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3:요나의 표적이 전부입니다(마 12:38-4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1-22 00:00
조회
1472
마태복음 강해 33요나의 표적이 전부입니다(마 12:38-45)2017. 1. 22. 프롤로그

-살면서 자기를 증명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증명서를 지니고 다닌다.
갑작스럽게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데 없으면 곤란을 겪는다.
증명서를 줄여서 증이라고 한다.
크게 신분증이 있고 자격증이 있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이 신분증이라면 운전면허증은 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운전면허증은 워낙 보편화되어 신분증 대용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자격증이다.

-운전을 할 때는 운전면허증을 소지해야 하는 게 법이다.
도로교통법 제8장 운전면허 제92조(운전면허증 휴대 및 제시 등의 의무)
① 자동차 등을 운전할 때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운전면허증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물론 요즘은 깜박 집에 놓고 왔어도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하면 경찰관의 휴대기기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법적으로만 보면 위법이다.
보여달라고 할 때 바로 꺼내 보여주면 되는데 그럴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교통량이 많은 복잡한 시간대라면 민폐도 끼친다.

-국내에서는 신분증을 분실해도 큰 문제가 없다.
대체할 수 있는 증명서가 있고, 워낙 정보기기가 발달하여 신분을 확인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서 여권을 분실하면 그 절차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여권은 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외 나가면 가이드가 “여보 잘 챙기셨어요” 한다.
여기서 “여보”란 여권과 보따리를 말한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먼저 현지 경찰서를 찾아서 분실증명서(또는 폴리스 레포트)를 받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가서 여권 재발급을 받는다.
그래서 해외여행 시는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하여 여권 사본과 사진 2-3장은 따로 지참하는 것이 지혜이다.
덕분에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구경할 수 있겠지만, 단체여행이라면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전체 여행 일정을 망치게 된다.

-사람만 증명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차량도 자동차 등록증이 있다.
등록증이 없으면 매매를 할 수 없다.
10년을 내가 타고 다녔어도, 등록증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으면 매매가 불가능하다.
법적으로는 내가 남의 차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땅도 자기 번호를 갖고 있다.
건물도 자기 번호를 갖고 있다.
심지어 교회도 자기 번호를 갖고 있다.
교회를 설립하면 세무서에 가서 고유번호를 받고, 구청에 가서 부동산 등기용 등록번호를 받는다.
교인들이 기부금납입증명서를 해가면 어떤 회사에서는 교회 소속증명서를 첨부해달라고 한다.
그 교회가 문체부에 등록된 정상적인 단체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자기 증명을 요구받았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이 메시야인 증명을 해보라는 것이다.
각 증마다 발급기관이 있다.
주민등록증은 지방자치단체이다.
운전면허증은 지방경찰청이다.
등기부등본은 지방법원이다.
내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발급기관이 나를 증명해준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는 예수님더러 스스로 자기 증명을 해보이라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메시야로 믿어주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 대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다.

-자신 또한 유대인이었던 바울도 자신이 사도된 표를 이렇게 표현했다.고후 12: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자신이 다른 큰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말 끝에 나온 말이긴 하지만, 표적이 사도의 표라고 생각했음이 확실하다.

-실제로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행 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예수님은 표적에 낯선 삶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우연히 표적이 나타났던 게 아니었다.

-요한이 그걸 잘 증언해주고 있다.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그런데도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 동안 표적을 많이 행해 오셨다.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
열 두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을 고치셨다.
나병환자를 고치셨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열병으로 죽어가는 베드로 장모를 고치셨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다.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하셨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 한 번 더 하시면 안 되는가?
큰 문제라도 될 게 있는가?
그런데도 주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들의 마음이 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불순한 동기로 표적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메시야로 인정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예수님은 속으로 ‘야 네들이 인정해준다고 내가 메시야가 되고, 그렇지 않다고 메시야가 안 되는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 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거침이 없으셨다.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면 평범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독설이 섞인 말씀을 하셨다.“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표현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세대라고 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했다.
그러면 그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쓴소리가 ‘세대’만을 지칭하지 않고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모를 수 없다.

