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3: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습니다.(마 9:9-1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754
마태복음 강해 23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습니다.(마 9:9-17)
2016. 10. 2.


프롤로그

-2010년 2월 노컷뉴스 인터넷판에 이런 기사가 났다.

-영국 매체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은, 영국 주간지 <파머스 위클리>가 요크셔 지역의 농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안나 심슨(25)을, 영국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 농부에 선정했다고 전했다.
수백명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1위에 뽑힌 심슨은, 8등신 몸매에 인형과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20대 여성으로, 윈디힐 농장에서 트랙터를 직접 몰기도 하고, 양치기 개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심슨은 250파운드(약 45만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상금보다 멋진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에, 더 만족해 했다.
심슨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60대 남성을 전형적인 농부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여성도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농부는 나이가 많은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다.


-2010년 2월 아시아경제신문 인터넷판에 이런 기사가 났다.

-미국 텍사스주의 한 상점 주인이, 권총강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모든 장면은 상점 안의 폐쇄회로 감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텍사스 주 프리스코에 있는 마리안 채드윅의 수공예 용품 매장 안으로, 권총강도가 들어와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채드윅은 강도의 뒤편을 가리키며, “예수의 이름으로 이르노니 가게에서 썩 꺼져”라고 명했다.
채드윅은 “성령의 힘으로 널 묶어버릴 거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강도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도망가는 게 아닌가.
영국 일간 메트로에 따르면, 사건 이후 채드윅은 “당시 가게 안에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강도는, 권총이나 다른 어떤 기구를 사용하여 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다.


-하와이는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더운 섬이다.
그 하와이 한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했다.
밍크코트를 파는 가게를 열겠다고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온 세계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데, 그 중에는 틀림없이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도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여름에 겨울옷을 준비하고, 겨울에 여름옷을 장만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윽고 그 밍크코트 가게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고정관념을 깨뜨려, 사업에 성공한 이야기다.


-미국에 있는 UCLA대학에 의대교수가, 이제 머잖아 의학공부를 마치고 현장에 나가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있고, 어머니는 폐결핵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역시 부모님의 병으로 인해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니는 결핵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환자이며, 이미 낳은 네 아이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유산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는 잠시 학생들을 주시하더니,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베토벤은 그런 환경에서 177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독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환자요, 형들도 다 그 모양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을 했고,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간곡한 어투로 권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고 신중하게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란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신장이 165cm인 호세 알투베라는 야구 선수가 있다.
키가 작은 그를 받아주는 팀이 없어, 돈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선수로만 받아 달라는 읍소로, 휴스턴 애스트로스 팀에 우리 돈 1600만원에 계약을 했다.
수십억 수백억으로 계약하는 다른 선수에 비하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액수였다.

-그러나 알투베의 현재 성적은 아메리카리그 타격 1위, 안타 1위, 도루 3위를 달리고 있고, 홈런도 24개나 치고 있다.
2011년 데뷔한 그는 2014년에 타격왕과 안타왕에 올랐고, 2015년은 홈런 15개를 쳤으며, 올해는 현재 24개를 쳐서 점점 발전하는 성적을 내고 있다.
모두가 알투베는 키가 작아 안 된다고 했지만,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남들보다 두 세배 더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1600만원에 프로 첫 계약을 했지만, 2014년에 4년 총액 140억원에 계약하는 인간 승리를 이루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데릭지터나 알렉스 로드리게스 같은 키 큰 선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라운드에 서면 모두가 평등하다. 키가 크거나 작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구를 하기에 나는 충분히 크다."

-다른 스포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만, 야구에 있어서도 키가 큰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깬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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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세례와 시험을 통과한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첫 번째로 하신 일이 제자를 부르시는 거였다.
주님이 이 땅에서 짤막한 생을 사셨다.
공생애만 놓고 보면 3년 남짓 사신 것이다.
그 때 주님이 그 어떤 사역보다 가장 애착을 가지고 집중했던 사역이, 바로 제자 양육과 훈련이었다.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제자 양육과 훈련처럼 보였다.

-사실 랍비에게 제자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자기 삶과 사상을 계승해주는 제자가 없다면, 랍비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어떻게든지 좋은 제자를 얻으려고 힘썼다.

