키고 있는 것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나라에서는, 동성애자의 결혼에 주례서는 것을 거부했다고 목회자가 처벌받는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제일 좋아할 사람들이 동성애자들과 모슬렘일 듯하다.
동성간의 결혼이 합법화된다.
극단적으로 남자 며느리 볼 수 있고, 여자 사위 볼 수도 있다.

-또한 이슬람이 포교하는데, 양탄자를 깔아주는 것이다.
지난 20대에서는 이슬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진출하는 것을 겨우 막았지만, 21대에는 틀림없이 나올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기독당에 대해 거부감을 가져왔다.
그렇지 않아도 욕먹는데 기독당까지 나오면, 그 욕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엔 그 생각이 흔들리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이슬람을 대변할 국회의원이 한명이라도 국회에 진출한다면, 그 때부터 한국교회에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평안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예수 믿기에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좀 느슨한 신앙으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몇 십 년이 아니고, 불과 몇 년 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반쯤 잠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이지 깨어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물론 시대에 대해 걱정만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이런 시대에 사는 게 힘들다며, “빨리 데려가 주세요” 기도할 필요도 없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는가?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목장>이란 다음카페에, 이런 재미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단언컨대 지금 무슬림들이 저리 판을 치지만, 어디 유럽이나 우리나라가 이 세계가 이슬람화가 될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일루미나티의 신세계 질서 수립에 있어, 그 단일세계정부가 이슬람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할랄푸드 단지가 조성되네’, ‘국내 이슬람 인구가 20만명이네’ 어쩌고 하지만, 단언컨대 한국이 이슬람화가 될 일은 없습니다.
북한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존재하기에, 만약 북한의 침공으로 우리나라에 전화가 닥친다면, 그때는 이슬람 따위는 걱정거리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백 번 천 번을 접어줘도, 한국인으로서 치킨과 맥주, 삼겹살과 소주를 포기하고, 이슬람을 믿겠다는 인간이 과연 그렇게 많을까요?

-우리나라가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제사장국가로 쓰임 받기를 위해, 더 기도해야겠다.
그러려면 교회가 거룩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이번 우리교단 주제가 “다시 거룩한 교회로”이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다.
동성애나 이슬람 같은 외부 문제보다,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 더 급한 문제이다.

-교회의 거룩성 회복 없이는, 교회가 세상에 할 말을 못한다.
세상의 비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봐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전에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세상이 교회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전에는 교회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엔 교회가 세상을 감당하지 못한다.
교회가 다시 거룩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내 맘속으로만 믿으면 문제되지 않는다.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모슬렘 국가에서도 그렇다.
표현하지 않고 자기 속으로만 믿는데,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하면 제재를 받는다.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공동체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내 신앙의 표현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 드리지 않으면 가짜이다.
정규적인 예배 참석은 신앙의 확실한 표현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도이다.
시간을 정해놓고 할 수도 있고, 수시로 기도할 수도 있다.
모슬렘들은 대학교에서 수업 받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기도하러 나간다.
포항에도 모슬렘 기도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에는 모슬렘이면서도 외국인노동자선교하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자기들이 교회에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가 많아지면서 자체 힘이 생겼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따로 모인다는 것이다.

-기도는 내 신앙의 표현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어디 가서 밥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집에서 먹을 때는 숟가락 들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먹어도, 집 밖에 나가면 확실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또 있는데 전도다.
전도는 기도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이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내가 효과 본 약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내가 써본 화장품을 절친에게 소개하듯,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것이다.
다단계처럼 끌어드리는 것이 아닌, 그냥 소개하는 것이다.

-신앙을 표현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표현하면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미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미움이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견디되 끝까지 견뎌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끝까지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로 들린다.
하긴 쉽다면 견딜 필요가 있겠는가?

-김지선이 라디어 DJ상을 받고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생은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긴다.”
맞다. 인생은 실력 있는 자가 이기는 게 아니다.
학력이 뛰어난 자가 이기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긴다.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전에 교회를 다녔는데, 몇 년 전부터 다니지 않았어요. 천국에 갔을까요?
그럼 나는 대답 안 한다.
아니 못한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가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물어보는 유족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답은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경기가 있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의 마라톤경기이다.
이 경기는 일명 ‘도란도의 비극’으로 불리는데, 이탈리아 출신 도란도 피에트리 선수는 당시 스물 두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다른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가장 먼저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섰다.
이제 마지막 한 바퀴만 돌면 우승이었다.
관중들은 예비 우승자에게 일제히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내 경기장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승지점을 300야드(약 270m)를 앞둔 지점에서, 그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와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트랙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관중들은 흥분하여 ‘노(No)'를 외쳤고, 잠시 주춤하다가 주위를 살핀 도란도는 방향을 바꾸어 걷더니, 얼마 못 가서 허물어지듯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당시의 상황을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전했다.
“그는 경주로를 따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발을 놀렸다. 그의 발걸음은 걷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허우적댈 뿐이었다.”