-여기서 ‘악함’은 도덕적 타락을 ‘음란함’은 영적 타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 때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을까?
그 이후에는 점점 도덕적으로 개선되고 영적으로 새로워졌을까?
후천년설주의자들 주장처럼 역사가 점점 긍정적으로 발전했을까?
주님이 이 시대를 향하여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쓴소리를 하지 않으실까?

-이 시대가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 최순실 사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영적 도덕적 타락을 느끼고 있다.
국가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최후의 보루여야 할 교회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지만 요즘 교회는 표적도 안 구한다.
여러분도 요즘 교회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고 영적으로 고결해서 표적을 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배불러서 안 구한다.
배부르고 등 따뜻해서 안 구한다.

-예수님이 배부른 자들에게 표적을 보인 적이 있는가?
표적이 아니면 못 사는 사람에게 보이셨다.
가난하고 병들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이셨다.
교회 안의 소수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주의 전을 찾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역사해 주세요”기도한다.
그러나 다수는 느긋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서두름이 없다.
목회자 마음만 타들어간다.
그나마 깨어 기도하는 소수만 애를 태운다.

-표적을 구한다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니다.
하늘의 표적은 오늘도 필요하다.
오늘도 예수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나야 정상이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그러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구해서도 안 된다.
맡겨주신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지만 악한 동기로 표적을 구할 때 한 가지 표적밖에 보여줄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게 무슨 표적인가?
요나의 표적이다.
예수님이 최고의 표적으로 인정한, 그래서 그 표적밖에 보여줄 게 없다고 하신, 요나의 표적은 어떤 표적인가?

-말이 요나의 표적이지 사실 요나가 표적을 행한 것은 아니다.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선지자이다.
그런데 보통 선지자와는 다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랐다.
그러나 요나는 청개구리 선지자였다.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라면 동쪽으로 가는 선지자였다.
그러면 포기할 법도 한데, 하나님은 요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가 도망하는 어디라도 쫓아가셨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때 모든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치는데 환경의 문이 자동문처럼 열렸다.
“그러면 그렇지...”
요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배를 타고 얼마를 갔을까
멀쩡하던 바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었다.
큰 배였지만 풍랑을 이길 수 없었고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다.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했고 배의 무게를 줄이려 물건을 바다에 던졌다.
그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배 밑층에서 잠을 자던 요나였지만 제비에 뽑혀 “사실 자기 때문에 이 모든 재앙이 일어났다”며 양심선언을 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요나는 사공들이 다가와 자기를 붙잡아 바다에 던지려는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깊은 바다에 던져져서 목숨을 건질 가능성은 제로였기 때문이다.

-자기 몸이 날아서 바닷물에 첨벙 던져졌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무엇인가에 빨려들어 갔다.
큰 물고기가 자기를 삼킴으로 그 뱃속에 들어간 것이다.
순간적으로 ‘아 죽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겠는가?
요나는 자신의 생명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기도는 하고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흘 밤낮을 기도했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려고 물고기를 니느웨 해안가로 인도하셔서 토해내게 했다.
분명히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갔는데, 물고기를 통해 니느웨로 데려가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표적을 행한 것도 아니고 요나에 의해서 표적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요나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동안 많은 표적을 행했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게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 되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있다가 살아났듯이 예수님이 땅 속에서 사흘 있다가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좋은 말로 했을 때 듣는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다.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앗수르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람들이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다.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를 할 때 크게 회개했다.
니느웨 사람들도 죽었다가 살아난 요나의 전도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요즘은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데, 예전에는 죽었다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간증자들이 많았다.
실제로 그 사람이 죽어 장사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그가 깨어나 자신이 보고 온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니, 그걸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그 간증자들을 통해 믿는 자들이 각성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믿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도하려고 죽었다가 살아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나온 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가서 전도만 하면 회개한 준비를 해놓으시고 요나를 보내셨다.

-사실 요나는 전도를 성의껏 하지도 않았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성이 컸지만, 요나는 단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이 정도면 니느웨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뭐라 할 만 하다.
자기들은 무성의한 요나의 전도에도 즉각적인 회개를 했는데, 요나보다 크신 예수님의 전도에도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 있다.
본인들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못 믿게 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심판 때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다.

-하긴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정죄를 받느냐 구원을 받느냐이다.

