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야곱) 강해 11: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1-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1-05-09 12:31
조회
552



구약인물(야곱) 강해 11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1-8)
2021. 4. 25.


프롤로그

-레아는 동생을 죽자 살자 사랑하는 야곱과, 일단 결혼하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다.
↳사실 레아도 야곱을 짝사랑하고 있던 차에, 아버지의 음모에 흔쾌히 승낙하여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이자 사기결혼이었다.
↳그러나 결혼만 하면 뭐하는가?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야곱이 사랑하는 여자 라헬이, 죽은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난 것도 아니다.
↳옆집도 아닌 한 집에 살고 있다.
↳더구나 라반이 사기 결혼이라며 반발하는 야곱에게, 일주일 후에 라헬도 아내로 준다고 했다.
↳그러니 야곱의 마음이 라헬에게서 돌아설 리가 없다.

-야곱은 레아에게 다정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레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안 됐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그녀의 태를 라헬의 태보다 먼저 열어주신 것이다.
↳만약에 라헬이 첫 아들까지 낳았다면, 천하에 기고만장(氣高萬丈) 했을 거다.
↳레아는 라헬의 등쌀에 아마 견디지 못했을 거다.
↳그걸 모르실리 없는 하나님이, 약자인 레아를 배려하셨다.

-야곱이 레아에게는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만 감당했을 것 같은데, 레아가 먼저 잉태하여 장자를 낳았다.
↳장자를 낳은 후, 얼마나 얼마나 기뻤든지, “르우벤 : 보라 아들이로다” 외쳤다.
↳단순히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그 동안 레아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 외침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제는 희망이 생겼다.
↳자기가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남편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야곱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한, 레아는 이제 하나님께 구했다.
↳아들을 하나 더 낳으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줄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아들을 하나 더 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니었을 거다.
↳꾸벅꾸벅 조는 기도가 아니었을 거다.
↳시간만 때우는 기도가 아니었을 거다.
↳강청하는 기도였을 거다.

-하나님은 그런 레아의 강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셨다.
↳둘째 아들을 주신 거다.
↳그녀는 핏덩이를 안고 감격하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다.
↳레아는 아이의 이름을 ‘들으심’이란 뜻으로 “시므온”이라고 지었다.

-둘째 아들을 낳았음에도, 남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야곱은 여전히 일편단심 라헬이었다.
↳오히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라헬에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러던 중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란 이름의 뜻은 ‘…연합하다’이다.

-그 이름에 레아의 소박한 소원이 담겨 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레아는 남편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거창한 것을 해달라고 졸라댄 것이 아니다.
↳단지 남편의 진정어린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레아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계속되었다.
↳그녀에게 넷째 아들을 주어 낳게 한 것이다.
↳그 아들을 낳고,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며 외쳤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유다”로 지은 것이다.
↳레아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
↳레아가 세 아들을 낳을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위인이, 넷째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오, 레아, 그 동안 미안했어요. 내가 너무 당신에게 마음고생을 시켰던 것 같아요. 이 몹쓸 남편을 용서해줘요” 이렇게 돌변해서였을까?
↳에이, 그렇게 보기 힘들다.

-아니 그럼 어떻게 레아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야곱이 바뀐 것이 아니고, 레아가 바뀐 것이다.
↳상대가 바뀐 것이 아니고, 자신이 바뀐 것이다.
↳상대가 바뀌면 찬양하겠다고 하면, 평생 찬양 못한다.
↳레아는 그 동안 남편만 바라보는, ‘야곱 바라기’로 살았다.
↳남편의 사랑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다 남편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 전에는 남편과 관련된 모든 게 불평거리였다.
↳남편이 자기 곁에 있으면 ‘어차피 라헬한테 갈 거면서 빨리 가라’고 했고, 라헬한테 있으면 시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헬이 웃으면 ‘뭐가 좋아서 웃는가’ 하고, 울면 ‘왜 청승맞게 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온통 불만거리였다.

-불평하는 사람이 찬양할 수 있겠는가?
↳원망하는 사람이 찬송할 수 있겠는가?
↳찬송가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은 할 수 없다.
↳우리의 눈을 환경이 아닌 하나님께로 향할 때,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입술로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환경이 아닌 주님께 고정하려고 하자.
↳그러면 ‘나의 발은 춤을 추며 나의 손은 손뼉 치며 나의 입은 기뻐 노래 부르네’가 될 것이다.