-십 수 년의 제자훈련을 하고 내린 내 결론은 이렇다.
본바탕이 좋아야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격이 안 되고,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제자 훈련을 많이 받아도 좋은 제자가 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본래 제자는 모집이 아니다.
지명하여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편애 논란이 일어난다.
안 받으려고 해서 권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본인이 받겠다고 하면 막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예수님도 제자를 모집하지 않았다.
자기를 따르겠다는 하는 사람을, 다 받아주지도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여기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라는 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불러, 자기 제자로 삼으셨다.

-주님은 첫 번째로 부른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이다.
한 때 어부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현역 어부였다.
베드로 안드레 형제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 요한 형제는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당시 어부들이 배웠다고 한들, 뭐 얼마나 배웠겠는가?
초등학문을 배운 게 다였을 것이다.

-물론 주님도 정규 율법 교육을 받은 랍비는 아니다.
그렇다고 제자를 초등학문을 배운 게 전부인 사람을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서기관이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한 적이 있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 같으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학물은 먹은 사람이다.
서기관을 제자로 두면, 랍비로서 급이 올라갈 수 있다.
스승을 보고 제자를 판단할 수 있고, 제자를 통해 스승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서기관이 제자로 있으면, 주님을 쉽게 보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런데 자기를 따르겠다는 서기관의 요청을, 주님은 우회적으로 거부하셨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첫 번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통해, 서기관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주님이 또 한 명의 제자를 부르셨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였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였다.
한 때 세리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세리 출신이 아닌, 현역 세리였던 것이다.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않는가?
세리에 비하면 어부는 양호한 편이다.
아마 제자로서 부적격자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세리는 상위 1, 2번을 다툴 것이다.

-세상의 어떤 랍비도, 자기 제자로 세리만은 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리를 제자로 삼는 순간, 랍비로서 급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의 선택은 세리 마태였다.
일정한 수입도 없는 주님이, 세금 문제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당시 세리의 사회의 지위는, 창기와 같은 급이었다.
마태가 전직 세리였어도, 랍비로서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세리였다가, 지금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가면 누구나 마태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본다.

-그런데 주님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
그냥 따라다니는 제자가 아닌, 70인 제자가 아닌, 열두 제자로 부르셨다.
제자의 기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것이다.
그리고 세리 마태를 부르신 주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마태는 제자로서 누구보다 훌륭했다.
베드로처럼 수제자는 아니었다.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핵심 제자는 아니었다.
도마처럼 눈에 띄는 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조용했지만 묵묵히 주를 따르는 제자였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은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복음서를 직접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누구보다 큰일을 한 것이다.

-더구나 그가 세리였기에, 세리나 세리 출신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데 기여했다.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심에 너무 감사했다.
마태는 누구에게도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이 어느 날 자기를 찾아오셨다.
세관에 앉아 있던 자기를 향해 따뜻한 손을 내미셨다.

그 아무도 내게 마음 주지 않을 때에나의 마음 모두 이해하신 주님그 아무도 나의 눈물 모를 때나의 눈물 닦아 주신 나의 예수님

-마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같은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아준, 예수님이 눈물겹게 감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다.
그렇게 맘을 먹었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또 괜히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잠시 고민이 됐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단 말씀이나 드려보자 하고, 자신의 의향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 좋지...금강산도 식후경 아닌가....ㅎㅎ”
-마태는 잠시 고민했던 것을 후회하며, 얼굴이 환해졌다.
“주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런 마태를 보고, 예수님도 기분이 좋으셨다.
“에이, 고맙기는...내가 고맙지...어서 앞서게나...”

-마태는 이 기쁜 소식을 자기 친구들에게 전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했으니, 다들 오라고 했다.
마태가 방금 전까지 세리였기에, 돈을 많이 들여 식사를 잘 준비했다.
친구들까지 초청할 생각이었던지라, 거의 잔치 수준이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세리들도 있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간에도 계속 왔다.
마태는 천하를 다 얻은 듯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예수님 일행을 기쁨으로 섬겼다.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좋은 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계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잔뜩 품었다.
자기들 눈에 예수님은 정상적인 랍비가 아니었다.
자기들의 가르침과는 티 나게 달랐다.
그대로 뒀다가는, 자칫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예전에 정보기관을 통해 야당 인사를 감시하듯, 예루살렘에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감시하게 했다.

