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2021):당신은 부활을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눅 20:27-4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1-04-04 12:16
조회
519


부활절(2021)
당신은 부활을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눅 20:27-40)
2021. 4. 4.


프롤로그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주님의 부활의 토대 위에 세워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십자가로 끝나면 안 되고, 부활로 연결되어야 한다.
↳성금요일 신앙으로 마감되면 안 되고, 주일 신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
↳오랜 코로나19로 지쳐 있고, 크고 작은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활 신앙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을 잘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고,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직접 무덤으로 달려갔다.
↳무덤 안을 구푸려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있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자기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어떻게 했는가?
↳주님께 찬양했는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부활을 전했는가?
↳아니다.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 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 전에 당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적이 있다.
눅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말씀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사람들이 없었다.
↳‘원 주님도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거였다.
↳이리저리 허둥대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쳐 숨고 말았다.
↳더구나 여인들이 전해준 부활의 소식마저, 허탄한 말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활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오히려 전혀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어떻게 부활이 가능할까 하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정말 헛 믿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도, 한낱 헛수고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바울의 표현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고난주간 중에서 화요일이다.
↳예수님은 월요일 날 성전에 가셨다.
↳유월절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곳이 성전인지 시장터인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주님은 그 상황을 목격하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쏟아내셨다.
↳누가에 비해 마태는, 예수님의 화난 모습을 보다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약자에게 한풀이하신 것이 아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만만히 보시고, 내어 쫓고 둘러엎고 그러신 것이 아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신 것이다.
↳그 동안 썩어빠진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야, 이제야 뭐가 되려나 보다’ 하고, 예수님께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노래했다.
↳이것을 지켜본 종교지도자들은, 커다란 위기를 느꼈다.
↳예수를 살려 두었다간, 나중에 자기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게 누가복음에 나와 있다.
눅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을 당장이라도 잡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 주위에 있는 백성들 때문에,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다.
↳계속하여 그 기회를 엿보기로 한 것이다.

-저녁 무렵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베다니로 가서 거기서 유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아깝게 사냥감을 놓친 사냥개처럼, 무척이나 아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대책 회의를 했다.
↳예수가 내일도 성전에 나올 것이라는 의견과, 다시는 성전에 발도 붙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예수님은 뒷날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셨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따져 물었다.
눅20: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 대신 그들에게 되물으심으로 위기를 넘기셨다.
↳그러나 그들이 이번에는 좀처럼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때 예수님이 비유를 하나 들었다.
↳이 비유를 듣고 나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눅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를 당장이라도 붙잡아 요절을 내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전을 바꾼다.
눅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은 비겁하게도, 예수님을 예민한 정치 문제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 작전도 실패하고 만다.
눅20: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사두개인 몇 사람이 찾아왔다.
20: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종파였다.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과 더불어 율법을 해석한 전승도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했다.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사탄 등의 영계는 물론 부활과 영생 등 내세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영적인 존재나 내세에 대해서 믿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당연히 사두개인들은 현실적 성향을 띠었다.
↳현실만 인정했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
↳죽음은 현실의 종결 곧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원한 미래에 대해 무관심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현실주의자는 자칫 속물인생이 되기 쉽다.
↳속물인생에게는 진리도 도덕도 필요 없다.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 중요할 뿐이다.
↳물론 현실은 중요하다.
↳우리는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실이 그렇게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현세와 내세 둘 다를 말씀하셨다.
눅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현세가 있듯이, 내세가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있듯이, 저 세상에서의 삶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를 살되, 내세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세의 소망만이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다.
↳부활 신앙만이 현세를 극복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사두개파는 부활과 내세를 부정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사두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부활에 대해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예수님한테 물어본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질문을 해서 안 되니까, 종교적인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더 나아가 죽음으로 몰기 위한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해 아주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맘에도 없는 소리이다.
↳맘속으로는 예수님을 ‘이 나사렛 촌뜨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호칭한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기만행위인 셈이다.

-그럼 우리가 사두개인들을 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럴 수 있냐’고 그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가?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믿습니다” 할 때가 있다.
↳주님 없이도 잘만 살아가면서, 공적인 기도를 할 때는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곤 한다.
↳또 아쉬울 때는, 주님 앞에 엎드려 “한 번만 살려 주세요” 하다가,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안면을 싹 바꾸곤 한다.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들고 나왔다.
눅20: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해서 매우 존중히 여긴다.
↳모세 오경은 유대교의 근간이요 뿌리가 된다.
↳바리새인파는 물론이고, 에세네파도 그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모든 유대인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한 이슈였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인용한 말씀은,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신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신25: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걸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한다.
↳형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죽었을 때에, 동생이 형수를 취해서 형의 대를 잇게 해준다는 말이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좀 이상한 제도 같지만, 그 진의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께서 계대결혼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
↳첫째는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고 형제의 기업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자녀도 없이 불쌍하게 된 미망인을 보호하려는 사회 보장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계대결혼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계대결혼은 구속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룻기에 보면 그 실례가 나온다.
룻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룻4: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않는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걸 모른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본뜻을 왜곡하여 말씀을 엉뚱한 데다 적용시키고 있다.
↳사실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적용시키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거지 두 사람이 교회 주변에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부지런한 편이었고 다른 사람은 게을렀다.
↳두 사람은 이따금씩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곤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 될 즈음에 부지런한 거지가 구걸하러 갈 채비를 하면서 게으른 거지에게 말했다.
↳“이보게. 같이 가서 동냥하지 않으려나?”
↳“난 안 갈래. 자네나 가서 열심히 동냥해 오게.”
↳동냥 나가는 게 귀찮았던 게으른 거지는 낮잠을 즐겼다.

