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8: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마 14:1-12)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2-26 00:00
조회
1193
마태복음 강해 38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마 14:1-12)2017. 2. 26. 프롤로그

-어떤 사람이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며 네이버 지식iN에 이런 글을 올렸다.
작년 이맘때쯤 오해로 인해 아버지께 심하게 해선 안 될 정도의 욕을 해버렸어요...
한 일주일후에 오해도 풀리고 잘 넘어갔지만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버지께 너무 죄송해서 진짜 죽고 싶어요...
자기 자식한테 그렇게 심한 욕을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진짜 지금 그일 때문에 잠도 못자고 죄책감에 너무 힘듭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너무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쿨~하게 답했다.
부모자식 간에 영구장애나 살인까지 일어나는 세상인데요.
이 정도가 아니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정도의 자책감이예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감정을 억눌러 와서 그랬을 테니 너무 착한남자 콤플렉스에 빠지지 마세요.

-이런 대답도 있었다.
절하세요.
나를 완전히 땅바닥에 낮춰보세요.
직접 아버님 앞에서 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자기 방안에서 아버지의 작은 사진하나 책상에 올리고
열심히 절하세요.
몸을 낮추면서 마음이 낮아질 겁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울면서 절해보세요.
늦은 밤에 하셔도 좋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셔도 좋습니다.
후회할 일을 안 하고 사는 게 아니라, 후회할 일을 하고 나서 다시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배움이 있을 겁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크게 뭉클함을 드릴 수 있는 반전을 만들어주는 작은 사건이었다고 의미를 다시 정하세요.
울만큼 울면, 내가 달라질 겁니다.
굳건한 결심으로 삶을 확 뒤집으시면, 아버지는 더욱 기뻐하실 겁니다.

-또한 이런 대답도 있었다.
아버지가 기분이 몹시 상하셨을 거 아실 겁니다.
그에 의해 죄책감도 더욱 더 커지겠지요.
그래도 오해는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아버지께 진심으로 사과 한 번 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잘못했다고, 미안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해보세요.
아버지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건...
자기 자식에게 욕을 들었다는 것보다는 아마 자식이 그 고통에서 헤어 나왔을지 그것이 더 마음에 걸릴 것입니다.
자신이 심정이 어떤지 말하고,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한지 물어보고, 사과를 하세요.
아버지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죄책감에 대한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큰 문제를 만났는데 지금은 답이 없을 때 하는 말이 있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거 같다.”

-그런데 이 죄책감이란 놈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있다.
도대체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 없이 살다보면 잠시 잊혀진다.
그러다 혼자 잠시 시간이 나면 불현 듯 떠오른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죽는 거 외에는 다른 답이 없는 거 같다.
밤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
몸이 피곤하면 잠이 올까 싶어 몸을 피곤하게 해본다.
그럼 분명히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밤에 잠을 못 이루면 사람이 바짝 마른다.
눈에 핏발이 서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이렇게 무서운 게 죄책감이다.

-죄책감이 무엇인가?
죄책감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

-죄책감은 책임감에서 나온다.
따라서 무책임한 사람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도,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를 하며 적당히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 사람과 엮이게 되면 인생 힘들어진다.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혔던 반 아무개씨가 중간에 레이스를 포기했었다.
그 분의 사퇴의 변을 듣고, 처음부터 뛰어들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포기한 게 천만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사퇴 회견문 어디에서도, 자기 책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이라도 자기가 부족하고 부덕했노라고, 자기가 준비가 부족하여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노라 정도는 해야지, 남의 탓만 늘어놓는 것을 보고, 참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죄책감이란 잘못이나 과오나 범죄나 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갖게 되는 빚졌다는 느낌이다.
죄책감은 우리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닫게 될 때나, 그 밖에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표준에 달하지 못하였을 때 생기게 된다.

-죄책감은 감정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잘못이나 과오에도 심한 죄책감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대수롭지 않게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의 정도가 심해 자학이나 자해까지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거 같아서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빚졌다는 감정에 붙들리면, 자기도 모르게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죄책감의 핵심에는 일종의 불안이 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이런 못된 짓을 했으니 나한테도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그렇게 불안해 하다가 일이 터지고 나면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며 차라리 마음 편해한다.

-죄책감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죄책감은 필요하고 또한 유익할 수 있다.

-죄책감은 받아들여질 만한 표준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표시가 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죄책감은 우리의 양심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 정신 의학 협회에서 발행한 한 책에서는, 죄책감을 못 느끼는 사람을 사회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할 소지가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양심이 더럽혀졌거나 마비된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의 차이를 분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데, 그러한 상태는 위험할 수 있다.

-또한 죄책감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체의 통증이 우리로 하여금 건강에 유의하게 한다.

-나 같이 통풍이 있는 사람은 음식을 가려먹어야 한다.
그럼에도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는 삼가야 할 음식이 보통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몇 점 먹으면 몇 시간 있지 않아서 신호가 온다.
그럼 바로 후회한다.

