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8:당신은 오른편에 설 사람입니까?(마 25:31-4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1-26 00:00
조회
1067
마태복음 강해 68당신은 오른편에 설 사람입니까?(마 25:31-46)2017. 11. 26. 프롤로그

-옛날 사람들은 양의 가죽이 귀신을 쫓는다고 여겼다.
이런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평양에 사또가 부임해 내려오기만 하면 죽는 사고가 일어나서 다들 꺼려하자, 궁궐에서는 방을 써붙여 지원자를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어느 용기있는 사람이 지원하여 신임 사또로 갔는데, 첫날밤이 되자 부인의 치마 끝에 질긴 명주실을 묶어두었다.
한밤중이 되자 갑자기 촛불이 꺼지며, 부인도 사라졌다.

-그 다음날 사또가 명주실을 따라가보니, 산속 바위 구멍으로 이어져 있었고, 구멍속으로 들어가보니 부인이 우물에서 물을 깃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괴물이 잡아간 것을 알게 된 사또는, 부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고 시켰다.
부인이 괴물로부터 알아온 답은, 바로 양의 가죽이었다.
괴물의 침소로 들어간 사또가, 양가죽 칼집을 갖다대자 괴물은 사라졌다.
그 때부터 장인들은 칼집을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옛조상들은 염소를 고집센 노인에 비유했다.
주름진 얼굴에 긴 수염이 노인과 비슷하고, 끌고갈 때 가기 싫으면 버티는 습성 때문이었다.
옛말에 염소가 담을 넘으면 옛친구도 안 온다는 말이 있다.
염소가 지붕에 올라가면 어른이 병난다는 말도 있다.
염소가 종종 말을 안 듣고 날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방정맞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게다.

-또 ‘염소 뿔 세다 하니까 황소에게 덤벼든다.’ ‘잘 뛰는 염소 울타리에 뿔 걸린다’는 말이 있다.
분수를 모르고 설치지 말라는 뜻일 게다.
염소는 양과 비슷하긴 해도, 우리 조상들은 수염과 뿔이 있는 녀석들의 모습에서 고집과 건방짐을 연상했으므로, 염소는 양만큼 사랑받지 못했다.

-옛부터 양은 긍정적인 의미로, 염소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 역시 24장에 이어진 주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말씀이다.
24장에서는 주의 재림과 종말의 징조를 언급했다.
25장에서는 주의 재림과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를, 비유 세 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라서 어떤 논리적 설명보다 귀에 쏙 들어온다.

-첫 번째 비유에서,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혼인잔치에 못들어 간 다섯처녀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갔던 다섯처녀와 똑같은 고생을 했다.
신랑을 맞기 위해 기다리다 지쳐 잠든 것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딱 하나,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의 계산으로 신랑이 언제쯤 오니까, 이 정도 기름이면 충분할 거다 예상했다.
그런데 신랑이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늦은 시각에 왔다.
결국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처녀는,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도 없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등을 교회 다니는 것으로, 기름을 믿음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믿음을 등으로 행함을 기름으로 해석한다.
엉뚱한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교회는 열심히 다닐 수 있다.
또한 믿음과 무관한 삶을 사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

-예수 믿을 기회가 언제까지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믿음은, 어떤 식으로는 표현되게 되어 있다.
믿음이란 다른 말로 주인 바꾸기다.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인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기 안에 주인이 바뀐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방식이, 절대로 같을 리가 없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다.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두 번째 비유에서, 각 자가 받은 바를 어떻게 선용해야 하는지, 자기가 맡은 것에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다섯 달란트냐 두 달란트냐 한 달란트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달란트의 가치가 노동자 6,000일 곧 20년 품삯이라고 했다.
그러면 한 달란트를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주인이 기분대로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다.
정확한 기준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셨다.“각각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장사하여 갑절을 남겼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뒀다가 그대로 가져왔다.
주인은 돌아와 결산을 하면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했고, 한 달란트 밭았던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꾸중을 했다.

-달란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 인생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생은 같을 수 없다.
내 인생이 다르고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르다.
그러므로 타인의 흉내를 내지 말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게 충성이다.

-인생에 결산할 때가 온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생 결산을 해야할 때가 온다.
그 때 주님의 결산 기준은, 성과(업적)가 아닌 충성이다.
우리 교회 믿음의 식구들 모두가, 그날 주님 앞에서 이런 인생 결산을 하면 좋겠다.“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비유로 일명 양과 염소로 비유이다.
세 번째 비유 역시 종말에 대한 말씀이다.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염소와 양을 등장시켜, 선명한 흑백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날에는 회색이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일 게다.
하얀색으로 상징된 양은 영생으로, 검은색으로 상징된 염소는 영벌로, 명확하게 구분될 날이 오고 있다.

