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5:제자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마 9:27-3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1472
마태복음 강해 25
제자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마 9:27-38)
2016. 10. 16.


프롤로그

-비틀러는 이 세상에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②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이다.
③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실제로는 ① ② ③ 세 부류의 사람이 있지만, ①부류의 사람도 ②부류의 사람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4차원적인 사람이나,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③부류의 사람을 동경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으로 살면, 마음은 힘들어도 몸은 편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으로 살면, 몸과 마음 둘 다 힘들 것이다.
몸과 마음이 힘든 대신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은 그런 소수의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성공을 위한 사람과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성공을 앞세운다.
성공했느냐를 먼저 따지지,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를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노벨물리상까지 수상했으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사람이 되려하기 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라.”

-성공한 사람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꼭 실패한 사람이라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냐,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냐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되다보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과만 놓고 보는 건 좀 그렇다.
성공한 사람이 독식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그럼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
일차적 목적이 가치 있는 사람이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성직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하긴 성직자들 중에도 성공을 추구하여, 모양새가 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어느 특정 직분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해당된다.
예수님이 성공이 아닌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사셨기 때문이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제자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말씀을 통해 부지런히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 예수님을 깊이 배워야 한다.
그래야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어느 날 저명한 두 교수가 심오한 사상과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물었다.
“헨리라는 학생이 그러는데 자기가 자네의 제자라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동료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
“글쎄, 그 학생이 내가 하는 모든 강의를 좇아다니며 듣고 있긴 하지. 그러나 나의 제자는 아닐세.”

-교인이라고 다 제자는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제자일 수는 없다.
성도라고 다 제자다운 제자는 아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양육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래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 이·취임식장에서, 당시 국회조찬기도회장이었던 유재건 장로의 간증이 있었다.
“제 부친은 어머니와 결혼한 지 9일 만에 세상을 뜨셨고, 저를 임신하신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저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모친은 얼마 전에 92세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임종 직전 제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8절 말씀을 읽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잘 들으시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고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머니는 ‘이것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말씀이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유언을 정리하면 ‘장로인 너는 목사님께 늘 순종하고 모든 사람을 선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길 정도의 이런 어머니 영향 아래서, 좋은 제자가 안 나온다면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수평적인 전도를 통해 이웃을 제자로 삼을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
그러나 혹 그게 안 돼도 이것만은 해내야 한다.
그건 수직적인 전도를 통해 자녀를 제자로 삼는 것이다.

-자녀를 열심히 공부시켜 성공시키고, 출세시키면 뭐하나?
그가 주의 몸된 교회를 떠나 예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산다면, 그 성공이 뭐며 그 출세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낯으로 서겠는가?
내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는데, 자녀도 제자 삼지 못했느냐는 책망을 받을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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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회당장의 12살 된 외딸이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그 집으로 향하시던 중, 예수님의 겉옷 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진 혈루증 앓는 여인으로 인해, 다소 걸음이 지체되었다.
그러던 중 딸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고, 회당장은 크게 낙담이 되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들었다.
그런 눈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예수님 외에 그가 붙들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믿은 게 아니고, 믿지 않으면 안 되어 믿었다.

-밀려오는 진한 슬픔을 억누른 채 집에 들어서자, 구슬픈 곡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비웃었다.
사실 죽은 것과 자는 것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어리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두 눈으로 회당장 딸의 죽음을 똑똑히 확인했다.
내보냄을 받아 물러가면서도, 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부모와 몇 명의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서,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땅으로 퍼져나갔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죽은 딸을 살려준 분에게 대접을 하는데, 소홀히 할 수 있겠나?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한사코 떠나셨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왔다.
맹인이라서 그랬는지, 예수님한테 나아오지 못했다.
예수님이 지나간 직후에 소식을 접했고, 예수님을 따라붙었다.
가족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중풍병자처럼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맹인으로 사는 것도 서러운데, 도움을 주는 사람마저 아무도 없으니, 너무 고통스런 삶이다.

