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9:믿음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마 8:1-1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916
마태복음 강해 19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마 8:1-13)
2016. 9. 4.


프롤로그

-믿음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두란노사전에서는 믿음을 이렇게 풀이했다.
신앙, 확신, 신뢰, 의뢰함을 의미하며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꾸는 태도를 말한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이 제시해주신 진리를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신뢰, 사랑, 그리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반응한다.

-교회 안에서 말하는 믿음은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바 ‘믿는 마음’, 곧 신뢰는 기본이다.
거기에 더하기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당연히 교회의 지도를 받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믿음 하면 이게 빠지면 안 된다고 본다.

-3살, 6살짜리 아이들이 살고 있는 어느 3층 집에 불이 났다.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뜨거운 기운과 연기 때문에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빠는 창가에서 다급하게 아이들을 불렀다.
다행히 아이들이 무사했다.

-아빠는 그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아빠가 받아줄 테니 아빠를 믿고 뛰어내려.”
3살짜리 아이는 아빠의 외침을 듣고, 아빠를 향한 단순한 믿음으로 자기 몸을 던져 무사히 구출되었다.
하지만 6살짜리 아이는 아빠의 뛰어내리라는 외침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빠가 날 받다가 놓치면 어쩌지?’
‘아빠가 정말 날 잘 받아줄 수 있을까?’
‘아빠가 날 받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정말이지 난 죽기 싫은데 어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길은 점점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나왔다.

-나폴레옹의 말이 도망쳤을 때의 이야기다.
날쌘 병사 하나가 자기 말을 타고서 장군의 말을 쫓아갔다.
그가 말고삐를 나폴레옹에게 건네주었을 때, 나폴레옹은 병사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맙네, 대위.“

-그 말을 들은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얼른 차렷 자세를 하고서 경례를 붙였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그는 즉시 병사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들고 장교숙소로 옮겨갔다.
그리고 낡은 군복을 벗어 군수품 담당자에게 주고는, 대위의 군복을 받아들었다.
장군의 말 한 마디에, 그는 병사에서 장교로 바뀐 것이다.

-그는 따지지도 않았고, 사양하지도 않았으며,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장군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 주제가 있다.
‘믿음’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단순한 믿음’이다.
믿음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예수 믿기를 힘들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안에 있는 복잡한 지식이, 성경에서 말하는 단순한 믿음과 어울리지 못해서 그렇다.

-구원을 은혜로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말이 되는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교리다.
조금만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믿음이 복잡해지는 것이 아닌 단순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란 불난 집의 3살짜리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리킨다.
단순한 믿음이란 앞도 뒤도 재지 않는 믿음이다.
단순한 믿음이란 하나만 생각하는 믿음이다.
두 개 세 개 생각하면 복잡해 진다.

-왜 머리가 아픈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기 때문이다.
쉬운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단순함이 힘이다.
단순한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난다.

-심리학 교수 수잔 놀랜 혹스마(S. N. Hoeksema)는 “오버 싱킹(over-thinking)”이란 말을 썼다.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모두 그럴듯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중에서 가장 극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내용을 답으로 채택한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다가, 급기야는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까지 끄집어내서, 문제를 더 키우곤 한다.
스스로 화가 나서 직장이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약속을 취소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일은 여성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을 자주 한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 40퍼센트이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이 30퍼센트이며,
안 해도 될 사소한 걱정이 22퍼센트이고,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퍼센트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걱정거리는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4%도 내 힘으로 해결하는 게 사실상 힘들다.
그럼 그 4%도 해봤자 소용없는 걱정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4%마저 주님 앞에 가져가서 맡겨버려야 한다.

“그럼 내가 할 걱정은 없네.”

-맞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아니다.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복잡한 계산을 하면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한다.

-오늘 단순히 예수님께 나아온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나병환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부장이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비춰보고 고칠 게 있으면 고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산에서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들이 5-7장에 있는 산상수훈이다.
너무나 보석같은 말씀이다.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도 다르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을 수 많은 무리들이 따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무리로 주님을 따랐던 자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불리하면 돌아섰다.
주님을 따르는 게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갔다.

-한국에도 그 많던 교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특히 젊은이들의 이탈이 많았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부담이, 그들의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끝까지 주님을 제자로 따르는 것은, 그처럼 쉽지 않다.

-주님을 따르는 동안, 늘 운수대통하고, 재수 좋은 일만 생긴다면, 무리도 끝까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신앙생활이란 없다.
예수님 당시에도 없었고, 오늘날도 앞으로도 없다.