-하나님은 성경 히브리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한다.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확실한 건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왜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공덕을 쌓고 선행을 행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는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어떤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인가?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내 인생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면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다.
언젠가 내 앞에 인생의 종말이 불현 듯 닥친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면에서,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혜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솔로몬보다 영 못하다.
하지만 솔로몬보다 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누구를 알고 있고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은 지식을 쌓아도 한계가 있다.
배울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의 청소가 필요하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우리의 마음은 악한 영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원칙적으로 성령의 지배 아래 있지만, 그렇다고 늘 성령으로 충만하지는 못하다.
아무리 깨어 있어도 마음의 때가 묻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회개를 통해 마음을 청소한다.
마음의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쓰레기통도 자주자주 비워야 한다.
그러면 비우기가 쉽다.
그런데 오랜 만에 쓰레기통을 비우면, 쓰레기통을 청소하는데 수고로움이 따른다.

-어떻게 회개를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빈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해 놔도,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되고 만다.
회개가 목표가 아니다.
회개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다.
회개를 통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회개를 통해 청결해진 마음에 무엇인가를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다시 더럽혀진다.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전보다 더 못해질 수 있다.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할 땐 악한 영이 도망간다.
곁에서 얼쩡거리다가는 호되게 당할 수 있다.
눈치 빠른 악한 영은 회개가 시작되면 십리 밖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언제든지 돌아오려고 망을 보고 있다.
예전의 집으로 돌아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집을 잘 청소하고 수리하길래, ‘누가 들어오나’ 엿보고 있는데, 기다려도 빈 집 그대로다.
그러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바로 새 주인이 들어왔다.
자기와도 비교도 할 수 없는 탁월한 주인이 들어왔다.
그럼 돌아올 생각을 접는다.
그리고 다른 집을 찾아본다.
그런데 그 집을 찾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다른 집을 찾는 중에도, 옛집을 잊지 못해 힐끔힐끔 쳐다본다.
기회만 되면 옛집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한다.

-우리는 인생을 유턴(U-turn)한 사람들이다.
인생집을 대대적으로 청소하고 수리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노릇을 했던 마귀는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지금까지 별 탈 없었는데 갑작스런 일 앞에, 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마귀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주인으로 오신 분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다.
마귀는 누구에게도 자신 있다.
어떤 피조물과도 싸워서 백전백승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한테는 안 된다.

-마귀는 갑작스럽게 쫓겨나면서도, 주인으로 예수님만 안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고 말았다.
당장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대들 정도로, 마귀가 그렇게 머리가 나쁘지 않다.
일단은 물러나서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기다려도 그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다.
시간이 지나도 교회 생활에 열심이다.
믿음의 가족인 교우들과 잘 어울린다.
말씀과 기도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면 마귀는 울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포기하느냐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 마귀에게 호되게 당해봤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 자신의 부끄럽고 아픈 경험담을 담은 말씀이다.
예수님이 “깨어 있으라”고 주위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지 않아서, 마귀에게 죽음 직전까지 몰렸지 않았는가?
명색이 수제자로서 얼마나 망신이었겠는가?
호언장담했던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이 컸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이 시대는 결코 복음에 호의적인 시대가 아니다.
아직은 예수 믿는데 평화로운 시대이지만, 언제 이 평화가 깨질지 모른다.
지금은 예수를 믿기 위해, 큰 희생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게 가능하리라 보장이 없다.

-특히 이슬람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오면 생명을 걸어야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지금처럼 그리스도인의 저출산이 지속되면, 머잖아 이슬람에 당해낼 수가 없다.
아들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은, 마귀의 속삭임이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최소 둘은 낳아야 하고, 그래봤자 본전치기다.
셋을 낳아야 겨우 플러스다.

-앞으로 이웃 전도... 쉽지 않다.
타종교인을 개종 전도... 정말이지 쉽지 않다.
가장 쉬운 것은 자녀를 낳는 것이다.
자녀를 낳아 예수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이다.
아직 능력이 있는 부부는 진지하게 기도해보라.
부부가 시간을 정해서 한 달 정도는 기도해보라.

-예수 잘 믿기 바란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표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미 최고의 표적을 아는 사람들이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표적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우리가 표적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자기 증명서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란 증명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신분이다.
하늘나라 입구에서 검사하는 신분증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신분증이다.
이 신분증이 최고의 표적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