-예수님이 다른 곳도 아닌 세리 집으로 가셨는데, 그곳까지 따라왔다.
바리새인으로 세리 집 안에는 못 들어오고, 제자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물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랍비가 돼 가지고, 세리 집에서 밥이나 얻어먹느냐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자들이다.
자칭이 아닌 실제로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다.
율법에서 말한 부정한 것 안 먹고, 부정한 사람을 안 만난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은, 세리의 식사 초대에 응하여 맛있게 먹으며, 그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불러 따지고 싶지만, 세리들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없으니,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따진 것이다.
제자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제자들은 바리새인들 앞에 서면 기죽는다.
자기들은 예수님이 하자는 대로 한 것밖에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해도,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다.

-성경은 훗날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렇게 권한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면, 자신 있을 거 아닌가?
그럴 때 주의해야 하는데,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계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한 마디 하셨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분명히 세리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들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에 들린 모든 말에 대꾸하시지 않지만,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참 명언이시다.
얼마나 시의적절한 말씀인지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흠칫 놀라서 예수님을 쳐다봤다.

-자기를 쳐다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한 마디 더하셨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의 앞부분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는 말씀의 뒷부분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게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쳤겠는가?
메시야가 의인을 부르러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메시야가 오면 죄인은 어떻게 되는가?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을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왔다면, 세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
그럼 바리새인들과 어울려야 하는가?
아니면 사두개인들과 어울려야 하는가?
대제사장들과 어울려야 하는가?
어울릴 사람이 없다.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엔 자신들이 세리들에 비해 의인이라고 여겼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의인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음인가?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 못마땅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굳어버린 생각이다.
경직된 사고이다.
틀에 박힌 공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가 아는 것이 지식이고 진리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정관념이 강해진다.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고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배움을 중단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죽어가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다.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않으면, 말씀을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다.
은혜는 받는다.
그런데 말씀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은혜를 받는다.
고정관념이라는 체로 걸러서, 자기 맘에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리새인의 이야기면 좋겠다.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면 좋겠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얘기일 수 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흔치 않는 일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을 거 같다.
세례 요한이 남도 아니었고, 요한의 제자 중에 자신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고 하니 말이다.

-그들이 찾아와 금식에 대한 문의를 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에 대한 문의를 했다기보다 논쟁을 건 듯 하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 좋은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신앙에 있어 금식은 은혜에 이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님도 40일 금식하신 적이 있다.
주님이 금식 자체를 못하게 한 적이 없다.

-주님이 금식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은 태도에 대해서였다.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머리도 안 감고,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금식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금식도 안 하냐고 따져 묻고 있다.
얼마 전 세리 마태의 집에서 포식한 것을 빗대서 하는 말 같기도 하다.

-고정관념은 절대가치와 상대가치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다.
금식은 절대가치인가 상대가치인가?
금식 안 한다고 예수님 안 믿는 건가?
금식 많이 한다고 예수님 잘 믿는 건가?
아니다. 전혀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금식은 상대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럼 절대가치는 무엇인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그걸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금식도 때가 있다.
금식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금식 날짜도 잘 잡아야 한다.
다른 사람 생각도 할 필요가 있다.

-내가 목사가 되고 일 년에 한 번 일주일씩 금식을 하곤 했다.
어느 해인가 사정이 있어서, 금식기도원에 못 가고 집에서 한 적이 있다.
금식하는 당사자인 나는 괜찮았다.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들 밥도 챙겨주고 그랬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내 자신의 경건만 생각하고, 가족의 불편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상승곡선을 탈 때도 있고, 하향곡선을 탈 때도 있다.
상승곡선을 탈 때는 은혜를 누리면 된다.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다.
하향곡선을 탈 때는 발버둥을 쳐야 한다.
금식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발버둥이다.
하향곡선을 탈 때는 예수님이 부재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식이 만능은 아니다.
금식은 상대가치이지 절대가치가 아니다.
금식하는 것으로, 신앙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는 금식하는 데 당신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기가 막힌 비유를 드셨다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고정관념은 낡은 옷 같은 것이다.
고정관념은 낡은 가죽 부대 같은 것이다.
낡은 옷에 생베 조각 대어 붙이면 다 못쓴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포도주를 넣으면 다 못쓴다.
낡은 옷은 버려야 한다.
낡은 가죽 부대는 버려야 한다.

-낡은 옷 같은 고정관념을 보물처럼 지키고 있지 않는가?
낡은 가죽 부대 같은 고정관념을 보화처럼 붙들고 있지 않는가?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