-인생의 3중고 즉 언어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를 가졌던 헬렌켈러에게는,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한다.
더도 말고 3일간만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었다.
그러면서 그 3일 동안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첫째 날...눈을 뜨는 순간, 나는 나를 평생 가르쳐 준 '셀레반' 선생님을 먼저 찾아 볼 것입니다.
그의 인자한 모습, 끈질긴 집념, 사랑의 힘, 그의 성실함... 이 모든 성품들이 나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바라보면서,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여 두겠습니다.
그리고 산과 들을 산책하면서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의 모습, 아름다운 꽃의 색깔의 신비한 조화들을 마음껏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면, 서쪽 하늘로 가라앉는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둘째 날...복잡한 거리에 나가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진열된 역사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그런 후에는 미술관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의 신비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셋째 날...먼동이 트는 햇살과 함께 일어나,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또 거미줄처럼 줄지어 달려가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극장으로 가겠습니다. 그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가수들의 노래와 우아한 동작, 그리고 영화에서 상영되는 명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아름다운 불빛 속에 즐비하게 늘어진 상점 안에 진열된 예쁘고 아름답고 상품들을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나의 눈이 감겨질 때, 나는 하나님께 3일 동안의 귀중한 경험과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마무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는 맹인 두 사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3일이 아닌 평생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비록 눈이 안 보이지만, 대신 예민한 청각과 민감한 촉각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어떤 경로로든 들어 알고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얼마 전에는 죽은 자까지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부터,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기로 했다.
마침내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회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기회는 차지하는 사람의 것이다.
기회는 엿보다가 붙잡는 사람의 것이다.
당시 그 지역에 맹인이 그들 뿐이었겠는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단지 두 사람 뿐이었겠는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모든 맹인이 불편을 겪고 있다.
모든 맹인이 앞 못 보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모든 맹인이 ‘눈 한 번 떠봤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예수님께 부르짖은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저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벽에나 심야기도회에 나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은 소수이다.
분명히 기도해야 하는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기도의 자리에 빠지고,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면, 속에서 은근히 화가 난다.
그렇다고 기도 안 할 수도 없다.
그게 개인의 문제이자 동시에 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지른 사람은 두 맹인이다.
두 사람은 맹인으로서, 서로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많은 맹인 중에서, 유독 두 사람은 서로 맘이 맞았다.
눈을 뜨고 싶은 소원이 같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자는 것에 마음이 하나됐다.
혼자였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같은 맹인이었지만, 두 사람이었기에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예수님한테 나올 수 있었다.

-언뜻 생각하면, 맹인이 맹인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지만 아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 문제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문제에 붙들려서, 이것저것 다 놓으려고 한다.
자기 문제에 집중하면, 문제가 해결되나?
오히려 남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할 때, 자기 문제의 덫에서 놓임 받을 수 있다.

-중보기도는 문제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는 자기 문제가 전혀 없는, 팔자 핀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문제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해 기도한다.
자기 문제가 있지만, 교회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지역 문제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 문제를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는 자기 문제가 산더미 만했지만, 그렇게 기도하면 손바닥 만해진다.

-맹인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며 따라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예수님은 못들은 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정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셨다.
그렇게 딱한 사정을 아뢰는데, 그 좋으신 예수님이 못들은 체 가던 길을 가셨다, 어디지 모르게 어색하다.

-여리고의 맹인 같은 경우에는, 하도 소리쳐대니까 제자들이 뭐라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치유해주셨다.
그러나 본문은 다르다.
그들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제자들과 함께 애초 가고자 했던 집으로 가셨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맹인들은 그곳까지 나아왔다.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맹인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몇 번이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멈춰 서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하여 따라왔다.
예수님이 어떤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까지 따라들어갔다.

-그때서야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참 예수님도...아니 예수님이 그렇게 할 줄 믿지 않고서야, 그들이 그곳까지 따라왔겠는가?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그들의 소원을 떠보신 것이다.

-맹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들은 확신에 넘쳤다.
역시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이었다.
그들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들의 건강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의 학력이나 경력이 아니었다.
‘뜨거운 믿음이 있느냐’ ‘불타는 소원이 있느냐’ 이것만 보셨다.
그런 거라면 맹인들은 자신이 있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을 기다리게 하지 않으셨다.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믿음을 확인하셨는데, 망설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들의 눈, 보이지 않았던 그 눈, 원망스럽기만 했던 그 눈을, 주님이 만지시며 선언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럼 그들의 믿음이 진짜였다는 말인가 가짜였다는 말인가?
진짜였다는 말이다.

-우리가 한 시간 기도했다고 치자.
기도가 끝났을 때, 주님이 말씀하시길,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면, “아멘 할렐루야” 할 자신 있는가?

-눈이 밝아진 두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둘이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그 때 주님이 예상외의 말씀을 하셨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들에게 엄히 경고를 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캄캄했던 눈이 밝아진 그들은, 그 놀라운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그들은 온 땅에 예수 소문을 퍼뜨렸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엄히 경고를 해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문을 내고야 만다.
자기를 그렇게 변화시킨 예수 소문을 퍼뜨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입을 다물어달라고 부탁을 해도, 이미 열린 입을 다물 수 없다.
이게 전도다.

-결코 전도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식 자랑을 의무감으로 하는가?
얼마 전 시호가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하여 상을 타왔다.
이걸 내가 의무감으로 한다고 보는가?
할매 할배가 손주 자랑을 의무감으로 하는가?
손주 자랑은 돈 내고도 한다지 않는가?