-이런 찬양 있지 않는가?
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눈보라가 앞 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험한 파도 앞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모진 바람 앞 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주의 길을 가는데, 비바람이 갈 길을 막기도 하고, 눈보라가 앞길을 가리기도 한다.
주의 길을 가는데, 험한 파도 앞길을 막기도 하고, 모진 바람 앞길을 가리기도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낸다.
그래서 진짜를 더 진짜 되게 하고, 진짜를 더 성장시킨다.

-누구보다 산상수훈의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있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이다.
그는 본래 신학자요 음악가였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보고를 듣고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남은 삶을 아프리카에 헌신했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작가였던 알베르 까뮈와 대조된다.
까뮈는 [이방인]이란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그 상금으로 파리 근처에 있는 루르마렝에 아름다운 별장과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다.
?까뮈와 같은 해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는 그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나환자촌을 지었고 랑바레네에 병원을 세웠다.

-3년뒤에 까뮈는 자신이 "아늑한 묘지같은 호텔"이라고 이름붙인 별장에 쉬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슈바이처는 3년 뒤에도 아프리가 랑바레네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까뮈와 슈바이처는 각자의 분야에서 노벨상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쌓았으나, 사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비극적 휴머니즘을 문학으로 표현했던 까뮈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학과 선교로 표현하면서 살았던 슈바이처는,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까뮈의 별장은 지금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지만, 슈바이처의 병원은 지금도 남아서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살리고 있다.

-세상에서 무작정 성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공 자체가 목적이 되면, 혹 세상에서 성공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자가 될 수 있다.
적어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면 실패한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주님을 무리들이 따르고 있을 때, 인생의 문제를 만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몸에 나병이 든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나병으로 진단을 받으면 그 때부터 천벌을 받은 자로 살았다.
치유는 불가능했고 시간이 지나면 몸이 썩어 문드러졌다.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었다.
말이 격리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하나님께 제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전 출입이 금지되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께까지 버림받았다.
그러니까 나병은 사형선고이다.
나병을 선고받은 삶은 시한부 인생이다.
모진 목숨 죽지 못해서 사는 비참한 삶이다.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개인적인 문제, 가정적인 문제, 생업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큰 문제라도 나병에 비할 수는 없다.
혹 다른 어떤 불치병이라고 해도 나병에 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보다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인생 최고의 문제를 가진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절하며 말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믿음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아니 자기가 무슨 감기환자도 아니고, 나병환자가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 병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나병환자 역시 복잡하게 생각했다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다.
그가 오버 싱킹(over-thinking)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혼자 예수님께 나아왔다.
나병환자가 혼자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친구들에게 권했을 것이다.
“우리 예수님 한 번 만나보자.”
“그분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린 적이 있대.”
그러나 누구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들에게도 나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소원이 있다.
그들에게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면, 첫째 나병에서 고침받는 것이고, 둘째도 셋째도 같은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원과는 달리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다.
“너부터 갔다 오라”고 보냈다.
“너 고침 받고 오면 그 때 가도 늦지 않겠지”라고 했다.

-나병환자 혼자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말자 절하며 소리쳤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단순한 믿음에 역사가 일어났다.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단순히 나아오는 것이 믿음이다.
내 형편 처지 따지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믿음이다.

-그 단순한 믿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나환자의 몸에 대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이 감동하신 것이다.
하늘 보좌는 복잡한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 보좌는 복잡한 계산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 보좌는 오직 우리의 단순한 믿음으로만 움직인다.

-문제가 크면 나부터도 문제가 봐지더라.
그 때 정신차려야 한다.
그 때 예수님께 단순하게 나아와야 한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때이다.
예수님이 그의 단순한 믿음에 감동하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자, 즉시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나병환자는 자기 눈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꿈만 같은 사실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로 기쁨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람이 그렇다.
생각지도 못한 기쁨 앞에 표현이 잘 안 된다.
기뻐 뛰며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나병환자가 정신이 들었다.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뭐라 하셨는가?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그게 율법의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레 14: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그러면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진찰하여 나은 게 확실하면 정결예식을 한다.
그 예식이 끝나야 정결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받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한 것은, 치유가 미심쩍어서가 아니다.
확실하게 나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입증 받으라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직접 따라가지 않는 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제사장의 입증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위해서, 율법의 규정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혼자가 아니다.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
가족 공동체를 귀히 여기라.
믿음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라.
마귀는 양 무리인 공동체에서 떠나 혼자 겉도는 양을 노린다.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아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

-공동체 안에서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가?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공동체에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 스스로 성을 쌓고, 가시 울타리를 치고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막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보기 싫은 사람 안 보니까 좋았으나, 점차 외로움이 찾아온다.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자기 혼자뿐이다.