-레아가 지금 같은 추세로 출산한다면, 10명도 좋고 20명도 문제없을 거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레아에게만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29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여기서 “멈추었더라”의 원어 ‘아마드’는 ‘지체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끝났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30장 14절 이하에 보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출산한다.
↳레아의 출산이 왜 갑자기 멈추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라헬도 심적 고통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라이벌 관계인 레아가 아들을 연달아 넷이나 낳았는데, 자기에게는 태기조차 없다.
↳아무리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야곱이 자기에게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힘들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차츰 레아를 시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한 남편을 두고 두 여인이 싸우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하다.
↳남편에게 더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내의 마음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야곱이 두 여인과 결혼한 것이다.
↳이미 가정이 삐그덕 거릴 수 있는, 모순을 안고 출발한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한 남자가 여러 아내와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능력 있는 남자가 여러 여자와 사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권장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산이 신의 축복으로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다산을 위해서 일부다처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원리는, 일부다처가 아닌 일부일처이기 때문이다.
↳일부다처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건 하나님 앞에 범죄이다.

-우리는 혼외정사가 사회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음행하는 간통죄의 형사적 처벌이 사라진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실 수 없다.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원리인 일부일처를, 야곱이 의도적으로 어긴 것은 아니다.
↳스스로 원해서 두 아내를 택한 것은 아니다.
↳삼촌한테 속아서 두 아내를 떠안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 아내를 얻은 것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야곱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야곱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 아내 사이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라헬을 미워했고, 라헬은 남편의 아들을 연달아 넷이나 낳은 레아를 시기했다.
↳오늘은 특히 라헬의 시기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조금 시샘한 것 정도가 아니다.
↳얼굴에 핏발이 서릴 정도로, 흥분한 모습으로 시기한 것 같다.
↳그 동안 누르고 살았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다.
↳그때는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게 된다.
↳야곱에게 대드는 라헬을 보게 된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가?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이 얼마나 앙칼지게 대드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아니 이게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이게 진짜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냉정하게...라헬이 아기를 못 낳는 것이, 야곱 때문인가?
↳야곱이 남자로서 문제가 있어서인가?
↳야곱이 라헬에게서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
↳아니다... 야곱은 누구보다도 라헬이 낳은 아들을 품에 안고 싶었다.
↳물론 라헬의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 있는 야곱을, 라헬이 자극하고 만 것이다.

-상대가 감정적으로 나오니까, 야곱도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은 야곱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고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기 태에 문제가 있으면서, 그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는, 라헬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야곱이 성을 내고 말았다.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내본 적이 없다.
↳그렇담 야곱의 인내심이 바닥나 폭발했다고 봐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내심의 한계를 갖고 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그 한계가 일정치 않다는 데 있다.
↳어떨 땐 열 번 정도 참을 수 있는데, 어떨 때는 단 번에 화를 낼 수 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는 말에, 야곱은 성을 내면서 라헬에게 뭐라고 쏘아부쳤는가?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그래도 야곱은 라헬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돌리지는 않았다.
↳만약에 야곱이 이렇게 쏘아부쳤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한테 문제가 있으면서, 왜 그런 억지를 부려?”
↳라헬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라헬 성질에 팔 걷어 부치고 “그래 나는 애기도 못 낳는 여자다”며, 아주 이판사판으로 대들었을 수 있다.

-야곱은 성이 잔뜩 났음에도, 말은 가려서 했다.
↳사실 그래야 한다.
↳어떻게든지 서로에게 극단적인 말은 삼가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것이다.

-특히 부부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말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제 당신하고 더는 같이 살 수 없다.”
↳“더 산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 같다.”
↳“더 늦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낫겠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부부들이 있다.
↳이런 말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가정은, 그만큼 깨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한번 내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주어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감정이 상해도, 상대에게 극단적인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야곱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야곱은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는, 자신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의 문제도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라헬이 여자로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얼마동안 닫아두었을 뿐이다.
↳일명 속도 조절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뿔이 난 라헬은, 그런 남편의 말에 수긍하지 못했다.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배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배우는 것은, 더 쉽지 않다.
↳사소한 자존심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헬은 남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기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주장을 편다.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여기서 “들어가라”는 말은 ‘동침하라’는 뜻이다.
↳또 “무릎에 두리니” 라는 말은, 양자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당시에 이런 일이 흔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이 주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 종의 소생도 당연히 주인의 자식이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을 앞세운 라헬은, 사라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사라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가, 종인 하갈한테 주인으로서 품위를 잃었고, 남편인 아브라함한테 악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라헬은 사라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똑같은 전철을 밟고 말았다.