-그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재림 주님은 영광스런 모습이다.
결코 초림 때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지만 말이 안 된다.
별을 연구하던 동방박사들이 찾은 곳은, 예루살렘 왕궁이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윗의 자손이니 베들레헴에서 날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목자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 예언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탄생한 곳이 사람의 방이 아닌 짐승 밥통은 이해불가다.
자라신 곳도 이스라엘 저 북쪽 변방 나사렛이었다.
나사렛 예수란 다른 말로 촌뜨기 예수란 말이다.
주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살다 가셨다.

-하지만 재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오신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끝까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놀랄 것이다.
겁 없이 예수님과 교회를 박해하고 조롱하던 나라와 사람들이, 그분 앞에 기겁하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정도로 대단한 분인지 몰랐다며 놀라워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세가 위축되고, 그리스도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기를 펴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가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 된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미국 하바드 대학의 바우라 교수가, 전 세계의 저항시를 다 모아 정리를 했는데, 그 중에 으뜸으로 꼽은 시가 바로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다.

-그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그날을 기대했기에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친일한 사람들은 소수였다.
일제에 저항해봤자 소용없고, 그 저항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으니까, 체념하여 친일로 돌아섰다.

-마지막 시대 마지막 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항 정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한계를 느껴서 체념이 되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만다.
세상과 적당하게 주고받기 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지 못했다.
그날이 왔지만,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다수가, 고난과 가난으로 몰렸다.
그날이 왔지만, 단죄 돼야 할 친일 부역자들이 그대로 잘 먹고 잘 살았고, 그 후손들 중에는 대통령도 나왔고 국회의원들도 제법 나왔다.

-하지만 주님이 심판주로 오실 그날은 다르다.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날에 세상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선다.
모든 민족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 날에는 양과 염소가 분명히 구분된다.
양이 염소 대열에 합류할 수 없고, 염소가 양 편에 끼어들 수 없다.

-그날의 심판이 있기 전에는, 양과 염소가 뒤섞여 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섞여 살 듯이....
교회 안에도 거듭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교회 안에서조차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주님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이, 주인에게 황급히 말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그러자 종들이 재촉하듯 주인에게 물었다.“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추수 때까지는, 곡식가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함께 있지는 못한다.
그날이 오면 ,분리된다.
그날이 오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모아 불사르게 된다.

-교회 안에서 심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그건 자기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참고 계신다.
그분도 아직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먼저 자기 영혼을 신경써야 한다.
타인의 영혼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영혼이 자기 영혼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늘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자기 신앙 챙기기도 벅찰 때가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겠는가?
그건 용감해도 보통 용감한 게 아니다.
주인이 종더러 내 자리에 앉으라고 강권해도, 종은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물며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종이 그 자리를 엿본다면 날잡아서 크게 혼날 일이다.

-우리는 ‘심판’하면 혼내는 것, 경고하는 것, 퇴장시키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건 잘못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주인이 보기에 잘한 사람은 그날 복을 받는다.-------------------------------------------------------

-여기서 상을 수여하는 이가 누구인가?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임금이다.
31절에 나오는 “인자”와 동일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날의 심판주임을 말해준다.

-이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신앙고백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 고백 중에 하나만 부인해도, 예수 안 믿는 것이다.
보면 예수를 희한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 나도 예수 믿는다”고 할 때, 무턱대고 “우리는 영적 가족이다”라고 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당신은 어떤 예수를 믿느냐”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
“당신이 믿는 예수에 대해 한 번 말해보라”

-상받을 자들이 이미 오른편에 있다.
재판장이 한 명 한 명에게 주문을 날리며, “너는 천국” “너는 지옥” 그렇게 판결할 거 같지 않다.
자기가 알아서 오른쪽으로 가고, 알아서 왼쪽으로 갈 거 같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이 한 호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우리말 성경에서는 미래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원어를 살피면 완료 분사형으로 나온다.
즉 복의 연속성을 말하고 있다.
심판대에 서기 전부터 복 받은 자로 살았다는 것이다.
죽기 전 이 땅에서 이미 복 받은 자로 살았었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복 받은 자임을 믿으라.
심판대 앞에 서기 전부터 우리는 복 받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고인이 잘 죽었을 때의 상을 호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잘 죽은 사람인가?
예수 잘 믿고 죽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이 예수 잘 믿다가 죽었으면, 꼭 90까지 못 살았어도 무조건 호상인 것이다.
예수 믿은 것 자체가 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복 받은 자입니다.” “당신은 영원히 복 받을 자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는 것이다.
예비된 나라는 하나님나라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이 어떤 곳인가?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이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고 한다.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신 결정적인 이유는,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해 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상속자란 물려받을 만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서 이 천국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는 말이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시시한 것 가지고, 하나님을 테스트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즉각적인 응답을 하실 때 뿐만 아니라, 응답을 지연시키실 때도 마찬가지다.
그분이 응답의 때를 조절하시는 거지, 응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아들을 내주신 분이, 우리에게 그 무엇이 아까워서 못 주겠나?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상받는 이유가 나온다.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의 선행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행은 일반 선행이 아니다.
참된 믿음의 표지로서의 선행이다.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로서의 선행이다.

