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헌신예배:선교사로 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마 20:18-2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12-01 13:27
조회
2088
선교헌신예배
선교사로 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마 20:18-20)
2019. 12. 1.
 
 
프롤로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2살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그의 아버지는 화학기사였다.
↳그의 부모는 경견한 사람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가족은 뉴저지주의 어퍼 더함이란 마을에 정착을 했고 그는 그곳에서 신앙을 가져 개혁교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곧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하스브룩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에 진학했으며 그곳을 마친 후 '뉴 브룬스위크 신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였다.

-그는 개혁교회의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뉴저지주의 폼프톤에 있는 작은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다.
↳그의 교회는 부흥되고 선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교회의 장로들이 그에게 선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돈을 기부하도록 충동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만약 그가 계속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은 더 이상 봉급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언더우드 목사의 개성적인 대답은 이러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봉급 없이 그와 같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이 지나간 후, 그 교회는 선교헌금이 4배로 급증했고, 목회자 사례비도 2배로 올랐다.

-언더우드 목사는 인도로 갈 계획이었다.
↳그래서 부수적 준비로써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뉴욕의 대학교회는 그가 공부하는 동안에 그들의 목사로 모시고 매주 한 번의 설교와 한 번의 기도회만을 인도하고 1년에 1,500달러를 지불했다.

-바로 그때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조선의 부름은 그에게 지상명령으로 다가왔다.
↳그는 즉각 조선으로 임지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화란 개혁교회는 조선에 새로운 선교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1884년 북장로교 선교부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항에 우리나라 선교의 첫 발을 떼었다.

-조선을 위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이 남아 있다.
↳이 기도문을 통해 당시 조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들어올 때만 해도 조선은 동양의 숨겨진 작은 나라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그 어떤 나라와도 통상을 맺지 않고 혼자만의 고립가운데 갇혀있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나라였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열강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지독히도 가난한 상황 속에서 수구파와 개화파 등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싸움의 위기가운데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일제 35년간의 식민지배와 6.25 한국 전쟁으로 잿더미에 있던 나라,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런 우리나라가 지금은 세계에서 경제규모가 12위이고, OECD회원국이 되었고, 개발도상국의 모델 국가가 되었다.
↳이건 기적이다.

-짧은 선교역사에서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 50개의 대형교회 중 20개 이상이 한국에 있다.
↳지금은 감소 추세에 있지만, 그래도 인구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이른다.
↳이건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특이한 경우다.

-언더우드는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우리나라 선교사로 와서 사역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고, 1916년 4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해 10월 12일 만 57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소천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는 세 마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하나님의 사자, 그리스도의 제자, 한국인의 친구.”



-선교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선교는 주님께서 교회와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이 땅에서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필연코 해야 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배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예배드리는 게 일순위가 아니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선교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비록 우리 모두가 선교사로 나가지 못할망정, 선교 현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뒤에서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함으로 선교에 참여할 수는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파송한 선교사나 후원하는 선교사의 사역지로 단기선교를 가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해 보는 것이다.

세계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대략 한 5만 여명이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오직 일선에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는 2만 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세에서 이단이라고 일컬음 받고 있는 몰몬교는 전 세계에서 직접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가 5만 여명이라고 한다.
그것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고 유능한 자들의 자원봉사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하니 가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렇게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2-3년 전하고 와야 정직 멤버십을 가진다고 하니 선교가 교인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교회는 작은 교회이다.
우리나라에 약 5만개 교회가 있는데 그 중 100명 미만의 교회가 85%이다.
우리는 85%에 속하는 교회이다.
우리교회가 합병하여 한꿈교회로 새출발하기 전에는, 노회로부터 지원받는 교회였다.
그런 우리교회가 지금은... 선교사 2가정을 파송하고, 선교사 3가정을 후원하고 있다.

파송 선교사인 김영석 목사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평신도 파송선교사인 박경원 집사는 태국 푸켓에서 비즈니스 선교사로 사역을 하고 있다.

후원하는 김온유 선교사는 말레이시아에서, 다니엘 선교사는 아제르바이잔에서, 금상호 선교사는 코스타리카에서 각각 사역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교회는 지금도 85%에 속한 교회 중 상위권에 속하는 교회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배고픈 수준이다.



오늘 설교는 이쯤 마무리하고 이어서 더쉐어 현승원 대표의 영상을 보겠다.
올해 11월 19일 오륜교회에서 실시하는 다니엘기도회 강사였다.
사실상 현승원 대표가 오늘 선교헌신예배의 강사인 셈이다.
특히 젊은 교우들이 도전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