-도란도는 99.4%를 1등으로 달렸다.
0.6% 남겨놓고 쓰러짐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201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치러진 유럽육상선수권 남자 3000m 장애물 결승에서는, 더 기막힌 일이 있었다.
대회 3연패가 유력했던 마히딘 멕히시 베나바드(29)는, 1등으로 결승선 통과를 얼마 남지 않지 않은 지점에서 셔츠를 벗어 입에 문 채, 상반신 알몸으로 관객들에게 박수를 요구하면서, 8분 25초 30의 기록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베나바드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경기 규칙 제 143조8항에서 ''넘버카드는 어떤 방식으로든 안보이게 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위반했다.
세계선수권에서 2차례 동메달을 받았던 베나바드는 당초 경고만 받았지만, 스페인 대표단이 이의를 제기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베나바다의 금메달은 박탈되고, 2위 이하 선수의 순위가 각각 하나씩 올라갔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강조했다.
그런 바울을 통해 한 말이 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긴장 풀지 말라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고 끝까지 버텨내라는 것이다.

-어떻게 끝까지 견딜 수 있는가?

-주의 재림을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주님이 얼마 있지 않으면 오신다는 믿음이,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이다.
사실 박해를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언제 박해가 끝날지,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주의 재림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살던 동네에서 피해 다른 동네로 갔다가 배우자가 죽을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자녀가 죽을 수 있다.
보통 믿음으로는 끝까지 견딜 수 없다.

-미움 받는 게 정상이라고 여길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예수님이 선생인데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면, 자신들은 제자로서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자는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이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는데,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호강을 누리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라면서 그러고 싶어 한다.
주를 위한 고난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고, 어떻게 하면 예수 덕 좀 볼까 생각한다.
예수님한테 덕 보려고 믿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본다...?
그러면 미련없이 돌아선다.
그게 예수님 당시 무리들 얘기가 아니다.
우리 주위에도 믿음 생활 하다가,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제자에게 고난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고난이 없다면 끝까지 견디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끝이 있다고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끝없는 고난이 무서운 것이다.
힘들어도 끝이 보이면 견딜 수 있다.
그 끝에는 감추인 것이 드러난다.
숨어서 행했던 것도 다 알려진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날에는 감춰서 행했던 선행이 드러난다.
남 몰래 숨어서 봉사하고 헌신했던 일들이 알려진다.
문제는 그 때까지 입에 파수꾼 잘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의미의 유대 격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면, 그거로 된 거 아닌가?
꼭 사람들이 봐줘야 하고, 꼭 교인들이 알아줘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할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다.
실제로 사람보다 두려운 존재가 없다.
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의 무엇으로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가?

-그러나 목숨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의 몸은 가뒀어도 영혼을 가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했다.
사람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의 핍박과 환경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 두려워할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하나님께 생사를 맡길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참새는 가장 값싼 존재를 가리킨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교회 십자가 종탑에 까치집이 있어, 매년 제거해줘야 한다.
관리국장 집사님한테 “올해는 까치집 제거 안 해요” 물었더니, “작년 이 맘 때에 알이 있었다며, 좀 있다가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 말에 감동이 되더라.
그게 하나님의 마음인 것 같아서였다.

-참새도 괜히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하물며 우리는 예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이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주목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우리 생명을 맡겨도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죽고 사는 것을 내가 책임질 수 없다.
생사를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끝까지 견딜 수 있다.

-최후 심판을 믿을 때 끝까지 견딜 수 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제자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게 별건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시인하는 것이다.
누가 신앙을 맘속으로만 믿으면 된다고 했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라고 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때,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 시인하는 것 없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타종교인 중에도 착하게 사는 사람 얼마든지 있다.
제자는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 증인으로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안다” “모른다” 하실 때가 온다.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 하면, 그 땐 돌이킬 수 없다.

-예수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자.
예수 제자로 세상 끝 날까지 달려가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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