-한참 있다가 동냥 나갔던 거지가 돌아와서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는데 그때 게으른 거지가 잠에서 막 깨었다.
↳옆에서 빵을 먹는 걸 보니 견딜 수가 없었다.
↳배가 더 고프고 침이 꿀꺽꿀꺽 넘어가는데 후회하기 시작했다.
↳‘동냥 나가자고 할 때 같이 갈 걸. 괜히 게으름 피우다 굶게 생겼구먼’
↳그렇다고 좀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주 점잖게 말했다.
↳“지난 번 목사님 설교가 참 은혜스럽더구만. 그때 자네도 듣지 않았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설교 말일 세. 그러니 자네 몸이라고 생각하고 빵 조금만 주게나.”

-그 말을 듣고서 부지런한 거지가 대꾸했다.
↳“그래. 나도 지난 번 목사님 설교를 듣고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네. 그런데 말이야, 난 목사님이 했던 설교 중에 자네가 들었던 그 다음 말씀이 더 은혜가 되더구만.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 말일세.”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중요하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적용이라고 하는 특성상 100% 객관적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자기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두개인들이 어떤 논리를 폈는가?
눅20: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눅20: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눅20: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눅20: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 대로,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둘째가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말을 보면, 현실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 현실성을 잃고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언뜻 보아도 그들의 말은 궤변이요 말장난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을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동기가 불순하다.

-꼭 틀리게 말해야 상처를 받는가?
↳꼭 틀린 말을 해야 싸움이 일어나는가?
↳말에 독이 섞이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담겨있을 때는,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가 남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면서,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내가 뭐 없는 말을 했나?’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하는데…’
↳‘내가 바로 말하지만…’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없는 말을 하면 안 된다.
↳남에 대해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 바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가슴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사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두개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예수님께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눅20: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오늘날도 말씀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의견이 맞는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한다.
↳이건 말씀을 악용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말씀을 선용하는 것인가?
↳말씀을 나한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말씀에다 맞추는 것이다.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성경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을 교묘히 이용하여,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눅2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눅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참조하겠다.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이 오해하였다는 것이다.
↳오해가 무엇인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모르는 것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오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 나았다.
↳부활이 있는지 없는지,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차라리 나을 뻔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에 대해, 사전지식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지식은 잘못된 지식이었다.

-주님은 부활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이 있다 없다는 논쟁하시지 않았다.
↳또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하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하신다.
↳사두개인들이 엉터리 질문한 게,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그들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부활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첫째, 부활체는 장가나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눅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주님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가?
↳그러니까 자유롭게 이혼해도 된다는 말인가?
↳여러 차례 결혼하는 것을 지지하신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는 부부라도 천국에 가면 남남이라는 말인가?
↳그러니 부부간에도 헌금을 따로따로 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의 일차적 목적은 종족번식에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유효한 제도라는 말이다.
↳천국에서는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으니, 시집가고 장가갈 일이 없는 것이다.

-둘째, 부활체는 다시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눅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부활한 몸은 다시 죽을 수 없다.
↳부활의 몸이 영생의 존재라는 말이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말인데, 그럼 영원히 살기만 하면 되는가?
↳아무데서나 일단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다. 어디서 영생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다 말하고 있다.
행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천국에서 영생하느냐 지옥에서 영생하느냐가 중요하단 말이다.
↳지옥에서 영생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백 번 낫다.
↳그러나 부활체는 다시 죽을 수가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복인데, 죽지도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계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주님의 대답을 듣고 있던 서기관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눅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말씀 잘 하셨나이다 하니

-서기관이 예수님더러 “말씀 잘 하셨나이다” 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대답 한 번 기가 막히게 했다는 뜻과 함께,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는 뜻이다.

-먼저 새번역이다.
눅20:39 이 말씀을 듣고서, 율법학자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이어서 공동번역이다.
눅20:39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였고

-그렇다. 주님의 말씀이 옳다.
↳내 말은 틀릴 수 있고, 내 생각은 그릇될 수 있다.
↳자기 이성을 너무 믿어선 안 되고, 자기 지성을 과신해선 안 된다.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이 예수 믿는 걸 힘들어 한다.
↳그들은 이성으로 납득이 되어야 수긍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받아들인다.

-그런데 신앙이란 게 어디 그런가?
↳성경을 믿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으로만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읽을 수 없어, 조금 읽다가 덮어버리게 된다.
↳후에 믿음이 들면, 주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먼저다.
↳그 말씀이 이해되고 이해되지 않고는, 그 다음 문제이다.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도, 그 다음 문제이다.
↳신앙에서 가장 급선무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 라고 믿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을 말씀 위에 세울 수 있다.

-부활신앙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그 부활신앙은 각 자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부활신앙을 오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삶 속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58로 말씀의 결론을 맺겠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끝까지 부활신앙을 붙들고 살기 바란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 바란다.
↳복음을 위한 우리의 수고가, 그 날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을 줄 믿고, 끝까지 달려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