-그 선행의 대상이 누구인가? 주님이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주님께 그런 선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 선행의 내용은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이다.
필요중심적 선행이었다.
그가 가장 필요로 한 선행이었다.
내 중심의 선행이 아닌, 타인 중심의 선행이었다.
자기 의를 위한 선행이 아닌, 하나님 사랑 실천으로서의 선행이었다.

-무엇보다 선행을 의식하지 않고 했다는 것이다.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각 절마다 “어느 때에”가 나온다.
선행 자체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선행 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주님께 이런 선행을 하면, 주님이 내게 이런 칭찬과 상급을 주시겠지’ 하는, 계산된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신앙에 따른 순수하고 자연스런 삶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이 주님께 한 것인 줄도 몰랐다.
그게 진짜 선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대답하는 오른편 사람들을 향해 주님이 대답하셨다.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우리에게 변장하고 찾아오신 그리스도로 보고 그렇게 대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게 곧 그리스도께 한 것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중세의 한 마을에 수도원이 있었다.
깊은 영성 때문에, 그 마을뿐 아니라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그 수도원은 늘 붐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수도원의 분위기가 점점 시들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횟수도 줄고, 또 세상을 향한 수도원의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수도원의 쇠락을 안타깝게 여긴 수도원장은, 멘토와도 같은 산 속의 수도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였다.
“어떻게 하면 기울어가는 수도원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수도사는 한참 기도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수도원은 지금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그리스도께서 변장하고 함께 계시는데, 여러분이 그 변장한 그리스도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깨달은 수도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도사들을 모아 놓고 지혜로운 수도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이때부터 수도원 분위기가 바뀌었다.
‘혹시 이 사람이 변장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서로에게 그리스도께 대하듯 했다.
그러는 동안 이 수도원의 영성은 점차로 살아났고, 다시 영향력 있는 수도원으로 부흥하였다.-------------------------------------------------------

-심판주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 땅에서도 악담을 들으면 기분이 몹시 나쁘다.
저주를 듣고도 태연하게 있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아무리 저주를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나에게 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저주를 한 사람에게 저주가 되돌아간다.

-그런데 심판주 앞에서의 저주는 다르다.
꼼짝 없이 받아야 한다.
저주를 선언한 즉시 그 저주가 임한다.
한 번 내려진 저주는 취소되지 않는다.
절대로 축복으로 뒤바뀌지도 않는다.

-재판장이 무턱대고 저주를 선언한 것이 아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기분에 따라 고무줄 재판을 한 것이 아니다.
명백한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적용했다.

-그들 역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따져물었다.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사실 그들은 억울해 할 법도 하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주리고 목마르셨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헐벗었거나 옥에 갇히셨다면, 그들이 모른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억울함을 하소연 할 만하다.

-주님은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는 분명하게 대답하셨다.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변장하고 찾아오신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시 노숙자가 된 목사> 이야기가 있다.
그 목사님의 이름은 예레미야 스티펙(J. Steepek)이다.
그는 만 명의 신자가 모인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주일 아침에, 노숙자로 변장하고, 30분간 교회에 들어오는 신자들 앞에서 서성댔다.
그런데 그 많은 신자들 중 단 3명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음식을 사먹게 동전을 요구하자, 아무도 동전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교회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자, 안내로부터 뒤에 가서 앉아 달라는 요구를 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그 중에는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광고를 마친 다음, 한 장로님이 일어나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을 소개했다.
“예레미야 스티펙(Jeremiah Steepek)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신자들은 기대에 넘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런데 뒤에 앉아 있던, 그 노숙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박수는 멈추고 모든 눈이 그를 주시했다.
장로님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스티펙 목사는, 그날 본문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신자들 중엔 흐느끼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말씀을 읽고 나서, 스티펙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으로, 이웃과 함께, 그리고 그들 옆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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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 영생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우리의 속으로 믿는 바를 겉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 영생을 보장할 수는 없다.