-마찬가지로 죄책감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신호등 역할을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주의하게 된다.

-또한 죄책감은 결국 죄를 고백하게 하고, 죄를 지은 자신과 피해를 입은 타인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죄책감은 이겨야 대상이 아니다.
죄책감은 떨쳐버려야 할 대상도 아니다.
죄책감은 정상적인 것이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이 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죄를 지었는데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했다.

-설교 도입부에서 <오해로 자기 아버지에게 심한 욕을 하여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아들 이야기>를 했었다.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을 하자.
그는 먼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럼 하나님께 죄책감이 든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까지,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이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 된다.
기도를 해도 응답의 확신이 없다.
교인들을 만나도 성도의 교제가 안 된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 회개의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당사자인 아버지가 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아버지께 대한 죄책감이 든다.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칠 수 없어 피해 다닌다.
그런 상황을 더 이상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했다.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 잘못 했습니다”며 용서를 구했다.
아버지는 애써 태연한척 했지만 입술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 지난 일이다. 나도 속앓이를 했지만, 너도 그 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을 게다. 우리 사내답게 털어버리자구나...”
아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 얼굴을 응시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재발 방지 약속을 한 셈이다.
“그래, 나가봐라...”
“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돌아서서 나오는데, 그 동안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렸다.

-여기까지 가야 회개가 끝난 것이다.
이제 후로는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이처럼 온전한 회개를 했는데도 죄책감이 든다면 악한 영의 역사이다.
우리에게서 주님이 주신 평안을 빼앗아가고자 하는 마귀의 속임수이다.
마귀는 우리가 주님의 평안을 누리고 사는 것을 눈 뜨고 못 본다.

-같은 죄책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드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자면, 죄를 범한 후에 드는 죄책감은 성령의 역사지만, 회개한 후에 드는 죄책감은 악한 영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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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소문은 퍼지고 퍼져 헤롯에게까지 들렸다.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물론 예수 이름은 오래전에 들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봐도 좁은 땅 덩어리인데 예수님의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줄 알았는데 갈수록 사역에 능력이 나타났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망 그 자체였다.
지금은 맹인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눈을 뜰 수 있다.
지금은 다리가 마비되어 걷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걸어다닐 수 있다.
지금은 나병환자로 죽지못해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청각 장애로 듣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들을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어디 있는가?
거기다 예수님을 만나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
그 동안 복음에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자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었다.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분봉 왕 헤롯이었다.
누구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갖는데 누구는 절망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예수님의 소문에 대해 보인 반응만 그럴 거 같지 않다.
예배 때 말씀 앞에서의 반응도 유사하다.

-똑같은 목사의 설교다.
그런데 어떤 날은 은혜가 있고 어떤 날은 그렇지 않다.
물론 목사가 설교 준비를 더하고 덜할 수 있다.
강해설교인 경우에는 설교 본문에 따라 내용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은혜 받고 그렇지 않고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말씀을 대하는 청중의 상황과 태도이다.

-배가 부른데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있겠나?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게 없다.
은혜도 아쉬워야 구한다.
어려운 게 없으면 은혜에 대한 절실함이 없다.
은혜에 대한 갈급함, 목마름, 절실함의 태도가 있으면 누가 설교를 해도 은혜가 된다.

-은혜를 받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다.
죄책감이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떠올린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그가 분봉 왕이라고 인생의 문제가 없었겠는가?
모든 인생에 찾아오는 문제가 한 나라의 1/4을 다스리는 분봉 왕이라고 피해가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그가 권력자이기에 문제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예수님은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는 방어막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그게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럴수록 죄책감은 크게 다가왔다.

-자신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내한테도 말하기가 그렇다.
“왕이나 된 사람이 그런 사소한 일에 붙들려 있으면 되냐”고 핀잔 들을까봐서다.
“여자도 아니고 사내 대장부가 그렇게 마음이 담대하지 못해서 되겠냐”고 한 소리 들을까봐서다.

-그는 죄책감으로 끙끙 앓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이 자기 귀에 점점 크게 들려오니, 꼭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온 것만 같았다.
언제 자기한테 들이닥쳐 목에 칼을 겨누며, 이렇게 나올지 모른다.
“전에 당신이 내 목을 쳤으니 이젠 내가 당신 목을 칠 차례다.”
불안해서 혼자 있을 수 없을 지경이다.
불안해서 침대에 누울 때도 불을 끌 수 없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가까이 들려올수록, 자기 목이 점점 죄어오는 것 같았다.

-헤롯은 지난 일을 복기해 봤다.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에게는 빌립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친동생은 아니고 이복 동생이었다.
빌립의 아내는 헤로디아였다.
그런데 헤롯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불법적인 재혼을 했다.
물론 헤롯도 당시 아내가 있었다.
사바티안 왕인 아레타스의 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헤롯, 헤로디아, 이 두 기혼자끼리 눈이 맞았다.
그래서 헤롯은 자기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는 자기 남편을 버리고, 불륜행각을 벌이다 재혼까지 했다.

