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7:비판 대신에 기도합시다.(마 7:1-12)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6-11-02 00:00
조회
651
마태복음 강해 17
비판 대신에 기도합시다.(마 7:1-12)
2016. 8. 21.


프롤로그

-내가 사는 집은 다세대주택이다.
A동 B동 C동 건물 세 개로 돼 있다.
어느 주택도 그렇지만, 주차시설이 넉넉하지 않다.
그나마 A동 건물 밑에 4대, A동 B동 사이에 6대 주차할 곳이 있고, 그곳을 다같이 사용하고 있다.
낮 시간은 비어 있지만, 다른 때는 아예 주위 골목길에 대놓고 들어간다.

-몇 주 전 저녁 8시에 들어왔는데, 웬일로 두 대 주차 공간이 비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건물 밑 주차 공간이었다.
더울 땐 건물 밑이 인기가 있다.
그래서 그곳에 주차를 하려고 하는데, 오토바이가 정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남의 오토바이를 괜히 만졌다가, 절도 혐의라도 받으면 손해니까, 다른 곳에 주차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차 한 대가 내가 주차하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한하다. 내가 주차하고 있으니, 건물 아래 주차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안 보일텐데. 그리고 오타바이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차를 마쳤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차 조수석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건물 밑 주차장의 오토바이를 치우더니, 그곳에 자기 차를 주차하는 게 아닌가.

-너무나 황당한 광경을 목격한지라, 내가 들어가지 않고, 그들이 주차를 할 때까지 보고 있었다.
그들은 속도 모르고, ‘저 사람이 왜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볼까’ 했을 거다.
주차하고 나면 한 소리 하려다가, ‘에이’ 하고 올라왔다.
그런데 우리 동 사람들이었는지, 바로 뒤따라 올라왔다.
요즘 우리 동에 사람들이 좀 바뀌어서, 미처 다 파악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 집 문을 열다말고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주차장을 그렇게 쓰면 어떻게 하냐”고 했다.
“우리 동만 쓰는 것도 아니고, 세 동이 같이 쓰는 공동주차장을 오토바이로 미리 자리를 잡아놓고 그러면 되냐”고 했다.
나 같으면 ‘아 그러냐고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다’고 할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라.
집에 들어와서도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냐’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내 속에 벼르는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두고 볼 겨.’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세상에 그들뿐이겠는가?
그런 사람들 다 탓하려고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웃 잘 만나는 것도 복이다.
그런데 좋은 이웃만 있는 게 아니다.
눈에 거슬리는 이웃도 있고, 가시 같은 이웃도 있다.
그들도 이웃인 것이다.
그런 이웃과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우리다.

-한 번은 같은 동 아주머니가, 나한테 축구 스타킹을 한 켤레 준 적이 있다.
“아니, 애들 아빠한테 주시지 않고...” 했더니, 자기 남편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서라며, 누구 줄까 했는데 아저씨가 생각났다며 주는데, 일단 고맙다며 받기는 했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그분 얼굴을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할 정도로, 서로 활동하는 시간대가 맞지 않는데, 내가 축구 복장으로 나가는 것을 봤나 보더라.
몇 천원하는 스타킹 한 켤레 받았지만, 그 때 이웃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이번 주차 문제로 눈에 거슬리는 이웃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다.
북한에는 ‘자아비판’이란 것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비판은 타인을 대상으로 한다.
격려도 위로도 그와 다르지 않다.
자기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타인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니까 외딴 섬에 가서 혼자 산다면, 비판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나 말고 너와 우리가 있다면,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다.

-우리 중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100% 긍정적인 사람이 없고, 100% 격려형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보면, 먼저 좋은 점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니 나쁘게 말하는 게 힘들다.
그런 아내도 가끔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때가 있다.
좋은 말만 100% 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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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사전적인 정의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이다.

-비판의 시작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비판할 때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하는가?
전문가 집단이 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판단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공동 규율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다.
그러니까 비판은 객관성이 결여될 수 있다.

-비판은 밝히거나 지적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누구나 판단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옳고 내가 보기에 그르다고 판단하는 게, 특별히 문제될 게 있겠는가?
문제는 그것을 밝히거나 지적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의 판단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판단까지 안 하면 좋겠지만, 판단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입방정이란 말이 있듯이, 입이 가만히 있지 못해서 문제가 된다.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입만 무거워도 실천이 그리 어렵지 않은 말씀이다.
사실 우리의 죄는 대부분 입으로 짓고 말로 짓는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입으로 하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하나는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한 입으로 비판을 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다.
똑같은 입을 가지고, 어떨 때는 비판을 해대고, 어떨 때는 기도를 한다.

-비판은 파괴적인 사역이고, 기도는 창조적인 사역이다.
비판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기도는 관계를 회복시킨다.
비판은 다른 사람을 보고, 기도는 하나님을 본다.
비판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기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비판은 자기를 의인으로 여기고, 기도는 자기를 죄인으로 여긴다.
비판은 자신을 점점 불행하게 만들고, 기도는 자신을 점점 행복하게 만든다.