-전도는 예수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이다.
전도는 교회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이다.
전도는 목회자 자랑하고 소문을 내는 것이다.

-최고의 제자는 전도 제자이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예수 자랑’, ‘교회 자랑’, ‘목회자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 제자이다.

-예수님께 올 때는 두 눈이 캄캄했던 두 사람이, 눈이 밝아져 돌아갔다.
이게 예배이다.
세상에서 한 주간 살다보면, 하늘나라에 대해 캄캄해진다.
예배 드리고 나면, 눈이 밝아져 하늘나라가 환히 보인다.
교회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희미하다.
설교를 듣고 나면,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이 선명해진다.
이런 예배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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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어두웠다가 보게 된 두 사람이 나가자, 이번에는 말 못하는 사람이 왔다.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이 사람은 누군가 예수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님을 피하려고 하니까, 그를 예수님한테 데려가려고 하면 방해를 했다.
그런데 고마운 누군가를 통해, 그가 예수님한테 나아오게 됐다.
고마운 누구가 없었다면, 그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
그럼 그는 계속 귀신 들려 있어야 하고, 말 못하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이 고마운 누구가 가족일 수 있다.
친구일 수 있다.
인심 좋은 이웃일 수 있다.
먼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일 수 있다.
이 고마운 누구를, 달리 ‘중보기도자’, ‘전도자’, ‘제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귀신이 쫓겨나갔다.
그가 말을 하게 됐다.
그가 말을 못한 것이 귀신이 들렸기 때문인데, 그에게서 귀신이 쫓겨났으니 말을 하게 된 건 자연스럽다.
예수님이 바빠서, 이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터치가 없었는지, 아님 복음서 기자가 생략했는지 몰라도, 귀신이 알아서 나갔다.
귀신은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다.
귀신은 예수님 이름 앞에서 버틸 수 없다.

-우리가 찬양을 그렇게 하지 않는가?
주 이름 큰 능력 있도다 난 믿네 그 이름예수의 그 이름 부를 때 새 생명 얻었네마귀는 떠나 가고 갇힌 자 자유케 해모든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 주 예수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악한 영은 떠나가고,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걸 기대하라.

-예수 믿고 잘 되는 것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겁도 없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
그들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얼마나 말을 그럴듯하게 잘 갖다 붙이는지 모른다.

-사디의 말이 그들에게 적합하다.
“말이 많기 때문에 사람은 짐승보다 낫다. 그러나 바른말을 하지 않으면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

-교회 안에서는 바른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덕이 되는 말, 은혜 되는 말을 하면 좋겠다.
내가 이 말을 해서, 내 속은 잠시 시원할지 몰라도, 교회에 덕이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은 몰라줘도, 주께서 적당한 때에 갚아주신다.
은밀히 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갚아주실 줄 믿는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라.
그 사람 앞에서도 좋게 말하고, 그 사람 뒤에서도 좋게 말하려고 힘쓰라.
지폐 양면이 액수가 같아야 한다.
앞면은 5만원이 적혀 있는데, 뒷면은 5천원이 적혀있다면, 여러분은 그 지폐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앞뒤 말이 다른 사람은, 신뢰를 받기 힘들다.
그럼 결정적일 때, 아무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대꾸를 무시하시고, 자신의 길을 가셨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일명 3대 사역에 집중하셨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치유하셨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배웠다.
제자훈련이 다른 게 아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가르치고 전파하며 치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좋다고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가르치는 것 못할 수 있다.
전파하는 것 시원찮을 수 있다.
치유기도 한 마디도 못할 수 있다.
그것은 훈련으로 된다.
제자다운 제자는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교회 교우들이 가르치는 사역과 전파하는 사역과 치유하는 사역에, 능통한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 눈에 그 무리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목자 없는 양보다 불쌍하고 고생하고 기진하는 양이 없다.
당시 목자들이 있었다.
랍비들이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이 제사장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 목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같이 선한 목자가 아닌, 양을 고생시키는 목자, 양을 기진하게 만드는 목자로 보였다.

-나는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는 거리가 있다.
대신 양을 고생시키는 목자가 안 되기를 바라고, 양을 기진하게 만드는 목자만은 되고 싶지 않다.
늘 기도로 협력해주기 바란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으로는 부족하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기도하게 하셨다.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나도 우리교회에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한다.
갈급한 자, 낙심한 자, 사명 있는 자, 충성된 자, 헌신된 자들을 보내주소서.
교회를 정하지 못한 자, 주위에 이사 온 자들을 보내주소서.
누가, 아삽 헤만 여두둔,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전문가들을 보내주소서.
디모데 같은 청년들을 보내주소서.
백부장 같은 군인들을 보내주소서.
다윗의 세 용사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소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30대 부부 일꾼을 보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