-만약 라헬이 야곱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태를 열어주십시오.”
↳라헬은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레아가 언니인데, 자기가 좀 지나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언니와 화해하고 가정도 화목해졌을 것이다.
↳그걸 보신 하나님은 라헬에게도 은혜를 주셨을 것이다.
↳그럼 굳이 종의 몸을 빌리지 않고도, 레아와 라헬을 통하여 12지파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사가 틀어진 라헬은, 전에 사라가 실패했던 방법을 반복하였다.
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은 사라의 실패에 대해, 듣지 못했을 수 있다.
↳라헬이야 그렇다고 쳐도, 야곱이 더 문제다.
↳야곱은 라헬에게 떠밀려서, 빌하에게로 들어갔다.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일로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아마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야곱이 그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라헬을 끝까지 이해시키고 설득했어야 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면서, 라헬의 제안을 지혜롭게 거절했어야 한다.
↳하지만 라헬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서, 집안의 문제가 한층 복잡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라헬의 종 빌하에게 아이가 금방 들어선 게 재미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했는데, 계획을 세운 데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그럴 때 착각할 수 있다.
↳라헬은 자기가 잘한 줄 알았을 것이다.
↳자기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함정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잘 됐다...그러면 그걸 복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빌하가 하갈처럼 나오지 않아서 그랬지, 자칫 큰 화를 당할 뻔 한 것이다.

-라헬이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었다.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당시는 엄마가 이름을 지었는지, 아니면 야곱 집안에만 그랬는지 몰라도, 호적상 엄마인 라헬이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아이 이름인 단은 ‘판단하다’ ‘판결하다’는 뜻이다.
↳억울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판단을 하여 그 사정을 들어준다는 의미이다.

-6절의 라헬의 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내 호소를 들으사”
↳라헬이 기도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어떤 기도를 했겠는가?
↳당연히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다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었다.
↳라헬은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자의 마음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도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 생각이 따로 있었고, 자기 계획을 미리 세워놓았다.

-기도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내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면,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불행한 동기에 의해 태어난 아들들을 만나게 된다.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단과 납달리는 부모의 축복 속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넷씩이나 낳은 레아에 대한 라헬의 질투심 때문에 태어났다.
↳단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이고, 납달리는 경쟁하기 위해서이다.
↳라헬은 몸종을 통해, 단을 자기 무릎에 앉혔지만, 성이 차지 않았다.
↳아이를 하나만 품에 안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레아에 대한 질투심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타들어간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진다.
↳쌓으면 쌓을수록 더 높이 쌓고 싶어진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만족이 있을 수 없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는가?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자족할 수 있다.

-라헬은 아들 하나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몸종에게 또 아이를 갖게 한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납달리이다.
↳“납달리”란 이름의 뜻은 ‘경쟁’이다.

-경쟁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나온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언니 곧 레아이다.
↳언니하고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하는데 뭐를 이겼는가?
↳레아는 아들이 네 명이고 자기는 두 명이다.
↳그럼 4 : 2 아닌가?
↳숫자로 볼 때 배나 적다.
↳그렇다면 이겼다고 보기 어렵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8절을 공동번역성서로 읽겠다.
라헬은 "내가 언니와 겨루는데 하느님께서 편들어 주셔서 드디어 이겼구나" 하면서 아기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하느님께서 편들어 주셔서”이다.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경쟁에서, 레아한테 이겼다는 것이다.
↳지금 레아는 29장 끝 절처럼 출산이 멈춘 상태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라헬이 그렇게 자기 맘대로 해석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차지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기가 막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처럼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매이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과 계약을 맺고, 그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건 헛수고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 곧 코람데오이다.

-우리는 화를 낼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이 화 한 번 안 내고 살 수 있겠는가?
↳그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극단적인 말은 삼가는 것이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서이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인간적인 방법이, 더 쉬워 보일 수 있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심지어 논리적일 수도 있다.
↳한 동안 기도를 했음에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긴다고 만족이 있는 건 아니다.
↳경쟁하여 누구에게 이겼다고, 내가 행복해 지는 게 아니다.
↳행복은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 삶에 자족하며 살 수 있는가?
↳그 답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주셨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