-주님은 도덕 선생님이나 윤리 교사가 아니다.
“비판하지 마라. 비판은 나쁜 거야.”
“너희들 또 비판하면 이번에는 혼난다.”
주님의 말씀을 교장 선생님 훈화 쯤 여겨서는 곤란하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살 수 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주님은 우리한테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현실적인 이유로,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우리 애들이 환호 받으면 좋겠다.
가능한 최고가 되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좋겠다.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좋겠다.
어느 교회 다니냐고 할 때, 당당히 한꿈교회 다닌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부모로서 목사로서 행복할 것 같다.

-어디 갔는데 누구를 만났다고 치자.
“혹시 예람이 아버지세요?”
“네, 그런데요.”
“아휴 예람이가 너무 일을 잘해요. 인간성도 좋고요. 거기다 믿음까지 좋아요.”
“아, 그래요? 애비 눈에는 부족해 보이기만 한데....”
“에이, 무슨 말씀을요. 제게 아들 있으면 며느리 삼고 싶어요.”

-그럼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에 사춘기 때 속 썩였던 전력까지 단번에 말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된다면 정말 힘들 것 같다.
비판을 받고 있는 본인 못지않게, 나도 고통스러울 것 같다.
자녀가 비판을 받고 있는데, 행복해 할 부모가 있겠는가?
자녀의 고통이 곧 부모의 고통이다.

-주님은 우리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서 불의한 일로 비판을 받고, 불법을 저질러 비판을 받을 때, 아버지 하나님은 고통스러워하신다.

-요즘은 단지 예수 믿는다고, 괜히 비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대부분 비판을 받아 싸다.
그럴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교회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불러, 선한 행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자 계획하셨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저번 가정주일에 그 동안 갖고 있었던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이전에는 자녀 덕 볼 생각 없었는데, 생각을 바꿔 자녀 덕 보기로 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물론 나는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짐 될까 싶어, 하나님께 장수의 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녀 덕 보기로 생각을 바꾼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자녀 덕 보기로 했다는 말은, 자녀가 잘 됐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으로서 한 말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 덕 많이 봤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덕 보게 할 수 없을까?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자식 덕 볼 자격 충분히 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덕 보게 하셔야 한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가?
하나님의 희생에 비하면, 우리의 헌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덕 볼 차례이다.

-비판을 하면 얼마만큼 비판을 받는가?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비판한 만큼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헤아린 만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비판에도 메아리법칙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칼럼니스트이자 시인인 이상헌 씨는 메아리법칙이란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에 올라가서 “야호~”를 외치면, 음향이 33번 반사에 반사를 거듭해 되돌아온다.
이 법칙은 우주만물에도 적용되어, 남을 위해 하나를 축복하면 33개의 축복이 오고, 원망하면 역시 그만큼의 숫자가 되돌아와, ‘메아리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33번 반사에 반사를 거듭해 되돌아온다”는 말이 뜨끔하다.
실제로 비판을 한만큼만 되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비판을 한 마디 했는데, 비판 한 마디로 되돌아올 것 같지 않다.
인간의 죄의 속성 상, 이상헌 씨 글처럼 몇 갑절이나 보태서 되돌아올 게 틀림없다.

-비판하는 사람의 속성이 있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의 눈 속의 티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런 예리한 눈을 가졌다.
사실 예리한 눈을 가진 것은 나쁘지 않다.
아니 예리한 눈은 오히려 좋은 것이다.
문제는 그 예리한 눈으로,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를 본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내 눈 속의 들보는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 남의 눈 속의 티가 잘 보인다.
그럼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혹시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건 아니가?’
남의 눈 속에 티가 보인다고, 그것을 알려줄 사명감에 불타서, “당신 눈에 티 좀 빼라”고 하면 망신 당할 수 있다.
“당신 눈 속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내 눈 속의 티를 빼라고 하는군요.”

-그 때 “아니, 내 눈에 무슨 들보가 있다고 그래” 하면서, 눈을 부라리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6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거룩한 것, 진주는 말씀을 가리킨다.
개나 돼지는 완고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다.
비판하면 비판이 되돌아온다는 말씀을 주셨다.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빼는 것이 순서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런데 귀를 틀어막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완고하게 굴며 말씀에 불순종한다.
그럼 자꾸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서, 상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 상종하다가는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비판을 잘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나도 닮아간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을 말리면, 내가 다칠 수 있다.
해답은 비판을 잘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멀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판 기능이 떨어진다.

-혹시 기도도 잘하고, 비판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진짜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판할 여유가 없다.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다.

-자기가 본래 비판적 성향이 있으면 조심한다.
비판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면, 은혜가 떨어져서 그런 줄 깨닫는다.
그리고 얼른 기도의 자리를 찾는다.
혹시 비판의 말을 못 누르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
그럼 아차 싶어서 얼른 기도의 자리를 찾는다.
그래서 그가 기도의 사람인 것이다.