-그 때 세례 요한이 쓴소리를 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헤롯의 성격을 아는지라, 없을 때 뒷담화는 해도 앞에서는 조용했다.
바닥 민심도 좋지 않았다.
백성들이 때로는 촛불을 들어 자기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무 소리 안 할 때가 많다.
아무 소리 안한다고, 자기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소리 질러 항거하지 않는다고,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만 그걸 모른다.

-헤롯의 불법적인 재혼 앞에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그걸 세례 요한이 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 뒤에 숨어서 뒷담화하지 않았다.
궁으로 헤롯을 찾아갔다.
지인들한테 알렸으면 뜯어 말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청한 후, 헤롯에게 담대히 나아갔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세례 요한은 그 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세례 요한의 이 장면에서 루터가 오버랩 된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로마 가톨릭은 루터를 신부에서 파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5세를 압박했다.
루터를 정죄하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회, 제국, 양쪽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1521년 4월 루터는 제국의회가 열리는 보름스로 소환됐을 때 친구들은 가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 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저들이 체고의 얀 후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보름스의 저 지붕위의 기와만큼이나 마귀가 많다 해도 나는 가겠소.”

-그가 드디어 황제 앞에 섰다.
종교개혁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와 제후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종교개혁은 내가 고안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사주를 받아 일으킨 것도 아니며 성경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교황이나 공회들도 반복적으로 실수를 범하며 자가당착에 빠진 것을 내 자신이 목도하였으므로 나는 교황이나 공회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거룩한 성경 기록에 의해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경 기록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에 의해 내 자신이 확신을 갖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고백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안전하지도 합당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이런 기도를 했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황제 카를 5세는 5월 8일 보름스 칙령에 서명하고 25일 공포했다.
칙서는 루터의 법익(法益)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그의 저서를 전파하는 자들도 처벌하는 내용이었으며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 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밀하게 숨겨주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양심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 행동하는 양심으로 사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결코 쉽지 않음을 말해준다.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둬뒀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그래서 죽이려고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번번이 집행까지는 못했다.
백성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헤롯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세례 요한도 아닌 백성들이었다.
그 시대도 왕이 백성을 두려워했다.
그럼 오늘날도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헤롯의 고민은 적잖이 깊어만 간다.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그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가 생각지도 않게 찾아왔다.
헤롯 입장에서는 최고의 생일선물을 받은 셈이다.
분봉 왕이니 생일축하파티를 크게 열었다.
술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귀여운 애가 들어와 춤을 췄다.
헤로디아의 딸이란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애는 헤롯의 딸이 아니고 헤로디아가 데려온 딸이다.
그런데 그 애가 너무 춤을 잘춰서 헤롯을 포함하여 모든 하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헤로디아가 뒤에서 꾸민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 대한 부담감은 헤롯보다 헤로디아에게 더 심했을 것이다.

-헤로디아의 작전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헤롯의 맹세하기 좋아하는 성향을 잘 이용했던 까닭이다.
헤로디아의 예상대로 헤롯은 맹세를 했다.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그 애는 헤롯에게 다짐을 받은 후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애기했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그 애는 섬뜩한 요구를 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헤롯은 근심이 됐다.
‘아 참, 이 입이 방정이지....’
그는 괜히 자기 입만 탓했다.
그는 자기가 한 맹세에 발목이 잡혔다.
자기와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맹세를 물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주라”고 했다.
그 애는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자기 엄마인 헤로디아에게로 가져갔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선지자 세례 요한은 순교를 하게 됐다.
그의 석방을 바랐던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목이 날아간 시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제자들은 울며 스승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께 알렸다.

-이제 헤로디아는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헤롯은 아니었다.
차라리 부담스러웠던 게 나았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끝 모를 죄책감에 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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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기억에서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죄책감은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환경이 주어지면, 그게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럼 죄책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
평생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치료받아야 한다.
그리고 죄책감의 치료에는 과정이 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마음속으로야 인정을 했으니까 죄책감이 들었다.
상대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도 그 방법 밖에 없다.
사소한 잘못은 대면하지 않아도 문자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큰 잘못은 직접 대면하여 용서를 구해야 한다.

-다음은 감정표현을 해야 한다.
당시의 감정을 서로 털어놓는 게 좋다.
감정 표현에 눈물만큼 좋은 것은 없다.
감정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안 되지만 눈물로 씻긴다.
감정의 정화작용이 일어나면 거의 치유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아무리 얘기가 잘 됐어도 계약서에 사인을 받지 않으면 마무리 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용서를 받는 것은 사인 받는 것과 같다.
이게 죄책감의 치료의 완성이다.

-마귀는 우리가 죄책감에서 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우리의 기억을 통해 공격해 올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깨어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