-주님이 왜 치유받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을 찾아가 몸을 보이고, 정결예식을 통해 공동체로 복귀하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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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루는 가버나움에 가셨다.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 때 백부장이 예수님한테 나아왔다.
그리고는 간구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이례적이지만, 자기 문제도 아니고 종 문제로 찾아온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하인이 다른 병도 아니고 중풍병이 들었으면 버리면 된다.

-중풍병은 기다리면 낫는 병이 아니다.
그의 표현을 볼 때 중풍병이 초기가 아닌듯하다.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정도면 심한 중풍병이다.
그러면 웬만한 주인 같으면, 새 하인을 들인다.

-더구나 백부장이 유대인도 아니다.
그럼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버렸다고 욕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침받게 하려고 예수님한테 나아왔을까?
다른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고, 자기가 직접 말이다.
여러분은 왜 그랬을 거 같은가?

-먼저는 백부장이 사람이 좋아서다.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할 수 없다.
비록 하인이었지만 자기 집에서 자기를 섬겼던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마침 예수님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예수님한테 나아온 것이다.
주인도 하인을 잘 만나야 하지만, 하인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인은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어쩌다가 하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 좋은 주인을 만남으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아,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다음은 하인이 충성돼서이다.
주인이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하인이 불충성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주인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하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가 건강할 때 워낙 충성했던 것이다.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주인에게 충성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걸 누구보다 주인이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충성하던 하인이 덜컥 쓰러졌다.
점점 상태가 심해지고 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열일을 제쳐두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남편 있는 사람이 좋은 남자 만나기를 위해 기도하면 반칙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니,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이 시대는 종이나 하인이란 신분은 없다.
그러나 윗사람 아랫사람은 있다.
아랫사람으로 있을 때 충성하라.
윗사람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충성하라.
충성하면 언젠가는 알아주고 인정받게 되어 있다.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바로 승낙을 하셨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다.
왜 그랬을까?
백부장의 인간미를 보셨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이 인간미를 보셨다고?
그렇다. 예수님이 인간인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시겠는가?
인간미를 보신다.
인간미의 다른 말이 ‘중심’ 아닌가?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미 있는 목사가 되고 싶다.
인간미가 솔솔 나는 그런 목회자로 살고 싶다.
물론 설교자로서, 양육자로서, 말씀의 권위를 잃지 않아야겠지만, 억지 권위를 세우는 인간미 떨어진 사역자로 살기 싫다.
나는 예수님이 피곤하여 풍랑이 이는 배에서 곯아떨어진 장면을 좋아한다.
예수님의 진한 인간미가 풍겨서이다.

-좋은 인성이 복이다.
좋은 영성만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좋은 인성에 좋은 영성이 담겨야 좋은 신앙인이 된다.
영성은 뛰어난데 인성이 고약한 사람이 리더가 되면, 밑의 사람 숱하게 고생시킨다.

-좋은 인성은 건강한 자아에서 나온다.
자아가 건강한 사람이, 처음부터 건강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수많은 인격 장애를 가질만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자아가 건강할 수 있다.
자기 마음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뿌리내린 잡초들을 뽑아내는 수고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게 우선이다.

-사람 좋은 백부장은 예수님의 흔쾌한 승낙에 오히려 당황했다.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은 다들 믿음이 좋은 게 공통점이다.
그래서 기도제목에 백부장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것을 추가했다.
백부장은 딱 군인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이해했다.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질서이다.
상명에 하복이 안 되면 군대는 무너지고 만다.
지휘관이 나이가 어리다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영적으로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 교회가 무너진 것은 다른 이유도 충분히 댈 수 있지만, 영적 권위에 문제가 생긴 것도 결정적인 이유이다.
영적 권위가 무너진 교회를 마귀는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마귀가 교회를 볼 때 전투함이 아닌 유람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학도병도 군인이다.
학도병도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웠다.
학도병은 전쟁이 일어나서 총 몇 번 쏴보고 전쟁터에 투입된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를 군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군과 싸우다 죽어갔다.

-우리는 예수 믿은 지 제법 됐다.
많게는 50년이 넘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학도병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중 누가 예수님한테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인간성만 좋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싸움엔 무기가 필요하다.
바로 믿음이라는 무기이다.
나병이라는 것과 싸울 다른 무기는 필요 없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 뿐이었다.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다른 방법 필요 없었다.
예수님께 단순히 나아가는 믿음 뿐이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교회에 들어가면, 훈련병이 노란명찰 달고 있을 때와 빨간 명찰 달고 있을 때, 사람이 달라보인다.
노란 명찰 때는 어딘지 좀 어리버리하다.
빨간 명찰을 달고 있으면 폼이 난다.
여러분의 믿음의 명찰은 무슨 색깔인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하인이 즉시 나았다.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믿음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께 나아오는 것이 믿음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