-뭐라도 자꾸 반복하면 는다.
비판도 자꾸 하다보면 실력이 는다.
기도도 다르지 않다.
여러분의 비판 실력을 늘리고 싶은가?
기도의 실력을 늘리고 싶은가?

-주님은 우리에게 비판대신 기도를 할 것을 말씀하셨다.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보면 비판도 입으로 하고, 기도도 입으로 한다.
똑같이 입으로 하지만, 비판은 죽이는 역사를 일으키고, 기도는 살리는 역사를 일으킨다.
비판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명령형이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명령형이다.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듯이, 기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하면 비판한 만큼 돌려받듯이, 기도하면 기도한 만큼 응답을 받는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서 “그리하면”이 중요하다.
구하면..., 찾으면..., 문을 두드리면...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찾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역시 내가 할 일이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하신다.

“내 할 일은 하자”

-내 할 일은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자.
주시면 좋겠는데...
찾으면 좋겠는데...
열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자.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항해 도중 바람이 잔잔해져, 배는 그 자리에 멎게 되었다.
선원들은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면서, 모든 활동을 멈췄다.
-답답해진 선장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하나님이 도우시도록 기도 좀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요청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배를 바람 맞을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선원들은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하지 않는 한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도의 능력을 믿었던 선장은 선원들에게, 허드슨 테일러의 말대로 하게 했다.
-그 때부터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방에 들어가 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기도를 계속했다.
갑자기 그의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허드슨 테일러는 기도를 멈추고 문을 열었다.
선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기도하고 계셨습니까?"
"예."
“아, 그럼 이제 그만 멈춰주세요. 지금 바람이 너무 지나쳐서 야단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를 보면서, ‘아, 나는 언제 그런 말 들어보나’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봤다.
“기도 좀 멈춰주세요.”
“이제 기도 그만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러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어차피 기도의 졸업은 없다.’
‘직분자 정년은 있어도, 기도자 정년은 없다.’

-언제까지 구해야 하는가?
주실 때까지
-엘리야가 산에 올라가서 언제까지 비를 구했는가?
주실 때까지

-언제까지 찾아야 하는가?
찾을 때까지
-여인이 잃은 드라크마를 언제까지 찾았는가?
찾을 때까지

-언제까지 문을 두드려야 하는가?
열릴 때까지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인들이 언제까지 두드렸는가?
열릴 때까지

-우리가 기도하면, 공이 내 손을 떠나는 것이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내 손을 떠난 공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좋으신 하나님의 속성 상, 우리 기도를 확실하게 책임지신다.
떡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상징하고, 돌은 무가치한 것을 상징한다.
생선은 자녀에게 이로운 것을 상징하고, 뱀은 해로운 것을 상징한다.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구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을 주시겠는가?
우리가 이로운 것을 구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겠는가?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다.

-그건 내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다.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설령 우리가 무가치한 것을 구했다.
그럼 하나님은 무가치한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신다.
우리가 모르고 해로운 것을 구했다.
그럼 하나님은 이로운 것으로 바꿔서 주신다.
그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럼 내가 구한 그대로 받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면,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분이 왜 좋으신 하나님인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란 최선의 것이다.
지금 당장에 내가 보기에 최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나에게 최선이다.
물론 나는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믿는다.

-최선의 것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떼를 써야 하는가?
아니면 졸라야 하는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되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다림조차 은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길이 있다.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것이 무엇인가?
기도하는 것이다.

-어른 대접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에 하나가 어른에게 묻는 것이다.
내가 몰라서 물을 수 있다.
내가 알면서도 물어볼 수 있다.
그게 어른을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 안에 어른을 제켜두고,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자기들끼리 집행한다.
그럼 어른은 말은 안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자신을 한탄하게 된다.
‘뼈골 빠지게 키워놨더니, 이제는 나를 퇴물 취급하는구나’ 싶어 섭섭한 감정이 든다.

-나이가 들어 자녀가 물어오면 고마워하라.
다 큰 자녀들 앞에서, 너무 아는 체 하지 마라.
자녀가 몰라서가 아니라, 대접 차원에서 물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른이시다.
우리가 기도로 대접해 드려야 할 분이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물으라.
다윗이 하나님께 귀찮을 정도로 물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왜? 다윗이 자신을 대접해 주는 걸 알았으니까

-하나님께 대접받고 싶은가?
먼저 하나님을 대접하라.
하루를 하나님께 묻는 것으로 시작하라.
하루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이것저것 물어보라.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도 괜찮게 살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라.

-비판은 하나님을 고약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존중하며 대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고약하게 대접하면 하나님께 고약한 대접을 받고, 하나님을 존중하며 대접하면 하나님께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비판 대신 기도를 하자.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자.

-8월 첫 주부터 셋째 주까지, 3주째 연달아 기도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다.
그럼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구나!’
‘내가 빨리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야겠구나!’
‘더 이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다가는 혼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